2015년 8월 20일 목요일, 맑음

“여보, 나는 이제 덧문단속, 문단속, 열쇠 잠그기가 지겨워 이탈리아에 계속 살라면 두 손 두 발 다 들 것 같아.” 남의 집을 빌려 사는 처지여선지 가까운 곳에 나가더라도 창문마다 덧문을 내리고, 창문을 안으로 잠그고, 열쇠로 현관문을 잠그고, 세란다 곧 철창문을 좌우에서 닫아 쇠사슬을 두르고 자물쇠를 잠근다. 이어서 바깥현관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가면 대문열쇠를 잠근다. 차고문의 자물쇠통을 여닫는 일도 당연하다.

이탈리아에 처음 왔을 적에도 남자마다 열쇠장사를 방불케 하는 열쇠꾸러미를 허리띠에 차고 다니고 여자마다 핸드백에서 여남은 개 분량의 열쇠꾸러미를 꺼내는데 놀라서 보스코에게 까닭을 물었더니 도둑이 많아서 그러기 보다는 사유재산권을 중시하는 유럽사회의 전통에서 온 것이란다. 스쿠르지가 온 몸에 쇠사슬을 감고서 열쇠꾸러미를 주렁주렁 달고서 등장하는 장면이 그려질 만하다.

우리가 지내는 그랄리아는 별장지역이지만 집집이 생울타리를 하고서도 반드시 바깥으로 쇠울타리를 다시 해서 경계를 두르고(그 쇠울타리가 없으면 집집이 키우는 황소만한 개들이 행인을 모조리 잡아먹을 게다), 심지어 공터에 조그만 텃밭을 하더라도 반드시 울타리를 해두고 열쇠를 잠가둔다. 내것을 철두철미 지킨다면 남의 것도 그만큼 존중해주려나?

오전에 비엘라의 피아쪼(Piazzo)구역 산자코모성당(13세기)에서 사목하시는 쟌니 파니고니 몽시뇰을 방문하였다. 지금 광주대교구 옥주교님이 90년대에 로마에서 유학하실 적에 소개해 주셔서 여러 곡절로 지금까지 우정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의 우리 빵고신부처럼, 옥신부님은 그 당시 여름방학이면 이탈리아 북쪽 끝 발레모쏘(Valle Mosso)라는 도시 본당의 파니고니 신부님께 ‘사목 아르바이트’를 오셨고, 이 지역 교우들과 성직자들에게 한국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기셨다.

비엘라 동편 언덕인 이 지역은 일대를 통치하던 베르첼리의 대주교가 비엘라를 내려다보는 망루와 성곽을 지었을뿐더러, 오로파 계곡의 상수도를 끌어다 거대한 수조에 받아서 저장하고 비엘라로 흘려보내던 곳이어서 일대 귀족과 유지들이 이 언덕에 저택을 짓고 살았단다. 피아쪼는 이탈리아에서도 '유서 깊은 마을'(borgo storico) 가운데 하나로 뽑힐만큼 중세와 근세의 건축물이 많은 곳이다. 

3년만의 해후여서 몽시뇰은 불편한 다리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에게 광장 주변의 르네상스 시대 귀족 저택들이며, 지금도 ‘히브리인 게토(Ghetto degli Ebrei)'라는 글자가 선명한 유대인 구역 등을 안내해 주셨다(지금도 유대교 회당이 있고 일대의 아파트들은 유대인들이 모여 산단다).

’게토‘는 교황 통치시대 로마에서 시작해서 전유럽에 퍼졌고, 해가 지면 모든 유대인들은 이 구역에 들어가야 했고 밖에서 출입구를 잠그고 보초가 섰으므로 불이 나도, 사람이 죽어가도 자체해결을 해야 했단다. 게토에서 살아남고 히틀러 손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지금은 전 세계의 경제권을 손아귀에 쥐고 무기장사와 전쟁, 식량파동과 IMF를 번갈아 일으키게 되었다니...

중세에는 베르첼리 주교의 성곽이 민중의 반란으로 소실되고, 베네딕토 수도원이 세워졌으나 나폴레옹이 철수시키고, 근대에는 양모를 짜는 공장을 거쳐 현대에는 일대 부유층의 고급주택이 되어 있는 건물도 안내하였다. 집주인 아울레리오씨는 전직대사의 방문에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벽화와 천정화를 복원한 자기 사무실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그 집 회랑(portico)은 한 때는 세도가 성직자들이 비단옷을 끌며 거닐었고, 한때는 분도회 수사들이 검은 수도복을 끌며 묵상에 잠겨 거닐었고, 한때는 부유한 상인이 정부(情婦)를 두고 미희들의 옷자락에 에워싸여 거닐었을 돌바닥인데 지금은 회칠이 벗겨지고 벽화도 사라져서 지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는 훈계를 내리고 있다.

▲ 정부들의 초상화를 방방에 천정에 그려넣게 한 부호들의 호기

▲ 주인이 소장한 고지도에는 중국, 일본과 달리 조선은 대충 길죽하게 그려져 있었다

3년 전 우리 가족 전부에게 후한 식사대접을 하고 금년에 위신부를 오로파에 사목차 초대해준 몽시뇰에게 식사대접을 하러 방문한 길이었는데 오늘 점심도 결국 몽시뇰이 계산하고 말아 우리는 본의 아니게 ‘공짜클럽’의 횡포를 또한번 벌인 셈이다.

전순란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