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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있다(2)<함석헌(咸錫憲) 사상계사(社)를 찾다>
문대골 | 승인 2015.11.12 12:21

함석헌이 사상계사(社)를 찾아왔다. 장준하는 함석헌이 사상계사를 찾아온 날을 확실하게 기억한다. 1957년 7월 18일, <건전한 사회는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소위 지명도 있는 인사들의 좌담회를 가졌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좌담회의 주자들이 백낙준, 우진오, 윤일선, 김팔봉 그리고 함석헌 이었다. 후에 장준하는 이 좌담회를 사실 ‘함석헌을 불러내기 위해서였다’고 실토한 바 있다.

함석헌을 대면하기 이전부터 함석헌에 대한 존경의 염(念)을 품어온 장준하였지만 지난해 말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읽고 난후 장준하는 기이한 예감(?)에 사로잡힌 바 있었다. 그 예감이란 “어쩌면 이 분과 나는 일생을 함께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에 따라온 또 하나의 생각이 함석헌을 가능한 한 신진인물(新進人物)들 속에, 각 계의 전문인들 속에 끊임없이 불러내야겠다는 것이었다.

   
▲ 「思想界」. (사진출처: 장준하기념사업회)
장준하는 그의 「思想界」에 함석헌의 그 글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발표한 후 상임편집위원 안병욱과 함께 함석헌을 찾아 사례하고, 돌아와 보름쯤 되었을 무렵, 안병욱이 환한 얼굴에 웃음을 띠며 다시 원고 한 통을 내놓는 것이었다.
“함 선생님 글입니다. 3일 동안 공들여 받아낸 글입니다….”
원고를 받아든 장준하는 수고했다. 고맙다도 없이 그 원고를 들고 사장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장준하가 사상계에 발표한 함석헌의 글 가운데 대표적인 그로 언급하게 되는 <새윤리>였다. 안병욱이 1월 말경 받아온 이 글 <새윤리>는 두 달 후 4월호에 게재된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다. 그는 정신을 실 살림에서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뜻에서 윤리는 자주 변해왔다. 절대 정신 속에서만 사는 인간이라면 새 윤리니, 낡은 윤리니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간은 실지로는 없다. 있는 것은 넘어지면서 또 일어나면서, 찾으면서 또 깨달아가면서 나아가는 역사적 인간이다. 그에게는 하나님은 완성이면서 영원히 미완성의 하나님이다. 그는 부정 속에서만 긍정을 본다. 불의 속에서 의를 본다. 자주 어지러움이 물결을 일으키면서 통일을 한다. 저에게는 고정된 기성품의 하나님이 없는 동시에 기성품의 선도 없다. 전체가 무엇인지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만 인류의 지나간 길에 그 벗어버린 옷이 버려져 있는 것을 볼 뿐이다. 그 옷을 놓고, 아무리 귀납을 시켜보아도 그것은 그의 모습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자란다’라는 한마디 말을 얻을 뿐이다”

“이때껏 인류에게 지상명령을 내린 것은 피도, 나라도, 임금도, 돈도 아니요, 전(全)(자각한 민중, 필자 주) 그 자체다…국경은 늘 밟고 넘어가서만 지킬 수 있고, 리는 늘 버리고 새살림(生)에 들어가서만 할 수 있고, 윤리는 늘 뛰어넘어서만 윤리적일 수 있다. 인격적인 생명은 늘 새 세계를 삼킴으로서만 자란다. <한>-전체-은 사람 속에 있다”

장준하는 함석헌의 이 글 <새윤리>를 “이것은 참으로 새 질서를 대망하는 격동의 시대에 처한 인류의 과제를 과감히 제시한 글이었다”고 풀었다. 장준하는 이 글에서 38선, 암매매, 사창, 후원회비등을 해학적인 비유로 들어 우리의 현실사회를 예리하게 비판할 뿐만 아니라, 새 질서, 새 윤리를 제창하는 함석헌의 ‘인격’을 읽으면서 함석헌만을 위한 한‘생각’을 굳히게 된다.

그 ‘생각’이란 “함석헌을 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었다. 신진인물, 전문적인 인물들 속으로 불러내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함석헌의 사람들 소위 그의 제자라 하는 이들은 “무슨 소리냐?”할는지 모르지만 함석헌은 다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상당부분 장준하의 작품(?)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함석헌에 대한 장준하의 생각은 일종의 계시(啓示, revelation) 같은 것이었다. “내가 선생님을 제대로 모셔야지….” 그것은 얼마 후 함석헌에게도 똑같이 온다. “내가 장준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던지 하겠다….”

   
▲ 思想界 시절(1965년 1월). (사진출처: 장준하기념사업회)

그래서 그로부터 두 달 후 <건전한 사회는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의 좌담회에 함석헌을 불러낸 것이다. 백낙준, 김재준, 윤일선 3인은 물론, 언론인이요 소설가였던 김팔봉(필명 김기진 金基鎭)도 이미 퍽 가까운 지인의 사이들로 아무런 부담 없이 속 얘기를 하는 사이들 이었다. 함석헌만은 외인이었다. 이미 대학총장이요, 학장이요, 명교수에 백낙준의 경우 이미 장관을 역임함 터였다. 함석헌만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되본 것이 없는 이었다. 그나마 함께한 이들이 알고 있다는 함석헌이라는 이름도 사상계에 발표된 2회의 글을 통해서였다.

모두가 기독교인이었던 터라 문제가 된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는 대충 읽어본 터였고, 그 글이 지금 장안에 말썽꺼리가 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모두가 함석헌은 초면에 뿐만이 아니었다. 그분들의 눈에 비친 함석헌은 간데없는 ‘촌놈’이었다. 입은 옷은 중위에 적삼, 바지는 발에 한 뼘은 미치지 못했고 적삼에는 두 주머니가 양편으로 달려있는 베 조끼를 바쳐 입었는데, 그 조끼주머니, 필기구를 비롯해 몇 가지 용품들이 들어있어 마치 애기 벤 여인의 배를 연상 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신발은 검정 고무신이었다. 그때, 장준하는 무엇을 연상했을까?

필자가 함석헌이 장준하의 작품이었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필자가 장준하를 생각할 때마다 맘 저려오는 것은 장준하의 함석헌 이해에서다. 장준하가 함석헌과의 처음 교제를 시작할 때의 함석헌은 물론 ‘촌놈’이었다.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어도 머무적거리는, 나이어린 사람들이 턱턱 앉는데 누군가 자리 잡아 앉힐 때까지 갈팡질팡하는, 식탁의 자리에서도 머뭇머뭇하는 함석헌을 대하는 장준하의 자세가 어떠했겠는가를 필자가 거의 사실에 가까우리만큼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함석헌에게서 바닥 같은 하늘사람, 하늘같은 바닥사람을 본 것이다. 장준하는 함석의 그 ‘촌놈’스러움에서 하늘(곧 민중)의 모습을 본 것이다. 누구의 눈에도 함석헌의 그 촌스러움은 어색한 것이었지만 장준하에게 그것은 이후 그가 평생에 유일한 스승으로 모실이의 구상(具象, concreteness; embodiment)이었다. 그건 정말 신비라 아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촌놈스러움, 아무래도 좀 덜 된듯한, 아무래도 좀 더 익어야할 것 같은 그 사람, 그 사람이 장준하의 구상으로 그 가슴에 안겼다니 말이다.      

백낙준도 김재준도 윤일선도 김팔봉도 좌담회를 마치고 돌아갔다. 장준하는 함석헌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선생님, 여기 잠깐만 계시지요, 제가 우선 선생님들 배웅해드리고 나서 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좌담회에 참석한 분들을 베웅한 장준하가 다시 돌아왔다.

“선생님, 저희 사원들과 저녁을 함께 하셨으면 하고 편집부 간부들을 기다리도록 했습니다. 시간이 허락하시면 저녁 같이 하시지요” 여전히 머뭇거릴 함석헌을 앞서서 한일관으로 끌고(?) 갔다. 장준하도 약간은 어이없어 했다. 한 시간은 훨씬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함석헌은 도대체 말이 없었다. 식사가 끝난 후 함석헌은 딱 한마디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점심 먹고 저녁 먹어 돈 다 쓰면 잡지는 무엇으로 하나?”
그러면서 장준하는 그 저녁의 함석헌을 이렇게 전해준다.

   
▲ 思想界 시절(1968년 6월 28일). (사진출처: 함석헌기념사업회)

“…그러나 하루 한 끼씩 밖에 잡수시지 않는다는 이 고독해 보이는 노인은 젊은이들과 둘러앉아 일시적이나마 담소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만은 유쾌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함석헌의 그 촌놈스러움은 수년이 흘러도 여전했다. 그의 모양도 그랬지만 그의 글도 그랬다. 장준하와 사상계로부터 동지적 관계를 살아온 이호철(李浩哲)은 함석헌의 글을 이렇게 말했다. 물론 그것은 부정적인 시각으로가 아닌 오히려 경외감에서 한 말이었지만 함석헌의 사상계지에 발표한 글들에 대한 그의 느낌을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그야말로 당시 이 나라 지성의 전당이라고 하여 크게 어긋남이 없는 (사상계의) 필진이라 하겠는데…함석헌의 글은…사상계와는 동떨어진 ‘약간 못난이’ 글처럼 여겨진다. 아니, 못난이 글이라면 어폐가 있고, 가장 고급의 것, 가장 지성적인 것을 지향하던 당시의 소위 지성 풍토에서는, 혼자서만 핫바지 저고리에 난데없이 괭이를 들고 쑤욱 나타난 이단자처럼 여겨진다. 하는 소리도 꽹과리 소리마냥 귀에 설다. 갖은 분칠과 지적 겉치레가 홍수를 이루는 속에서 함 선생 글만은 시골 장돌뱅이 글 같아서 도무지 어색했던 것이다”

문대골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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