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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있다> (3)장준하의 눈, 함석헌을 꿰뚫다!
문대골 | 승인 2015.11.19 16:12

이호철(李浩哲)의 함석헌 논(論)은 계속된다. 이호철이 함석헌을 처음 만난 것은 4.19 직전이었거나 5.16 직후였을 것으로 기억한다. 4.19 직후나 5.16 직전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호철에게 함석헌을 소개한 것은 바로 장준하였는데, 소개받은 곳은 사상계사(社) 였다는 것이고, 그 만난 시점이 4.19 직후나 5.16 직전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장준하가 장면정권 시절엔 단기간이기는 했지만 정부의 요직에 있으면서 사상계사 출근은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호철이 장준하로부터 사상계사에서 함석헌을 소개받은 시점은 4.19직전이었거나 아니면 5.16 직후였거나 당시의 한국사(韓國史)가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고 있던 때였다. 이호철의 기억으로는 5.16 직후 보다는 4.19직전 그러니까 자유당 말기쯤이었던 것으로의 기억이 더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호철은 그때 함석헌과의 대면을 이렇게 전한다.

   
▲ 함석헌.

“그 무렵 사상계사는 지금 화신백화점 맞은편, 이미 건물이 헐렸지만 한청빌딩 3층인가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 막 들어서자, 마침 장 사장과 정면으로 부딪히게 되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남달리 숫기가 적은 편이고 부끄럼을 몹시 타는 성격이어서 이때도 예외 없이, 시원시원하게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잠시 쭈뼛쭈뼛 거렸을 것이다. 그러자 장 사장께서는 먼저 나에게 악수를 청하고, 곧 이어, 「참, 인사하시지 이 형.」 하고는, 바로 뒤에 엉거주춤 서있는 함 선생을 돌아보고 소설 쓰는 아무게라고 귀띔을 하는 것 같았다.

함 선생께서는 별 표정이라고는 없이 손을 내밀어, 나는 공손히 떠받들듯이 두 손으로 잡았다. 그날의 정경은 아직도 선연하거니와, 함 선생의 그 손길의 느낌은 조금 묘했다. 나긋나긋한 느낌과 꺼끌꺼끌한 느낌이 같이 섞여있었고, 화끈할 정도로 따뜻하였다. 흰 수염이 섞여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직 까만 수염이 탐스러우셨고, 양쪽 주머니가 큼직한 홀 조끼에 조금 짧게 느껴지는 광목바지를 받치고 계셨다. 고무신이 분명한데, 흰 고무신이었는지, 검정고무신이었는지 기억이 안난다. … 그때 함 선생과 장 선생이 서 있던 자리까지 선명하게 떠오른다. 꼭 부끄러움을 타는 것만도 아니게 조금 쭈뼛거리는 것 같은, 아니 쭈뼛거린다기보다 아무 말씀 한 마디 없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그냥 가만히 앞에 서 계신 당신의 첫 인상은 도무지 <知性의 전당>을 자처하는 그 무렵의 <사상계>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가 않았다.

농촌의 중늙은이 하나가 한 문중조카라도 만나러 어쩌다가 <사상계>사에 들른 꼭 그런 모습이었다. 당신자신도 이런 <사상계>사에 무시로 드나들고 있는 걸, 꽤나 쑥스럽고 불편하게 느끼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다듬어질 수 없는 사람

필자가 이 이호철의 함석헌 인상기를 독자들에게 실례이리만큼 길게 쓴 것은 나름대로 그저 지나갈 수 없는 이유가 있어서이다. 함석헌에 대한 장준하의 내심을 분명히 말한다면 1956년 초 장준하는 함석헌을 처음 만난 후, 함석헌의 외형을 조금은 다듬고 싶었던 것이다. 입은 바지저고리가 더럽지는 않은데 너무 후줄근한데다 어딘지 모르게 좀 초라하고 불쌍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주 식탁의 자리에 불러낸 것도, 여러 저명한 사회 인사들, 학자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한 것도 지금의 모습을 조금은 손질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호철이 처음 만났다는 1959년은 장준하가 함석헌에겐 그런 소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지만, 또 할 수도 없는 소리였지만, 내심으론 맘 드려 함석헌을 다듬기 시작한지 4년째가 되는 해였다. 그러나 함석헌은 여전히 ‘촌놈’이었다.

56년 7월 18일, <건전한 사회는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의 그 좌담회에서의 옷차림과 한 치 다름이 없는 모습이었으니…. 함석헌은 다듬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미 이때의 함석헌은 저 유명한 ‘할 말이 있다’, ‘할 말이 없다’의 윤형중 신부와의 논쟁으로 알려질 만큼 알려진 때요. 특히 1958년은 한국 신문·출판계를 바닥에서부터 뒤흔들어놓은 그 글로해서 함석헌 자신이 “이 나라가 나를 참선(參禪) (옥살이를 빗대어 한 말, 필자 주)을 시켰다”한 그 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사상계지를 5 만부에 육박하는 세계적인 잡지로 성장하는데 초석을 놓은 정신적 인물로 견고한 자리를 잡은 때였다. 그래도 함석헌은 이제나 그때나 그래도 함석헌 이었다. 다듬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할 말이 있다.

56년 1월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4월 ‘새윤리’ 두 편의 글을 쓴 함석헌은 비교적 조용히 한 해를 보냈다. 밖은 조용했지만 그러나 함석헌의 사람들로 알려진 이들 사이에서는 약간의 미풍이 일고 있었다.

“함 선생님을 모시고 공동생활체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평소 함석헌의 꿈이기도 했다. 1957년이 밝았다. 함석헌은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가슴 속의 하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였다. “우리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외쳤던 마이다스왕의 이발사! 마치 자신이 그 이발사의 화신인 듯 느껴져 온다. 그는 펜을 들었다. 그의 이후 10여년에 걸친 <사상계>의 기고 29회, 3회의 좌담회, 특집 1회의 도합 33회 중 함석헌이 자청하여 사상계에 실었던 단 한건의 원고가 있었다. 그것이 곧 ‘할 말이 있다’, ‘할 말이 없다’라는 글이었다. 사장 장준하로 하여금 “이 글은 <사상계>를 돋보이게 한 글이요, 함 선생님을 우리 사회에서 놀라움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게 한 글이다”라고 토로하게까지 한 글이다.

   
▲ 함석헌과 윤형중 신부.

이 글은 함석헌과 장준하를 더 분명히 말한다면 장준하를 함석헌과 일체화하게 한 글이다. 함석헌과 장준하는 몸가짐에서부터 다른 사람이었다. 이호철을 통해서 함석헌의 촌스러움은 이미 밝혀진 바이고, 장준하는 함석헌과는 전혀 다른 몸가짐의 사람이었다. 그의 경력인 광복군대위 답지 않게 정중한 영국 풍의 신사 타입이었다.

걷는 것 또한 그랬다. 함석헌의 걸음걸이를 사병 걸음걸이라 한다면 장준하의 걸음걸이는 고급장교의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거의 신비라 하리만큼 두 사람에겐 두 가지 쌍태아와 같은 점이 있었다. 그 하나는 민중·민주주의 신념이고, 다른 하나가 ‘옳다’와 ‘아니다’의 분명한 선택이었다. 특히 양심의 추구, 정의를 추구하는데서 그랬다. 이는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함석헌과 장준하의 경우, 이 의(義)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서 다시 찾을 수 없는 ‘사람의 아들’들 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두 사람이 하나같이 어느 때 만이 아닌 자신들의 평생을 민중·민주주의를 위해 바쳐갔다는 데서 하는 말이다.

「할 말이 있다」가 대란으로 번진 사연은 이랬다. 함석헌이 지난해(1956) 쓴 그 글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읽은 가톨릭의 서울지구 문화부장 윤형중(尹亨重) 신부는 그 글을 가톨릭에 대한 도전으로 받았다. 윤형중은 함석헌의 ‘천하에 야비한 그 글’을 좌시할 수 없었다. 윤형중의 직책이 가톨릭의 서울지구 문화부장 이었으니….

당시 문화부장에겐 외부로부터 오는 가톨릭에 대한 비난이나 도전을 응사해야하는 전투적 과제가 부여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가톨릭의 <입>인 셈이었다. 그는 함석헌의 그 글을 읽고, 곧 바로 반격문을 써 사상계 편집국에 보냈지만 다음 달도, 그 다음 달도 실어주질 않는다. 윤형중 신부는 다시 같은 글을 월간 신태양(新太陽)에 보냈고, 신태양은 이를 9월호에 실어 보도했다.

함석헌은 사상계 1월호의 자신의 그 글에 대한 반격문이 신태양이라는 잡지에 실렸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기는 했지만 그 글의 내용은 모르고 있는 터였고, 윤형중 신부의 <신태양>기사는 시중의 말거리도 되지 못한 체 묻혀 버렸다. 1956년도 그렇게 흘렀고…. 그리고 새해 1957년이 밝았다. 이상스럽게도 함석헌은 말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말이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함석헌식으로 하면 그 말은 제 말이 아니었다. 주신 말이요, 처음부터 있는 말이다. 그 처음부터 있는 말이 자신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할 말이 있다’를 내놓는다. 이 글이 “사상계는 마치 함석헌 하나를 내기 위해서”, “함석헌은 사상계를 위해서 있었다” 하리만큼 함석헌은 장준하와 사상계가 일신이 되어 살아온 관계였음에도 사상계에 발표되는 글의 경우 모두가 원고 청탁을 받아쓴 글이었지만 이 글 ‘할 말이 있다’는 함석헌 편에서 함석헌이 직접 원고를 가지고 사상계에 출두(?), 그 게재를 요청해 실려진 글이었다.

‘할 말이 있다!’

이 글이 사상계를 통해(1957. 3월호) 시중에 발표되면서 그야말로 서점가와 독서계에 일대폭풍이 불어 닥친 것이다. 그것이 소위 함석헌과 윤형중의 ‘할 말이 있다’, ‘할 말이 없다’로 알려진 대 논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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