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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사상계> 절필선언(絶筆宣言) 함석헌, 장준하를 하나로 묶다.<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 승인 2016.02.19 11:35

   
 

큰 사람! 장준하를 그렇게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자칫 잘못 했다면 깨어져 버렸을 뻔 했던 함석헌과의 관계를 오히려 그 일로 인해 일체(一體)의 관계로 살려냈다는 데서 하는 말이다. 그것은 ‘종교예술’(宗敎藝術)이란 말로도 미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것이었다. 함석헌이 장준하에게 보낸 ‘<사상계>에의 절필선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미 전회(前回)에서 부분적으로 이야기한 바 있는 내용이지만, 함석헌이 <사상계>에 절필선언을 한 것은 이전 윤희중 신부와의 논쟁을 야기 시킨 바 있는 그의 글 ‘할 말이 있다’에서 장준하가 함석헌과 합의 없이 약간의 부분을 삭제한 바 있었는데, 잡지가 시중에 나간 후, 그 잡지를 받아보고서였다. 함석헌은 그의 사위 최진삼을 통해 지체 없이 한통의 서신을 사상계에 전달했다.

소위 ‘절필선언’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 절필서언 속에는 장준하로서도 정말 견디기 힘든 “에이, 함석헌 선생 더 이상 미련 갖지 말자” 싶으리만큼 자신에 대한 폄하가 담겨있었다. 함석헌 글에서 장준하가 실로 언짢게 생각했던 부분이 함석헌의 장준하에 대한 지독한 오해와 다시 그 오해위에 겹쳐지는 삭제 된 그 글에 대한 함석헌의 항변이었다. 장준하가 그 글을 삭제한 것은 그 글이 원형대로 보도되었을 때 <사상계>가 겪게 될 수난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글 삭제의 이유는 사실 거기 있지 않았다. 전적으로 함석헌의 신변문제 때문이었다. 그 글이 그대로 나간다면 함석헌은 결코 무사할 수 없어서였다.

“6.25 전쟁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승만과 소련, 중공을 배경으로 한 김일성의 싸움이었지 민중이 한 싸움이 아니다. 그러니까 서울을 빼앗겼을 때 저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가 그랬듯이 이승만도 국민은 다 버리고 민중 잡아먹고 토실토실 살이 찐 강아지 같은 벼슬아치들과 여우같은 비서 나부랭이들만 끌고 야밤에 한강을 건너 도망 간 것이다. 밤이 깊도록 서울은 절대 아니 버린다고 공포하고 도망을 쳤으니 국민이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다. 저희끼리만 살겠다고 도망을 한 것이지 정부가 도망간 것 아니다” 이 글이 원문 그대로 보도된다 할 때 함석헌이 온전하겠는가? <사상계>가 온전하겠는가? 양편 모두가 견디기 어려운 탄압을 받게 될 것이나 사실 장준하에겐 <사상계>의 명운보다는 함석헌의 신상문제가 갑절의 무게로 압박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판기사와 “같은 동포를 죽이고 무슨 훈장이냐?”며 “그거 부끄러운 것 아니냐”며 “떼어 내버리라”한 부분을 삭제했던 것인데, 그런데 거기에 대한 함석헌의 항의(?)는 견디기 어려우리만큼 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글은 원고대로 발표되지 못하고 중요한 부분이 잡지사의 손으로 깎임을 당하였다. 그대로 내면 혹시라도 당국의 비위에 거슬려 사(社)로서 손해를 보지 않겠나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리 의논도 없이 그 일을 당한 나는 분하고 슬픔을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이 다 나와 친분이 있으니 어디까지나 나를 믿어서 한 일인 줄 알지만, 일은 사사(私事)가 아니고 공적(公的)인 문제다. 나는 내 사상 인격을 상품화 하여 맘대로 처분하려는 자본주의, 배금주의에 대한 프로테스트를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앞으론 글을 쓰지 않을 것을 사(社)에 통보했다. 모가지를 잘리면 잘리었지, 말을 잘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와 남의 돼지 같은 살점을 아끼기 위하여, 차마 참의 살점, 민중의 혼의 살점을 깎고 싶지는 않았다. 민중이 내게 명하는 것이 ‘있는 대로 바로 말해라’하는 것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순간 가슴이 막혀오는 듯 했다. 함석헌의 말대로 라면 장준하는 사(社)의 운영을 위해 참을, 의를 버린 자가 되는 것이다. 한동안 멍- 한 시간을 보냈다. 사실 함석헌의 그 원고를 읽어낸 또 다른 편집위원들은 “이 원고를 실어서는 안 된다”는 사람. “이 부분은 그대로 실을 수 없다”는 사람, 그러면서 밑줄을 그은 부분만도 대 여섯 곳이나 되었다. 그런 것을 개의치 않고 딱 두 곳을 삭제한 것인데 마치 함석헌은 그의 ‘혼’을 뽑힌 것처럼 불쾌히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감히 장준하를 ‘큰 사람’이라고 일컬은 것은 장준하의 이 함석헌의 절필사건에 대처하는 태도를 주시하고서이다.

장준하가 함석헌에 대해 마지막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선생님은 ‘불의함’을 조준하신 것이다. 나 또한 내 평생을 그렇게 살아 온 것 아닌가?” 함석헌의 그 “모가지를 잘리면 잘렸지”하는 말이 장준하 개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요, ‘불의함’을 향한 것이었다는 스스로의 결론이 내려지면서, 이후 어쩌면 죽기까지 의(義)의 구현을 위한 도상을 함께 가게 될 길동무(?)를 얻은 것 같은 감회에 젖어들게 되었다.
하늘이 주신 일을 함께 수행해 갈 수 있는 하늘로부터의 동역자가 있다!

크게 열린 맘으로 함석헌을 다시 만난 장준하는 새해 함석헌과 함께 했으면 하는 일을 내어 놓는다. 지금 진행 중에 있는 호남지방에서의 <사상계> 주최 전국순회문화강연회에 대해서는 함석헌도 이미 자세한 보고를 받아오고 있었다. 그 열기와 대중의 호응도가 새 역사를 이룰 듯 팽팽하다고 했다.

장준하가 함석헌에게 내놓은 제안이 “이제는 선생님이 대중 앞에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역사의 주체는 민중인데, 다중이 곧 민중이 아니라며 바닥에 있는 대중들도 역사적인 책임을 자각하게 하는 대중운동이 전개되어야한다는 것이었다.
“<사상계>가 그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선생님이 그 자리를 맡으셨으면 합니다.” 함석헌은 평북 용천(龍川) 출신으로 1947년 3월 17일 북을 탈출 월남한 이후 10여 년 동안 ‘말씀 모임’을 이끌어왔다. 소위 내촌(內村)의 모교회로 알려진 모임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역사적 대중을 상대로 말해본 적은 없었다. 본인의 말대로 자신은 정치나 어떤 조직적 운동에 적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역사적인 책임감 때문에 사회적인 발언을 격하게 해가면서도 그는 철저히 구도자적(求道者的)인 삶을 살아오는 이었다. 지금 장준하는 이 절반쯤의 은둔자(隱遁者)를 역사의 현장(現場)으로 불러내려하는 것이다.

   
 

함석헌과 장준하가 함께 그리는 민중의 바다

1960년을 장준하와 함께 민중을 만나기로 맘을 합한 함석헌은 ‘민중’을 찾기 시작했다. 민중을 읽고, 쓰고, 외우기를 수험생들이 하듯 했다. 그가 성도 이름도 없이 그저 ‘선생님’, ‘우리 선생님’이라 하는 유영모로부터 들어 기억하고 있는 ‘씨알’이라는 이름도 다시 새김질 해보고, 민(民)의 기원이며 의미도 기를 써 찾아보기 시작했다. ‘하늘의 사람’으로 살기를 힘써 온 자로서 만나는 모든 자들 역시 하늘의 사람들로 만날 수 있기를 원하면서…….

이제 함석헌, 장준하는 심체일원(心體一元)으로 ‘민주대장정’의 험로를 나선다. 지난해 (1958년)는 지방자치 단체장을 선거제에서 임명제로 지방자치법을 개정, 자유당장기집권의 초석(?)을 놓는가 하면 자유당 정권의 정적으로 급성장하고 있는 진보당을 불법화하고, 그리고 드디어는 <사상계> 사의 ‘전국순회문화강연회’가 개최되는 1959년 8월, 한 달 전 7월 31일 대법원의 변호인단의 사형재심청구를 기각 18시간 만에 그 대표 조봉암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는 때였다. 이 같은 이승만 정권의 민주주의에의 탄압이 장준하로 하여금 또한 그 사상계로 하여금 그 명운(命運)을 그는 민주장정의 대로에로 박차를 가하게 했음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할 것이다. 이후 장준하와 함석헌은 “하늘이 시샘할 만큼의 동지”가 된다.

이후 함석헌과 장준하의 관계는 누가 누구를 위한 선후 혹은 상하의 관계가 전혀 아닌, 이제까지 서로가 상상치 못했던 새 역사, 새 세계의 구현을 위한 거대한 에너지로의 승화를 위한 “섭리(攝理)의 상봉”이 이루어진 것이다.

함석헌의 그 ‘절필선언’을 놓고 오장이 다 상했던(?) 장준하!

“나는 내 사상, 내 인격을 상품화 하여 마음대로 처분하려는 자본주의, 배금주의에 대한 프로테스트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앞으로는 글을 쓰지 않을 것을 사(社)에 통보했다. 모가지를 잘리면 잘렸지 말을 잘리고 싶지는 않았다”라며 바로 그 장준하에 대한 비난(?)을 그 장준하의 잡지에 퍼 붓는 함석헌.

“나는 나와 남의 돼지 같은 살점을 아끼기 위하여, 차마 참의 살점, 민중의 혼의 살점을 깎고 싶지는 않았다. 민중이 내게 명하는 것이 ‘있는 대로 바로 말해라’하는 것이라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종종 이때, 장준하가 함석헌의 절필선언을 통보 받았을 때를 곱씹어 보는 때가 늘 있다. 어쩌면 함석헌은 함석헌대로, 장준하는 장준하대로 제갈 데로 가버렸을 뻔 했던 그때!

장준하! 그는 어쩌면 그 생애에 두 번째의 비극으로 끝나버릴 뻔 했던 그 찰나를 더 할 수 없는 축복으로 살려낸 것이다. 함석헌의 ‘절필선언’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곧 ‘불의함을 향한 것’이라 단언했다니…….

“온몸, 온 혼을 던지며 태워 의를 수호하는 어른, 저항을 생명으로, 살아있는 자의 상(像)으로 믿어 사는 어른…….” 그러면서 함석헌이 자기 속에, 자신이 함석헌 속에 하나 되어 가는듯한 영감(inspiration)에 잠겨가는 것이었다.

함석헌과 장준하의 용해(溶解), 그것은 실로 한국현대사에 더할 수 없는 축복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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