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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장준하의 4.19와 5.16 (1)<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6.02.29 11:55

독재(獨裁)보다 더한 무지(無知)는 없다

이승만 대통령

정치로 세상을 바로 잡겠다는 열심을 가진 정치가라는 것보다 더한 무지는 없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한수 위 무지가 독재라는 것이다. 개인적 살림에서나 공적살림에서나 이는 예외가 아니다. 필자에게는 적어도 이 점에서만은 한 큰 확신이 있다. 정치(政治)에서 치(治)자가 지워지는 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신 말이다. 대통령(大統領)이라는 글자 중 통(統)이라는 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대체적으로 지질학, 고생대학자들은 지구의 출현을 50억년으로 보고 그 지구에 생물이 나타난 것이 30억년, 인류를 향한 진화의 시작을 1500만년으로 본다. 지금의 인류와 비슷하게 생긴 존재가 나타나기 까지는 수없이 많은 진화의 단계가 있었다. 학자들의 진화론은 계속된다. 

500만 년 전 쯤 최초의 원인(原人)이 직립보행(直立步行)을 시작했다는 것이고, 놀랍고도 신비한 것은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인류의 언어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는 아직도 과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거대한 숙제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어>가 집단(集團)을 이루게 했고, 그 집단생활의 질서를 이루게 했고, 구성원들 사이에 더욱 효과적인 협력 체제를 만들기 위한 필수조건이 되어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존(共存)의 원리(原理)’(the principle of the co-existence)가 되어왔다는 것이다. 결국 50억년의 지구사(史), 30억년의 생물사, 1500만년의 인류사의 오메가 포인트가 공존(共存)이었다는 말이다.

지구의, 생물의 인류의 역사만인가? 지구의 역사를 50억년이라 하는 학자들 중 태양(太陽)의 연령을 70억, 700억, 7000억년이 아닌 7조년(七兆年)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다. 허나 그 태양도 역사의 진화에 있어 예외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만이 아닌 뭇 생물이 공존으로 나아가도록 역사한다는 데서 말이다. 그런데 ‘독재(獨裁)’? 독재를 한다? 그거야 말로 우주사, 생물사, 인류사에의 반역이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다. 독재란 인민(人民, 民衆)을 겁 먹이는 정상배의 행위다. 노자가 제혹(制惑)에서 하는 말을 주목해야한다. 

약사민상외사하면(若使民常畏死), 만약 백성들을 늘 겁먹게 하면
이 위기자를(而爲奇者), 이 사특한 놈을
오득집이살지라(吾得執而殺之), 내가 이놈을 잡아 죽인다고 하자
숙감이리요(孰敢), 누가 뭐라 하겠는가?

노자의 말은 계속된다. “백성을, 민중을 탄압하는 정사자(政事者)라는 것들을 꼭 집어내 죽이는 이가 있다”고 상유사살자살이라. (常有司殺者殺)

이승만의 하야, 축출, 종말

이승만은 실로 부끄럽고 불쌍한 사람이었다. 독재자였다는 데서 하는 말이다. 1960년 그가 네 번째 대통령이 되겠다며 자유당의 후보로 출마했을 때의 어느 날, 상당수의 신문기자들에게 둘러싸여 “나를 뽑아 줘야해”하는 사진이 한 신문의 일면에 대서특필이 된 적이 있었다. 정치한다는 것들에게서 겸손을 기대한다는 것은 녹목구어(綠木求魚)라 한다지만 우리는 여기서 독재의 극치를 본다. 

하늘은(역사는) 반드시 죽일 자를 정확하게 골라내 정리한다. 그래서 이승만은 그렇게 간 것이다. 이승만은 한국의 현대사에 아주 분명한 교훈하나를 주고 갔다. 역사는 어떤 경우에도 ‘독재’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 또 하나, 하늘은 민중에게 기어이 그 독재자는 물론 독재 통치를 심판하도록 전권(全權)위임(委任)을 한다는 교훈이 그것이다. 이승만이 망한 것은 4.19때문이 아니었다.

1948년 2월 26일 UN소총회에서 남한만의 총선거를 결의, 5월 10일 최초의 보통선거가 실시되고 이를 계기로 5월 31일엔 제헌국회가 소집된다. 남한의 국호가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7월 17일 최초의 헌법이 공포되는가하면 8월 15일 그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대통령 이승만의 역사로부터 추방은 점진적인 것이었다. 이승만의 비극의 시작은 역사가 이미 자신을 역사의 장(場)으로부터 밀어내기를 시작했음에도 이 같은 사실을 감지조차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 발자국 씩 한 발자국 씩 역사는 다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대통령을 1회로 끝낼 수는 없다. 한번, 한번은 더해야 한다. 그래서 구상한 것(?)이 소위 직선제라는 것이었다. 내각제였던 당시엔 정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도, 이승만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제도 하에서는 대통령을 다시 할 수 없다. 그래서 만든 것이 자유당이라는 사(私)당이었다. 이 속칭 자유당이라는 것은 이승만이 쫓겨날 때까지 이승만의 ‘힘’이 되었고, 결국 이 힘이 자신을 침몰케 했다. 

1951년 11월 28일, 자유당은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내용을 국회에 제출, 다음해인 52년 1월 18일 실시된 표결에서 압도적 표차로 부결되자 정권(?)의 탄압이 시작된다. 그것은 실로 단말마(斷末魔)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50여명이 동승한 의원버스가 헌병대에 불법 강제 연행되고 국제공산당에 관련되었다는 미명아래 10여명의 의원이 체포되는 등, 연일 시중에는 야당을 윽박지르는 시위가 이어졌다. 마차와 우차가 수도 없이 시내를 뒤 흔들었다. 당시 신문은 그것을 마의(馬意), 우의(牛意) 시위라 비웃었다. 다시 소위 ‘발췌 개헌안’이 제출되었다. 역시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였다. 1952년 7월 4일 밤, 그 개헌안을 기어이 통과시켰다. 방법은 기립표결이었다. 이미 야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8월 5일 실시된 선거에서 두 번째 대통령이 된다. 

“나는 종신 대통령 이어야해…….”

3.15 부정선거 개표결과 이승만 대통령 4선 당선,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보도한 기사

민중을 무시하면서 행해지는 정치권력의 범죄행위는 붕괴되기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는 것, 이 ‘발췌 개헌안’이라 불리는 개헌안은 직선제이기는 했지만 ‘그 중임이 1차에 한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제 2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어느 날 우연히 자신도 알 수 없는 ‘악령’에 빠져들게 된다. “나는 죽을 때 까지 대통령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비극이었다. 어느 신학자가 ‘불회기의 법칙 (不回期의法則)을 말했다.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길을 내달린다는 말이다. 역사는 실로 엄혹하다. 죽어야 할 놈을 놓치는 법이 없으니…….

이승만은 이기붕을 불러 “초대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랬다. 그것은 명(命)이었다. 이기붕은 죄의 짐을 지기로 한다. 실제에 있어 공범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공범자의 특성은 공범자가 하나라도 더 해지는 것. 이렇게 해서 1954년 11월 27일, 중임제한 철폐를 담은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죽을 때까지 왕 노릇하자는 탐욕이었다. 개헌안이 표결에 붙여졌다. 표결의 결과는 세계의회사상 유례가 없는 웃음거리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미 역사가 될 수 있는 한 그의 추한 퇴장을 확정하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건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할 것이다. ‘중임 제한철폐’란 더욱 분명히 말하면 그의 <종신제>였다 할 것인데, 투표함을 열어보니 실로 기상천외(奇想天外)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투표의 결과는 이랬다. 제적의원 203명중 1명이 불참, 202명이 투표했는데 찬성 135표, 반대가 60표, 기권이 7표라!

개헌의결 정족수는 3분의 2 이상이었으므로 이승만의 ‘중임제한 철폐’가 통과되려면 136표가 되어야하는데 찬성 135표로 1표가 미달, 당시 국회부의장 최승주(崔承周)는 부결을 선포했다. 중임 제한철폐 개헌안은 그렇게 부결로 끝나는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수(數)계산을 다시 한 것이다. 그 다시 내높은 계산법이 죽을 수(數)였다. 개헌 통과 정족수는 토표자의 3분의 2로 135.33명이었는데 찬성표는 135명이라 부결된 것을 0.33이란 자연인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소수점 이하는 삭제 135명이 옳다면서 제의를 요구, 야당의원들의 전원 퇴장한 사이에 자유당만의 단독결의로 통과시킨 것이다. 이것이 소위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 파동이라는 것이다. 이승만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의회의 정상적인 결의를 뒤집는데 공(?)을 세운 것들은 오히려 으쓱댔지만 역사는 이 반민주모리배(反民主謀利輩)들의 어획(漁獲)에 촘촘한 철 그물을 내려놓고 있었다. 1956년 이승만은 그 종신법으로 세 번째 대통령이 되었고 1960년 다시 네 번째 대통령이 되겠다면서 나섰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불패의 철옹성이었다. 지난 3대 대통령 선거에선 자신을 위협하던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선거운동 도중 급서(急逝)로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민주시민들의 통한을 자아내게 한 바 있었는데 이번엔 역시 민주당의 후보 조병옥 박사가 전 후보 신익희와 꼭 같은 전철을 밟는 비극이 발생하면서 이승만은 아주 싱겁게 제 4대 대통령으로 네 번째 집권에 이른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봐라 이 박사는 하늘이 낸 사람이다. 이 박사에게 대드는 놈은 다 저 꼴 된다”했다. 부통령 장면의 시대도 끝나 이 박사가 지명한 이기붕까지 부통령 당선에 성공 했으니…….

그러나 역사의 뜻은 거기 있지 않았다. 독재자의 처참한 말로를 명증(明證)명시(明視)하기 위해 철저한 반민독재체제(反民)獨裁體制)를 강화하게 한 것이다. 큰놈일수록 넘어질 때, 붕괴될 때의 모습이 처참하지 않던가. 역사는 차근차근 독재자의 죄량(罪量)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현대사는 이 선거를 “3.15부정선거”로 일컫는다. ‘조기선거’, ‘3인조선거’ 혹은 ‘4인조선거’, ‘관권선거’ 등등의 숱한 이름들이 뒤따른다. 이승만 하나를 대통령 만들기 위해 온 국가권력이 동원되었다. 죽을죄의 범행이었다. 그런데 탈이 났다. 선거가 끝난 3월 15일 저녁, 경남 마산에서부터 부정선거 규탄, 민주회복을 외치는 시민시위가 발발하면서 순식간에 거센 불길이 전국각지로 퍼져나간 것이다. 처음엔 정권의 관제시위에 동원되었던 학생들이 정반대로 자발적으로 반정부시위로 바뀐 것이었지만 실종 되었던 김주열군의 시신이 최루탄 파편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그것은 역사의 분노였지만 이승만과 그의 일단들은 이 명명(明明)한 사실에 더 없이 무지했다. 

칼, 총은 그 집에 담겨있을 때, 방아쇠를 잠겨놓았을 때라야 그나마 약간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이승만 집단은 모르고 있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했다. 역사는 반역자를 처단하는데 그렇게도 철저했다. 오직 한길, 망할 길 죽을 길로 내달리게 되었으니……. “칼을 가진 자는 칼에 망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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