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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아렌트의 아모르문디] 세계사랑(정치)을 ‘관조’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민중신학의 사랑법과 한나 아렌트의 아모르 문디> ②
이인미 | 승인 2016.06.30 13:47

정치를 세계사랑(Amor Mundi)으로 풀다 

한나 아렌트

한국어, 아니 한자어로 ‘政治’는, 바르지 않은 자를 쳐서 바르게 만든다는 ‘政’과, 다스리다·바로잡다는 뜻의 ‘治’가 합해져있다. 그래서 정치와 사랑은 얼른 연결되지 않는다. 한편 영어로 ‘정치(politics)’는 그리스의 폴리스(polis)를 그 어원으로 갖고 있어 政治와는 조금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스의 폴리스는 수많은 다양한 의견들을 자유롭게 혹은 시끄럽고 소란스럽게 발표-경청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며, 찬반의 입장을 활발히 개진하며 토론-협의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폴리스의 이미지를 정치와 연결하여 생각해냈다 한들, politics로부터 사랑의 의미를 얼른 포착해내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반면 정치를 윤리(도덕)에 연결하는 경우는 제법 있어왔다. 사실상 아주 많은 예를 들어볼 수 있지만 가깝게 접해볼 수 있는 책으로 사회학자 박영신의 󰡔실천도덕으로서의 정치󰡕를 소개할 수 있겠다. 박영신은 체코 벨벳혁명의 한 주역 바츨라프 하벨의 정치철학과 행보를 다루면서, 정치와 도덕을 연결하여 의미있게 설명하고 있다(관련기사: 중앙일보 2016년 5월 17일자). 동양의 공자·맹자가 펼친 정치학도 윤리에 연결되어 풀이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실 ‘정치윤리(political ethics)’의 면에서 올바른 정치나 정의로운 민주정치를 꿈꾸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나의 정치이론서를 ‘세계사랑’으로 부르고 싶습니다(Arendt 1992: 264).” 그녀의 정치이론 한가운데에는, 단적으로 말해 ‘윤리’가 있다기보다는 ‘사랑’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단, 그냥 사랑 아니고 세계사랑(Amor Mundi)이다. 필 꽂히는 식의 로맨틱한 사랑이 아니며, 준 만큼 받으려는 자본주의식 거래와도 같은 사랑이 아니며, 정치인들이 선거일 즈음하여 떠들어대는 사랑도 아니다.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세계사랑이다. 그리고 아렌트가 지목하여 ‘세계사랑’으로 부르고 싶다던 그 정치이론서는 최종적으로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정치를 세계사랑으로 풀면서, 세계사랑을, 관조(contemplation)가 아니라 행위(action)를 통하여 해내고 지켜낼 수 있는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 나는 그녀의 세계사랑을 행위하는 사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아렌트의 정치이론에서는 행위하는 사람이 주체이다.  

주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공간에서 나타난다 

하마터면(?) 제목이 <세계사랑>이 될 뻔했던 그 책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정치이론이나 정치철학이, 인간들이 그들 스스로를 주체(subject)로서 타인과 구별되며 독특한 인격으로 드러낸다는 것, 그 필연성(inevitability)을 오랜 세월 간과해왔다”고 비판하였다. 심지어 전적으로 물질적·세상적인 ‘대상(object)’에 도달하는 일에 완전히 전념하고 있을 때에조차 주체로 자신을 드러내려 할 정도이니 주체가 인간에게 얼마나 필연적 현상인가, 아렌트는 역설한다(Arendt 1998:183).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의 말과 행위는 “그 내용이 오로지 ‘대상적’인 것, 사물세계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질 때조차도 주체를 계시하는 능력을 지닌다(아렌트 1996: 243).” 

인간은 말과 행위를 사용한다. 인간은, 인간의 조건-“복수성(plurality)” 때문에 말과 행위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복수성은 ‘동등성’과 ‘차이성’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가지는데, 이 두 가지는 맞물려있다. 만일 사람들이 동등하지 않다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과거의 사람들이 어땠는지 이해할 수 없으며 미래의 사람들이 어떨지 예견할 수도 없다. ‘인간끼리’는 동등성이 있어서 우리는 서로를 (심지어 죽은 사람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인간은 동등하기만 한 것 때문에 말과 행위를 사용하는가? 그렇지 않다. 만일 사람들에게 차이가 없다면 사람들은 자기를 이해시키기 위해 말하거나 행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자기나 타인이 똑같다면, 행위(말을 포함함)하지 않아도 서로 자동으로 알 테니까 말이다(Arendt 1998: 175-176). 

위에 쓴 것을, 육하원칙을 따라 요약설명해보겠다. 사람들 사이에 복수성(동등성/차이성)이 있기에(why), 사람들은 자신이(who) ‘주체’라는 진실(what)을 드러낸다. 공적영역에(where) 타인들과 함께 있을 때(when) 행위함(말을 포함함)으로써(how). 이것이 아렌트 행위이론의 핵심이다.     

공적영역에서 행위자와 주시자 

공적영역에서 말과 행위를 사용하여 자신을 주체로 드러내는 사람 즉 행위자는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리고 눈에 띄게 마련이다. 이때 행위자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을 아렌트는 “주시자(spectator)”라 불렀다. 흔히 한국어로 ‘구경꾼, 관중(觀衆)’으로 번역되는 용어인데(이에 관한 한 현재 아렌트연구자들 사이에서 만족스럽다고 공인된 번역용어가 없다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주시자’로 번역하고자 한다. 행위자의 말과 행위를 (이해하든 오해하든) 의식적으로 따라가며 ‘주시(注視: 눈여겨 봄)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물론 구경꾼의 의미는 여전히 간직되어있어야 한다. 주시자는 행위자의 맞은편에 있지만, 객체화·대상화되어있지 않다. 주시자는 행위자의 주체됨에 참여한다. 주체됨의 진실에 주체와 함께 참여한다.  

행위함으로써 주체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나만 잘났다’거나 ‘나만 우월하다’며, 짐짓 ‘뻐기는’ 식으로 위세를 떨쳐서 상대를 무릎꿇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주체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힘(force) 자랑’이 아니다. 주체는 최소한 한 명 이상의 주시자가 자신의 행위를 보거나 듣고 있음을 전제하며, 그들로 인하여 자신의 행위가 성립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나아가 주시자와 함께 행위할 것을 기대한다. 주체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민중신학을 태동케 한 ‘역사적 주체’로서의 민중-전태일이 그야말로 죽기까지 주장하고(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 1983,119), 아렌트가 똑같이 주장한 것처럼, 자기자신을 물리적 객체(물건, 비인간, 기계)로서가 아니라 인간존재로서 주시자들 앞에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한다(Arendt: 1998,176). 

세계는 ‘탁자’ 같은 것 

아렌트의 첫 번째 스승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타자를 직접 대면하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도 인간은 주체로서의 자기자신을 확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마틴 하이데거: 2012,160-169). 그러나, 아렌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이데거의 주체는 혼자서도 주체일 수 있지만, 아렌트의 주체는 혼자서는 형성조차 될 수 없다. 아렌트의 주체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세계에서 ‘행위를 통하여’ 나타나고 확보된다. 보여지고 들려져야만 행위는 비로소 행위이다. 행위를 보고 듣는 이가 아무도 없다면 그것이 행위일까? 주시자가 있어야만 행위가 이룩된다. 행위가 이룩되어야만 주체가 나타나므로 주체는 주시자와 함께 나타난다. 행위자가 주체라는 것, 행위의 바탕(sub-)에 놓인(-ject) 것, 그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주체이고, 행위자 주변에 주시자들이 들어서있는 곳, 그곳이 아렌트가 말하는 ‘세계’이다. 

아렌트의 ‘세계’ 개념은 독특하면서 매력적으로 제시되었다. 일명 ‘탁자의 비유’이다. 아렌트 연구가 사이먼 스위프트(Simon swift)는 이 비유를 기독교적 비유의 품격에 견줄 정도이다(Swift 2009: 14). 아렌트를 신학 쪽에서 연구해 들어가는 나는 스위프트의 말이 적합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아렌트의 표현이다. “세계 속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물들의 세계가 공통으로 그걸 가진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 주변에 둘러앉아있는 사람들 사이에 놓여있는 탁자처럼 말이다. 모든 틈새(in-between)가 그렇듯이, 세계는 사람들을 동시에 연결시키고 분리시킨다(Arendt 1998: 52).” 

아렌트의 세계 개념은, 세계가 자연적으로 주어졌다기보다는 인위적으로 창조된 것이라는 지점을 부각시킨다. 여기서 탁자의 이미지는 사람들을 공동체로 묶는 가능성을 표현한다. 사람들이 탁자 주위에 앉는 활동은 사람들을 묶는 공통된 공간과 사람들을 떨어뜨려놓는 거리를 동시에 창조하는 것이다. 탁자는 사람들을 다닥다닥 붙어있지 않게 함으로써 분리시키지만, 동시에 탁자는 그것 자신을 공간으로 채워서 사람들이 ‘공간을 공유’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Swift 2009: 14). 탁자에 둘러앉을 때 사람들은 탁자를 중심으로 ‘한 덩어리’로 묶일 수 있고, 탁자가 자아내는 공간을 공유할 수 있지만, 동시에 서로 분리되어 서로간의 거리감을 느끼고 ‘누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을 보자. 제자들과 예수가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공통감각(Common Sense)를 공유하는 하나의 공동체이다. 그렇다 하여 물리적으로 그들이 한 몸뚱아리로 연결되어있지는 않다. 그들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러면 그 세계에 대하여 나는 ‘무엇’인가? 내가 그 세계를 관조하거나 연구하고 있는 한, 나는 거기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1세기의 그 공동체에 21세기의 내가 직접 참여할 방법은 전연 없는가? 아니, 있다. 예수는 사랑을 제시한다(요15:9-10, 요일4:7-8). 예수가 말하는 사랑과 아렌트가 말하는 세계사랑은, (이후 이 둘의 관계를 별도로 논의할 것인데) 똑같지는 않지만 서로 견주어볼 만한 유사점을 갖고 있다.   

세계혐오(Contemptus Mundi): 경멸(contemptuous) 혹은 명상(contemplation)   

세계 안에 들어서면 주체는 혼자 관조하거나 명상하지 않고 공적영역에 들어서서 타인들 앞에서, 혹은 타인들과 함께 행위한다. 세계 안에서 사람들은 타인들과 분리되어있지만 동시에 관계되어있다(탁자에 둘러앉은 것처럼). 그런데 그와 같은 세계로부터 스스로 내적망명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때로는 ‘세계소외’로, 때로는 ‘세계혐오(Contemptus Mundi)’로 일컬어질 수 있다.   

아렌트에게 있어 세계사랑의 반대말은 ‘세계혐오’이다. 혐오한다는 뜻을 지닌 contemptus는 공교롭게도 contemplation과 상당히 유사한 형태를 지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형태만이 아니라 의미도 상통한다. 우리는 자연 앞에 홀로 앉거나 서서 고요히 관조할 수 있고, 책상 앞에 홀로 앉아서 (여럿이 둘러앉지 않고) 고요히 관조할 수 있다. 혹은 탁자에 둘러앉은 다른 사람들을 (나는 탁자 곁으로 가지 않은 채 멀리 떨어져서) 조용히 관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렌트에 따르면, 세계사랑은 세계를 관조하는 게 아니라 세계 안으로 뛰어드는 것을 가리킨다. 세계사랑은 관조를 끝내고 세계로 들어설 때 가능하다. 행위는 관조를 끝내고 세계로 들어설 때 시작된다. 정치적 삶은 관조를 끝내고 세계로 들어설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행위·정치적 삶·세계사랑을 관조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아렌트의 정치이론체계에서 볼 때, 착각일 수 있다.    

도움받은글 

Hannah Arendt(1998), The Human Conditio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______________(1992), Lotte Kohler, and Hans Saner, Ed., Robert Kimber and Rita Kimber Trans., Hannah Arendt Karl Jaspers Correspondence 1926-1969 (New York: Harcourt Brace)
Simon Swift(2009), Hannah Arendt (London: Routledge)
마틴 하이데거(2012), 이기상 옮김, 󰡔존재와 시간󰡕(서울: 까치글방) 
박영신(2000), 󰡔실천도덕으로서의 정치: 바츨라프 하벨의 역사참여󰡕(서울: 연세대출판부)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1983),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서울: 돌베개)
중앙일보 5월 17일 (링크) http://news.joins.com/article/20035594
한나 아렌트(1996), 이진우·태정우 함께옮김, 󰡔인간의 조건󰡕(서울: 한길사) 

 

<필자 소개>

글쓴이 이인미는 2016년 2월 성공회대 신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Th.D). 여성단체 <한국여성의전화>와 <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에서 오래도록 활동해왔으며(간사 혹은 자원활동가로), 현재는 1953년 설립된 새가정사에서 제15대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하였고, 공교육·사교육·출판사·신문사·방송사 등 다채로운 분야에서 두루 활동하다 뒤늦게 대학원에 입학하여 비로소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사람의 말(언어), 사람의 행위, 말과 행위를 통한 상호작용에 깊은 학문적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나 아렌트 정치이론과 신학이론의 대화를 계속해서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와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이인미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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