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와 소금: 자기 비움의 영성

티벳불교 스님 세 분이 학교에 오셨다. 며칠 동안 학교 예배당에서 만다라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기하학적 무늬의 만다라는 불교적 우주관, 진리관, 인생관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 주는 상징이다. 이 만다라를 만드는 것은 티벳불교의 중요한 명상 수행 중 하나다.

시간 날 때마다 예배당에 가서 스님들의 만다라 제작 과정을 지켜보았다. 스님들은 붉은 색, 노란 색, 초록색, 파란색, 흰색, 검정색 등 채색모래를 길쭉한 작은 통에 넣고, 그 통을 살살 치거나 긁어서 모래가 조금씩 나오게 했다. 그렇게 새어 나오는 모래를 붓 삼아 큰 탁자 위에 만다라를 그려 갔다. 그들이 집중해서 만다라를 만드는 동작이 경건한 기도처럼 보였다.

그런데 내 마음 한 편에서 작은 불안이 일어났다. 스님들은 깊은 평정 속에 자연스럽게 만다라를 만들어 가는데, 지켜보는 나는 행여나 실수나 사고가 있어 만다라가 망쳐지면 어쩌나 마음이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그것은 만다라에 대한 집착이었다. 그럴 수밖에. 시간이 갈수록 색이 분명해지며 형체가 완성되어가는 만다라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런데 만다라의 완성은 역설적이게도 만다라의 해체다. 스님들이 며칠 혹은 몇 달 동안 혼을 다해 만다라를 만들고 나면, 지혜와 수행이 깊은 스님이 그 만다라를 도르제(금강저, 金剛杵)로 쓱쓱 긁어버린다. 그리고는 손이나 붓으로 모래를 휘저어 하나로 섞어 버린다. 순식간에 만다라의 찬란한 색과 모양이 해체되는 것이다. 이 의식의 의미는 아무리 수고한 행위라 해도, 아무리 화려한 아름다움이라 해도, 아무리 고귀한 진리라 해도, 그 무엇에도 결코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다라의 완성은 해체 과정을 하나 더 거친다. 하나로 섞은 만다라의 모래를 강으로 들고 가 흐르는 물에 부어 넣는 것이다. 만다라의 모래는 큰 복을 입은 것이기에, 그 복을 가깝고 먼 곳의 중생에게 나눠주려는 것이다. 이처럼 만다라 수행은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지혜와 애써 이룬 것을 아낌없이 뭇 생명에게 나눠주는 자비를 배우게 해준다.

스님들은 새벽마다 우리 신학생들과 함께 명상을 했다. 마침내 만다라가 완성되는 마지막 날, 명상 후 아침식사를 하며 스님 한 분과 대화를 나누었다.

“스님, 그동안 수 없이 많은 만다라를 만드시고 또 없애셨잖아요.”
“그렇지요.”
“여러 날 동안 공들여 만든 만다라를 없앨 때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나요?”
“전혀요.”
“그렇게 아름다운데요?”
“없앨 걸 알고 만들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아요. 영원한 것은 없지요.”

<제임스 메모리얼 채플,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원, 2007>

예정대로, 그날 오후, 스님들은 며칠 동안 정성을 다해 만든 만다라를 해체했다. 그 해체의 과정에서 정말 모래 한 알 만큼의 미련이나 주저함도 볼 수 없었다. 모든 색과 형태가 사라진 곳에는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스님들과 우리는 하나의 색, 지혜와 자비의 한 색으로 돌아간 모래를 모든 존재의 행복을 기원하며 강에 뿌렸다.

물속으로 사라지는 모래를 바라보는데 문득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소금’이 떠올랐다.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습니까?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입니다.” (마태복음서 5:13)

만다라의 모래와 복음서의 소금은 근원에서 서로 뜻이 통한다. 둘 다 자신을 해체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완성한다. 자신의 색과 형태를 버리고 세상으로 흘러들어감으로써 자비를 실천하는 만다라의 모래처럼 소금도 하얀 결정체로서의 자신을 녹여 없앰으로써 맛을 내고 부패를 막고 상처를 치료한다. 그러니 예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시는 것은 자기정체성을 버리고 세상으로 녹아들어가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버리고 비우고 변화시켜야만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비움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영적 수행과 사회적 실천의 목표이며 완성이다. 사도 바울은 그런 자기 비움으로 변화된 삶을 감격적으로 고백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a) 나는? 한참 멀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정경일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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