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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주례제자를 위해 망가진 날
이수호 | 승인 2018.01.09 22:54

인연의 질긴 끈이라고나 할까
내가 가르쳤던 중학교 2학년 코흘리개의 딸을
간청에 못 이기는 척 주례를 했다.

결혼 예복으로 단장한 신랑 신부가 참 고왔다.

바깥은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로
바람이 몹시 차갑고 매웠으나
얇은 웨딩드레스 하나로도 신부는
그렇게 화사하고 따뜻했다.

새 부부의 앞길을 밝히는 청홍 촛불을
양가 어머니들이 나란히 붙여주고
신부는 제자인 아빠의 손을 잡고
사뿐사뿐 당당하게 들어서고
내 앞에 마주 선 신랑 신부는
머리를 낮추고 귀한 마음을 드리는
깊은 맞절로 혼인을 서약하고
나는 짧게 하리라 짧게 하리라 다짐하며
몇 마디 주례 잔소리를 하고
축가도 부르고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고
결혼행진을 위해 하객들 앞에 설 때까지
결혼식은 물 흐르듯 잘 흘러가는 듯했다.

그러나 잠깐 사회자가 뭔가 엉뚱한 얘기를 하더니
새 부부에게 만세삼창을 시키는 것이었다.

어설프게 만세삼창이 울려 퍼지고 하객은 낄낄거리고
그 정도는 봐줄만하다 했는데 느닷없이
주례도 만세삼창을 하란다 신부 아빠의 스승을
앗차 이런 난감할 일이 있나 분위기는 묘하게 흐르는데
순간 적절히 망가지는 게 내 역할이구나
얼른 모든 걸 포기하고 나는
오늘 새 출발하는 젊은 부부와 제자를 위해
내 교육운동 노동운동으로 단련된 목소리로
우렁차고 힘차게 만세삼창을 외쳤다.

▲ 제자를 위해 끝까지 망가졌다는 이수호 선생님

이수호  president11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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