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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계(고린도전서 13장1-8절)내 사랑의 대상은 누구인가
이성훈 | 승인 2018.01.28 23:39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들어가는 말

오늘을 사랑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교회에서는 항상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하니까 교회들마다 괜히 사랑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사랑하라고 나와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사랑 이야기를 합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 보면,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도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누가복음 6장에서는 “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초대 교회에서도 사랑을 말합니다. 요한1서 3장 11절에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 준 대로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사랑이 뭐고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문제일 것입니다. 사랑하자고 말은 많이 하고 우리도 사랑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막상 사랑을 하려고 하면 좀 모호하고 애매하기도 합니다. 뭔가 “이렇게 해야겠다.” 하는 명확한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사랑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철학에서 말하는 사랑

우리가 흔히 교회에서 많이 이야기하는 사랑의 세 종류가 있습니다.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이 세가지입니다. 단어 자체가 그리스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단어들 모두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이고 그리스 철학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이었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중에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아가페’는 철학 용어라기보다 종교적 용어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보통 교회에서 듣기로 에로스는 육체적 사랑, 필리아는 정신적 사랑, 아가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들어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사실 에로스나 필리아는 그리스 철학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하게 ‘A=B다’ 라고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에로스는 플라톤으로부터 그 의미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것을 향한 갈망, 그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에로스입니다. 단순하게 육체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감,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이상적인 것을 갈망하는 마음이 에로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육체적인 측면으로까지 나아가게 될 뿐입니다.

실제로 플라톤의 향연을 보면 플라톤을 포함한 소크라테스의 제자 집단들이 소크라테스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었는지가 나오는데, 이들은 소크라테스를 최고의 지성, 이상적인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랬기에 그의 지성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고, 그 지성을 갖기 위해서 소크라테스의 육체까지도 얻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지성을 얻기 위해 그와 잠자리를 하고자 했던 제자 집단의 열망을 플라토닉 러브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신적 사랑이 플라토닉 러브가 아니라, 이상적인 것을 취하기 위한, 당시에는 여성은 결코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최고의 지성을 가진 동성 남자를 사랑하고 그 육체를 취하는 일이 플라토닉 러브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사랑이 에로스입니다.

필리아는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개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본래는 군인들 간에 이루어지는 관계 속에서 나온 말인데, 집단 구성원들 간의 관계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챙기는 마음, 단지 나의 욕구를 채우기보다는 관계 속에서 함께 채워지는 사랑이 필리아입니다. 따라서 필리아는 대등한 관계 속에서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가페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을 뜻합니다.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랑이 아니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냥 주는 사랑이 아가페입니다.

교회에서는 이런 사랑의 세 종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이야기할 때면 항상 아가페의 사랑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단지 이 중의 하나만을 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겪는 사랑

우리가 살면서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기도 하고 사랑을 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분명 이 세 가지 사랑을 모두 경험하게 됩니다. 젊은 시절 연애를 할 때는 대부분 에로스의 사랑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어떤 부분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합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어떠한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소유욕이나 집착으로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유욕이나 집착이 나쁜 쪽으로 발전하지 않고 적당하게 있다면 그것은 건강한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욕구를 채워가는 일이기 때문에 에로스를 통해서 무언가를 채워가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시절에 이별을 하게 되면 자신을 채워가던 것을 잃은 허무함, 상실감을 느끼게 됩니다.

연애를 오래 한 사람들이나 결혼을 한 사람들은 에로스의 사랑보다는 필리아의 사랑을 하게 됩니다. 나의 무언가를 채우려는 사랑보다 서로가 주고받으면서 하나의 완성된 무언가를 만들려고 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얘기가, 결혼하면 사랑으로 사는 게 아니라 정으로 산다고 하는데, 이러한 ‘정’을 뜻하는 표현이 필리아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본래의 필리아라는 용어도 사랑이라는 단어로 번역하는 것보다 우정이라는 의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때 느끼는 감정은 채우는 즐거움 보다는 완성시켜가는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서로가 완성된 상태에 대한 이해가 공유되지 못할 때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 서로 싸우게 되고, 또 생각은 같을지라도 서로가 가진 어떤 문제들에 의해서 그 생각대로 완성되어가지 못할 때 연인이나 부부는 싸움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자녀가 생기면 부부라는 집단에 자녀가 생겼기 때문에 필리아의 폭이 더 넓어지게 되고 자녀가 포함된 완성형을 찾아가게 됩니다.

자식을 가진 부모는 자녀를 향한 알 수 없는 사랑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을 아가페라고 말하는데, 이 감정은 뭐라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머니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자식이기 때문에 자신과 일체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하고, 아버지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유전자를 타고 나온 자신의 2세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또 다른 나, 또 다른 자아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식은 분명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이지만 자기 자신과 동일시되어 나 자신에게 쏟는 만큼의 사랑을 쏟게 된다고 합니다. 명확하게 이 감정이 왜 생겨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존재를 마치 자기 자신만큼 아끼고 사랑하는 감정이 이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러한 사랑의 단계를 모두 겪어봤고 겪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단계들을 모두 합쳐서 우리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사랑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사랑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고린도전서 4절부터 7절까지 바울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오래 참음, 친절함, 시기하지 않음, 뽐내지 않음, 교만하지 않음, 무례하지 않음,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음, 성 내지 않음, 원한을 품지 않음, 불의를 기뻐하지 않음, 진리와 함께 기뻐함, 모든 것을 덮어줌, 모든 것을 믿음, 모든 것을 바람, 모든 것을 견딤”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좋은 말은 다 써놓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 사랑은 대부분 필리아와 아가페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집단을 완성시키는 사랑과 상대방을 나 자신으로 여기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께서는 이런 사랑을 하실 수 있으신가요?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과 같은 사랑을 우리 모두가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될 것이고, 성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랑을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지금껏 우리가 교회에서 들어왔던 것과 같이 아낌없이 주는 사랑, 내 자식에게 하는 것과 같은 사랑을 타인에게 해 주기도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사랑에는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에로스의 단계를 지나 필리아로 가고 그것을 넘어 아가페로 가는 것이지, 에로스, 나의 욕구를 채우는 사랑 없이 무조건 아낌없이 주는 사랑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에로스적인 사랑, 나의 욕구를 채우는 사랑부터 시작하는 일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일은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에로스적인 사랑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한정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적으로도 이런 사랑의 단계를 거쳐나갈 수 있겠지만, 제가 여기에서 여러분들께 연애코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연애상담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하게 될 에로스적인 사랑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한정하자는 것입니다. 에로스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일은 어떻게 생각하면 기초적인 신앙생활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주실지 생각하고 그것을 바라며 하나님을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기복신앙이라고 무시하면서 거부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복주시겠다고 했는데, 그 복을 받겠다고 하는 믿음이 왜 문제가 되겠습니까? 다만 그 상태에만 계속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될 것입니다.

연애를 할 때도, 자신만 끊임없이 무엇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연애는 결국 파국을 맞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받으려고만 하는 사랑에 머물러 있다면, 그 상태가 계속 지속된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결국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받고 무언가 채워지고 있다면 거기에서만 머물러 있지 마시고, 이제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완성시켜 나갈 필리아의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던지, 감사헌금을 낸다던지, 십일조를 드린다던지 하는 것이 이 단계라고 생각됩니다. 많은 교역자들이 이것을 거꾸로 이야기하곤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감사해야 복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런데 감사의 제목이 없는데, 어떻게 감사를 먼저 하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신앙의 첫걸음을 걷는 사람들에게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에로스적인 사랑을 통해 내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 있고, 또한 내가 받은 것을 느꼈다면, 그 다음으로 하나님과 교분을 나누게 되고, 내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하려고 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필리아의 사랑입니다.

여기까지 오셨다면 이제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내 모든 것 드릴 수 있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넘어가면 됩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무언가를 해주시지 않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분명 이 단계에 도달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에로적인 사랑을 하면서 하나님께 무작정 받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성도님들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이 사람이 내 가족도 아니고 사실은 거의 남남인데 어떻게 사랑하겠습니까? 물론 많은 성도님들은 이미 필리아의 사랑 단계로 넘어가 계시지만 새로 누군가가 교회에 오셨다면 에로스적인 사랑, 내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사랑부터 시작하셔야 됩니다.

저 사람으로부터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어떤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찾게 됩니다. 이득이 없으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속물로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이고 우리가 무조건 사랑하려고 하면 그로 인해서 받는 스트레스가 더 크기에 나중에는 스스로가 더 힘들어지는데, 어떻게 그냥 필리아, 아가페의 사랑을 하겠습니까? 속물 같아도 그것이 첫 단계이기 때문에 그 즐거움, 그렇게 얻는 것을 생각하시고 그리고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완성시켜가는 필리아의 사랑을 하시고 그것을 넘어서 아가페의 사랑을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성도님들 간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성도님들 사이에서 무엇인가를 얻는 기쁨을 누린다는 점, 에로스의 사랑을 한다는 점은 어떻게 보면 교회를 잘못된 공간으로 만들 위험요소가 있습니다. 때로 카페 같은 곳에서 다른 교회 성도님들 간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는데, 가끔씩 성도님들 상대로 장사를 한다던가, 무언가를 팔고 있는 분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저 분은 장사하러 교회 다니시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성도님들 간의 사랑이 에로스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사랑의 대상을 먼저 하나님으로 삼지 않고, 성도님들로 삼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사람간의 관계이기 때문에 사랑의 단계를 바르게 거쳐 나가고 실천해가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때로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다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를 먼저 거쳤던 분이라면, 특히나 그 사랑이 아가페의 단계에까지 이른 분이라면, 단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연애를 할 때도, 내가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고 느끼면 나 혼자 그 사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꼭 다른 사람에게도 자랑을 하고 뭔가 그 사랑을 알리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푹 빠져 계신 분들은 다른 성도님들을 향해서도 그와 같은 사랑의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까 어렵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부터 키우려고 하시지 마시고,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나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실 때에는, 억지로 “나는 아가페적인 사랑부터 시작 할 거야” 하지 마시고 천천히 ‘나는 어느 단계에 있을까?’를 고민해보시고, 여러분께서 할 수 있는 사랑의 단계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 단계가 결코 우리의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점이 되지 않습니다. 천천히 낮은 단계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해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결국 모든 성도님들이 아가페적인 사랑에까지 이르게 되실 줄 믿고 또한 그렇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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