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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도용 사건'과 가지 않은 길세월 따라 역사 따라 5
박준성 | 승인 2018.03.07 00:05

강의를 하다가 자기 역사쓰기를 하거나 모임에서 돌아가며 소개를 할 때가 있다. 자기 인생에서 환희와 즐거움과 기쁨이 가득한 일,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이 컸던 일 가운데 한 가지씩 그림으로 그려보고 소개하면 어떨까.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일까.

꿈속에서도 생각지 못했고,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여전히 헤맬 것 같은, 내가 20대 전반에 겪은 ‘논문 도용 사건’이 떠오른다. 우연히 발뿌리에 치솟아 해일처럼 내 삶을 휩쓸어 바꾼 내 인생 저 밑바닥의 아리랑 고개였다.

유신의 시대, 부푼 꿈을 안고 대학으로

고3이 되면서 대학과 진로를 놓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학비였기 때문에 사립대학은 대상이 아니었다. 선생님들이 신설학과에 가면 교수되기 쉽다고 새로 생긴 강원대학 국사학과를 권했다. 고등학교 때 내가 좋아하는 과목이 국사와 국어였고 공부를 업으로 삼는 교수라는 직업에 솔깃했다. 1974년, 국사학과에 입학했다. 입학한 뒤 사학과로 이름이 바뀌었고, 졸업한 뒤에는 사범대학 역사교육과가 되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과 함께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11월 21일 유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유신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늘리고 중임제한을 폐지하고,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것이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간접선거로 뽑도록 하였다. 대통령은 임기 3년인 유신정우회(유정회) 국회의원을 추천하고, 국회를 해산할 수 있는 반면,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게 하였다. 대법관도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하였다. 대통령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한 사람이 영구 집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75년 5월 13일에는 대통령 박정희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준 유신헌법을 욕하거나, 바꾸자고 하거나, 없애려고 하는 어떠한 행동도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가 발포되었다. 유신헌법에 대해 비판하는 것 뿐 아니라 마음에 안 들면 모조리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고 잡아 들였다. 긴급조치 9호는 영장 없이 체포해서 1년 이상의 징역을 살리고, 그 사실을 알리면 신문 잡지는 정간 폐간이었다. 누가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는지 조차 모르게 만든 것이 긴급조치 9호였다. 그래서 유신체제에서도 1975년 이후를 ‘긴조 9호 시대’라고 불렀다. 대학 2학년 때였다.

유신시대, 긴급조치 시대 대학을 다니면서 군사독재에 대한 울분을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없었다. 박정희가 만들었다는 ‘나의 조국’을 “5.16쿠테타로 이 땅을 차지하고 72년도 10월 유신 민주를 압살했네”라고 개사하여 부르는 정도에서 나가질 못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보아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 앉았네”하며 대학생활 절반을 술집에서 보낸 것 같다.

술을 많이 마시고 싶으나 술값이 없을 때는 막걸리 공판장인 '도가니집'으로 갔다. 술값이 쌌다. 안주를 따로 시킬 수 없어 소금물에 절인 콩 자반을 기본 안주로 놓고 술을 마셨다. 하루는 옆에서 꽁치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엇다. 중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뒤 애지중지하던 손목시계를 맡기고 꽁치 여섯 마리로 시켜 포식(?)을 한 적도 있다. 4.19 날 본관 앞에 있던 4.19기념탑인 '각의 종'에 머리를 들여 박아 상처를 입기도 했다.

학교 앞 술집에서 오전부터 술을 마시다 취한 채 강의를 듣다 수업 중에 ‘오바이트’를 한 적도 있다. 하필 그나마 들을 만한 서양사 수업이었다. 선생님은 수업을 계속했다. 수업을 마치고는 다른 말 없이 칠판에 ‘坭田鬪狗(니전투구)’라고 큼직하게 써놓고 나갔다.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라는 뜻이니 '개같은 놈들'이라는 욕이었을 것이다.

술이 덜 깼어도 상당히 내공이 깊은 욕이라고 생각했다. 이 밖에도 술에 얽힌 전설 같은 사연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술값은 주로 일년 내내 외상으로 책을 사 보던 단골 서점에서 빌려서 냈다. 밀린 외상 값은 연례행사처럼 장학금을 받으면 다 갚았다. 졸업식 때 꽃다발을 사들고 학교까지 찾아 준 참 고마운 분들이다.

전설 같은 술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지는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대학원에 가서 교수가 되겠다는 목표를 버리지는 않았다. 술마시는 시간이 반이었다면 나머지 절반은 도서관에서 보냈다.

3학년 말부터 학부 졸업 논문을 준비했다. 주제로 잡은 것이 조선시대 왕실재정을 담당하는 내수사(內需司)라는 관청이었다. 내수사를 잡게 된 계기는 단순하고 소박했다. 박정희 독재 권력의 경제 기반은 무엇일까, 청와대의 돈줄은 무엇인가. 그걸 바로 다룰 수 없으니까 에둘러서 조선시대 왕실의 경제를 살펴보려는 것이었다. 비유컨대 이명박 대통령이 300억이 넘는 돈을 기부해서 장학재단을 만들고, 그러고도 몇 십억 재산이 남는다는데, 그 돈을 다 피 땀 흘려 일해서 모은 걸까 하는 궁긍즘 같은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열심히 자료를 모았다. 도서관은 물론 강사로 출강 하던 서울 선생님 댁까지 찾아가 며칠을 묵으며 자료를 베끼기도 했다. 경제사에 관심을 갖게 해준 선생님이었다. 뒤에 문제가 된 지도교수 집에도 수시로 들락거리며 자료를 보았다. 그렇게 쓴 논문을 학과에서 대학생 논문 경시대회에 보냈다. 장려상에 들었다고 큼지막한 벽시계를 상품으로 받았다.

대학원에 가려면 학점이 무조건 좋아야 하는 줄 알았다. 교련 빼고 한 과목 있던 C학점도 재수강을 해서 A학점으로 바꿀 정도로 학점 관리를 했다. 그결과 의도하지 않게 졸업할 때 대학을 전체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에 입학했다. 박정희에 이를 갈던 내가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졸업할 때 일본인 2명 만주인 2명과 함께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우등생을 받았다고 강의 할 때면 부끄러운 내 대학생활과 졸업의 행적이 떠오른다. 드러내놓고 싶지 않으나 뒤에 터진 '논문 사건'과 무관하지 않아 쓰게 된다.

산산조각난 꿈과 새로운 학문의 길

대학원에 입학한 뒤 보충역으로 고향 면사무소에서 ‘방위’로 근무했다. 복무를 마치고 나서 바로 조교를 하라고 해서 서류를 내고 신원조회까지 무사히 마쳤다. 국립대학 조교는 공무원이었다. 조교를 하면서 빠른 시일에 석사 학위를 받으면 바로 교수가 될 수 있는 조건이 다 갖춘어진 셈이다. 198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석사 논문만 있어도 잘 풀리면 대학 전임을 할 수 있을 때였다. 신설학과에 갔던 목표가 달성되고 인생이 술술 잘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호사다마’가 어떻게 말뜻처럼 바로 그 때 딱 맞추어 등장했다.

▲ 1984년 석사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규장각 조교를 하면서 대학과 노동자 민중교육에 참가하던 시절의 필자 ⓒ박준성 제공

방위 근무를 얼마 안 남기고 인사도 할 겸 졸업한 대학에 들렸다. 후배들이 그렇지 않아도 만나보려고 했다면서 복사한 논문 한 편을 내 눈 앞에 내밀었다. 제목과 내용은 분명 내가 쓴 학부 졸업 논문인데 대학학술논문집에 지도교수 이름으로 인쇄가 되어 있었다. 잘 못 쓴 토씨까지 고치지 않고 활자로 찍혀 있다. 후배들은 내가 손으로 쓴 졸업 논문도 복사를 해 가지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잠시 멍청해졌다. 그 이후 사태가 어떻게 꼬여갈지 미리 알았다면 휘청했었을 것 같다.

후배들이 들고 일어났다. 논문을 '탈취' 당하기는 했으나 지도교수를 내가 앞장 서서 물러나라고 외치기가 어려웠다. 상황을 피해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며칠 동안 피가 마를 것 같은 갈등과 고뇌의 시간을 보냈다. 일이 묘하게 꼬여갔다. 다른 교수들은 침묵으로 공범이 되었고, 학장은 자연과학 쪽에서는 제자가 쓴 논문을 교수 이름으로 학술지에 싣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문제 삼지 말라고 협박하였다. 처음에는 배은망덕하다는 소문이 들려오더니 나중에는 교수가 쓴 논문을 오히려 내가 베꼈다는 말까지 흘러나왔다. 내가 앞에 나서서 사실을 사실대로 밝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 즈음 유신반대 민주화 운동을 모색하던 후배들은 논문 탈취 사건의 물꼬를 군사독재 반대 투쟁으로 틀었다. 1979년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전국 대학 가운데 처음으로 강원대학에서 유신반대 시위를 터뜨린 것이다.

그나마 존경했던 서양사 선생님이 “공부를 계속 할 거면 서울로 올라가라”고 호통을 쳤다. 복마전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공부에 매진하라는 뜻으로 들었다. 나 스스로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꿈꾸던 현실이 며칠 사이에 판이하게 산산조각이 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20대 후반 대학교수가 될 번한 가난한 시골 수재의 용꿈은 산산조각 났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대학이 어떤 곳인지, 대학 교수 같은 지식인들의 실상이 어떤지를 온 몸으로 실감했다. 스물네 살 때 일이다. 그 뒤로 대학 교수는 내 인생의 목표에서 멀어졌다. 대신 자리 차지하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될 공부, 눈치보며 손 비비지 않고 살아가야 할 가시 밭길을 열어 주었다.

이따금 논문 표절 사건이 있을 때, 교수들 뒤에 죽 서서 고개 숙인 채 표절당하지 않았다고 증언하는 예비 학자들을 보면 내 젊음이 생각난다. 불쌍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면서 한심스럽다. 그 개 밥줄을 끊어버려야 제대로 된 학자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살다보면 누구나 실감한다. 세상살이가 잘 풀릴 때도 있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더럽게 꼬일 때도 있다.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고 예상하지도 못했는데 불쑥 튀어나온 모난 돌 하나가 발부리에 채이면서 살아 갈 방향을 휘저어 예정에 없던 엉뚱한 길을 걷게 만들기도 한다. 엇박자가 났다고 생각하는 길이 제대로 살아온 길일 수도 있다. 슬픔은 슬픔으로 위로받듯이 과거의 고통은 현실의 어려움을 버티게 하는 면역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가지 못한 저 쪽 길은 늘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저 길로 갔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 다양한 상상은 가능하나 어찌되었을지는 모른다.

과거의 역사와 미래의 죽음이라는 등대에서 나온 빛으로 가지 않은 길을 비춰본다. 그 길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빛으로 다시 내 삶을 비춰본다. 가지 않은 길은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가늠하는 지금 여기의 거울이 될 수 있다. 누구나 지니고 있는 잘 닦아 비춰보아야 할 거울이다.

박준성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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