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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서남동 목사님과 서남동 선생님의 제자 나 김상근내가 만난 서남동 목사 ⑩
김상근 | 승인 2018.03.11 23:10

1981년 어느 날이었다. 담임하고 있던 목사 실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서남동 목사님께서 들어오신다. 황급히 일어나 선생님을 맞았다. 나를 찾아 오실만한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뜻밖의 방문을 받게 된 것이다. 나는 선생님의 심기가 대단히 편치 않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래 학자의 차가움이 얼굴에 항상 가득하셨지만 평소의 그 차가움과는 사뭇 다른 차가움이었다. 차를 권해 드리면서 어찌 걸음 하셨는지를 여쭈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시고만 계셨다. 심상치 않은 일이 있구나 싶었다.

 

선생님은 소위 ‘김대중내란예비음모사건’이라 이름 붙여진 전두환의 음모에 걸려 중형을 선고 받으셨다가 며칠 전 가석방되어 출감하셨다. ‘김 목사, 내 원수 좀 갚아 줘.’ 의외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중내란예비음모사건이란 전두환 일당이 저들이 말한 ‘5.16광주사태’의 배후로 김대중을 지목하여 조작한 사건이었다. 선생님은 그 내란음모에 함께 했다는 혐의를 쓰게 되었다. 선생님은 체포당해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로 끌려가시게 되었다. 저들은 사건을 짜 맞추었다. 선생님은 공산주의가 내란과 내란으로 세운 정부의 이념이 되게 하는 역할을 배당받았던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공산주의자라 하면 사회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목사가 공산주의자라면 더더구나 그랬다. 선생님은 완강히 거부했다. 고문은 날로 더 포악해졌다. 죽을 힘을 다하여 버티셨다.

피나는 싸움을 하고 있던 선생님 앞에 두어 장 되는 글이 던져졌다. 한 교회 지도자의 자술서였다. 선생님은 그 자술서를 읽으며 전율했다. 절망했다. 그 진술은 서남동은 원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라는 것을 길게 진술하고 있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것은 고문 이상이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내가 공산주의자가 되고, 저들이 이 음모를 공산주의로 포장하여 내는 데 동원 당하느니 차라리 자살하자! 선생님은 비장한 결심을 아니 할 수 없으셨다. 그러나 안기부 지하 수사실에서 자해나 자살 할 아무런 수단을 찾을 수 없으셨다. “나 하나님께 기도드렸어. 하나님,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어찌 이런 비극을 그냥 두십니까? 거기서 나는 그리 기도하는 것밖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

그랬었는데 나오게 되셨다는 것이었다. 칩거하며 생각하셨다. 기도하며 생각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개인문제가 아니었다. ‘교회’문제다. 한국교회가 이리 되어서는 안 된다. 기장교회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김 목사, 교회를 바로 잡아 줘. 기장을 바로 잡아 줘.’ 선생님의 말씀이 딱히 이런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이렇게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날부터 선생님의 두 주문, 원수 갚음과 한국교회 바로 잡음을 놓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나는 1980년 5월 광주참상 직후 열렸던 그해 한국교회교단들의 9월 총회에 분노하고 있던 터였다. 불과 넉 달 전에 자행되었던 신군부의 광주시민학살에 대해 불과 넉 달 만에 열린 한국교회의 총회들에서 예언자의 외침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의를 꾸짖고 정의를 세우려는 몸부림을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 기장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한국기독교장로회부터 쇄신하라는 선생님의 요청을 어떻게 구현해 낼까? 우선 총회장부터 바로 세우자. 박형규 목사님을 총회장으로 세워서 기장교단부터 예언 교단으로 서게 하자. 여러 스승님들과 선배들과 상의했다. 모두 동의했다. 그러나 지난 총회의 부총회장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총회장으로 추대되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던 것이 큰 걸림이었다. 거센 반발이 있었다. ‘쿠데타를 비판하더니 너희는 쿠데타를 자행하려 하느냐?’ 하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박 목사님은 총회장에 피선되셨다.

박 목사님은 기장교단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총회장 임기 1년이 훌쩍 지나갔다. 1년이라는 기간으로는 별 큰 성과를 낼 수 없었다. 이런 이유를 들어 박 목사님은 김상근 나를 4년 임기 총회총무로 미시는 것이었다. 당시는 후보등록제도 같은 것이 없을 때였다. 이심전심으로 지지하는 자를 정해 나갔고, 혹은 비공식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다. 내가 목회하던 수도교회 당회는 총회총무로 나가기 위해 교회를 사임하는 데 절대 반대했다. 박형규 총회장님과 NCC총무 김관석 목사님이 나서셔서 수도교회 장로님들을 설득하셨다.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담임하고 있는 교회가 교회사임을 허락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캠페인 같은 것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스스로 전국을 도시는 것이었다. 총회총대가 거기 있다하면 그게 논 가운데건 어디 산 속이든 달려가시곤 하셨다. 가셔서 김상근이가 총회총무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파하셨다. 그때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조그마한 손가방 하나 드신 단신(單身)이셨다. 그 은덕으로 나는 총회총무에 당선되었다. 이후 나는 은퇴할 때까지 불교의 ‘사판승’(事判僧) 같은 기관목사의 길을 줄곧 걷게 되었지만 하여간 나를 기관목사의 길로 강제하셨던 것이다.

▲ 죽재 서남동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 출범식에서 축하 인사를 전하는 김상근 목사. ⓒ윤병희

 

서남동 목사님과 나, 나는 선생님의 제자다. 선생님은 내게 조직신학, 현대신학을 가르치셨고 나는 배웠다. 선생님은 독일신학독습을 지도하고 강의하셨고 나는 어렵사리 수강했다. 선생님은 그저 선생님이 아니라 직접 가르치셨던 선생님이셨다. 대학원 석사논문을 쓸 때 선생님은 주심이셨다. 나는 그저 넓은 의미로 제자가 아니라 직제자였다. 그런 나에게 ‘김 목사, 내 원수 좀 갚아 줘.’ ‘김 목사, 교회를 바로 잡아 줘. 기장을 바로 잡아 줘.’ 하셨으니 그 말씀을 내가 어찌 허투루 들을 수 있었겠는가. 직제자인 나를 총회총무가 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전국을 누비고 다니셨으니 그 어른의 뜻을 내가 어찌 가벼이 여길 수 있겠는가. 선생님은 나의 생을 강제하셨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기장에는 당시 기관장회의라는 게 있었다. 한신대학 학장과 선교교육원 원장 그리고 총회총무 3자가 회동하는 월례회의였다. 학장은 정대위 선생님이셨으니 두 분 모두 나에게는 직접 스승이셨다. 총회사무처 총무실, 한신대학 학장실, 선교교육원 원장실을 돌아가며 회동장소로 삼았다. 그러나 내 임기 내내 장소를 총회총무실로 못 박았다. 두 분께서 그리 고집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 나이가 40대 초였다. 총회총무가 너무 젊다는 세평을 의식하여 연세 높으신 선생님들께서 극진히(?) 총무로 대우하는 모양을 내 보이시고자 하셨던 것이었으리라. 선생님은 나에게 극진 하셨다.

나는 1984년 선생님의 장례를 정성을 다하여 준비하고 치렀다. 그러나 기념사업회가 조직될 때 참여하지 않았다. 내가 당시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과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직에 함께 하면 또 일을 맡게 될지 모르겠다는 공포가 있었다. 한 해 두 해 지나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그게 선생님을 기리는 일을 외면하는 듯 보이는 것이 또 큰 부담이 되었다. 이 글을 씀으로써 어정쩡한 내 처신을 다잡고자 한다. 그것이 선생님을 향한 나의 진심이기 때문이다.

김상근 목사는 전북 군산 태생으로 군산고등학교와 한신대를 졸업했다. 1970년대부터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이사 및 부이사장, 한국기독교노동자연맹 이사 등을 지냈다.이후 1990년대까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총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실행위원, 부회장, 고문대책위원장, 기독교농민회 이사장, 한국기독학생총연맹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90년대 이후에는 통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KNCC 통일위원회 위원 및 위원장,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협의회 공동대표,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상임의장 등을 지냈다.
언론개혁운동에도 앞장서서 1993년부터 방송바로세우기시민연대 공동대표를, 1998년부터는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그 밖에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 상임공동대표, 5.18진상규명 및 광주항쟁정신계승국민위원회 상임대표 등을 맡기도 했다. 2001년에는 정의구현사제단의 김숭훈 신부, 이돈명 변호사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김상근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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