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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선교훈련원, 사회선교와 교회의 다리가 되기를”감리교회사회선교훈련원 황인근 목사
이정훈 | 승인 2018.03.13 17:59

“사회선교사”. 이름이 주는 의미는 대충 파악이 가능하지만, 속 깊은 뜻을 모르고 살았다. 기자가 이 단어를 듣게 된 지도 얼마되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개신교 교단 여기저기서 이 단어를 둘러싼 소식들이 들어오는 걸 들었지만, 기자 자신도 잘 모르는 개념이라 뭐라 할 말도 없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그런데 감리교 소속 황인근 목사의 SNS에서 “감리교회사회선교세미나"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옳다구나” 하고는 기자의 궁금증도 풀겸 오랜 세월, 얼굴도 잊어버린 채 살아왔던 좋은 친구를 다시 만난다는 생각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약속한 날이 되어 종로5가 기독교회관 1층 카페에서 만난 황인근 목사. 인터뷰를 진행하기에는 너무 소음이 많아 인터뷰가 잘 진행되려나 싶었지만, 이야기가 시작되자 모든 소음은 다 사라지고 둘만 이야기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로 이야기에 깊이 몰입하게 되었다.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모임’(이후, 고난) 이후, 내가 기억하는 건 고난에서 나와서 목회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근황 좀 이야기해달라.”

고난 그만둘 때가 제 아내가 좀 아팠을 때에요. 제 아내도 옛날부터 단체에서 활동가도 했었고, 한국기독교연구소 김준우 선생님과 오랫동안 일도 좀 했었고, 제가 안산에서 목회하면서 고난을 같이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집에 갔는데, 아내 느낌이 좀 이상해요. 실은 아내도 좀 심각했던 거죠, 위기상담 가까이 갈 만큼 그랬던 거니까. 내적으로 힘이 다 소진했던 거죠.

▲ 감리교회사회선교훈련원 책임을 맡고 활동하고 있는 감리교 소속 황인근 목사 ⓒ이정훈

그 당시 전 아침부터 나갔다가 고난 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거의 저녁 8시, 9시, 10시 이랬고, 아내 혼자 둘째 키우는데, 첫 아이가 아토피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고, 심적으로 힘들었죠. 경제적으로 힘들고 하면서 완전히 번아웃(Burnout, 소진)이 되었던 거죠. 그때 제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나한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한테 평화를 못 주면서 무슨 평화 운동을 한다는 건가?’ 되게 심각하게 회의가 들더라고요. 그날 바로 결정을 했어요. 아내가 행복해지고 가족이 평화로워야겠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결정했어요. 바로 그 다음 주에 이사장님 만나고, 얘기해서 마무리하고, 한 일년 정도 아내한테만 매달려 있었어요.

아내와 함께 있다가, 일 년 정도 지났나, 일 년 반 정도 되었나? 그때 진광수 목사님이 고난으로 전임을 하시겠다고 하면서 문수산성교회로 오지 않겠나고 하셔서, 저한테 어떻게 보면 좋은 기회였고, 거기는 또 시골이잖아요. 각박하고 매마른 도시보다 시골에 가서 있는 게 낫겠더라고요. 제 아내도 엄청 좋아하고 좋아졌구요. 그러면서 정태기 선생 밑에서 공부도 좀 하고, 그러면서 아예 대학원까지 다 마치고 했어요.

농촌교회 갔으니까 농목 활동을 했죠. 농목 활동하면서 좋았어요. 내가 여기서 뭘 해야겠구나 하고. 그때 조화순 목사님이 저한테 당부했던 것도 있었고. “목회하기로 했으면 목회 열심히 해라. 운동한다고 맨날 다니지 말고, 이제껏 그러고 있었으면 목회할 때는 목회 열심히 하고, 교인들, 지역 잘 섬겨라” 하셔서. 그 말씀이 와닿았어요. 그래서 처음 한 5년은 서울 거의 안 나왔던 것 같아요. 집회 나갈 일 있어도 동네 집회 나가고.

농사 지으면서 그렇게 있다가, 재작년, 한 2-3년 되었네요. 그 이후로 다시 ‘고난’에서 교육위원장 맡으면서 이렇게 활동하고 있어요. 그때, 지금 하고 있는 사회선교학교를 저희 문수산성교회에서 했거든요. 신학생들과 함께요. 그때부터 고민을 좀 했죠. ‘이게 그냥 2박3일 수련회같이 할 프로그램이 아니구나. 사회선교를 제대로 교육훈련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는 찰나에 조금 시간 지나고 나서 이걸 할 수 있는 의견들이 모아졌어요. 사회선교학교는 고민한지는 2년 넘은 거예요.

“그러면 사회선교학교라는 게 처음에 어떻게 꾸려졌는가.”

감신대 안에 ‘예수더하기’라는 동아리가 하나 생겼어요. 감신대도 시대를 따라가면서 한신도 그랬겠지만, 점점 사회적인, 에큐메니칼적인 정체성을 갖는 동아리들이 사라져갔고, 그러던 찰나에 그나마 몇몇 남았던 친구들이 ‘예수더하기’라는 사회선교 동아리를 자기들끼리 만든 거예요.

“그게 몇 년 쯤인가?”

그게 2015년이죠. 자기들끼리 결성하면서 지금 ‘옥바라지 선교센터’에서 활동하는 이종건이라는 친구를 중심으로 해서, ‘예수더하기’, 그때 학부생이었으니까, 그 친구들이 몇 명 있었어요. 열심히 하는 친구들이 모여서 ‘예수더하기’라고 하는 사회선교 동아리가 만들고 생기게 된 거죠.

그 친구들 중에 고난이나 사회선교단체에 와서 일하던 친구들이었는데, “우리 이렇게 동아리 만들었는데 제대로 교육받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제안이 오히려 들어왔죠. 잘됐다 싶었어요. 늘 사회선교 단체들은 인력수급 때문에 고민을 하긴 하지만, 그때 한창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사회선교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던 찰나에 이 친구들 보면서 ‘아 그래 해보자’ 그래서 커리큘럼 만들고, 2박3일 동안 신학생들과, 주로 그때는 고난이었는데, 고난에서 주로 일하던 일꾼들, 30대 초중반 일꾼들, 그 외 몇몇 주변에 있던 일꾼들 같이 합류하라고 해서 선후배 얼굴도 좀 볼 겸, 신학생들 교육도 할 겸해서 수련회처럼 열게 된 거죠.

“사회선교학교가 열렸던 때가 2015년? 2016년?”

2015년 7월에 한 번 딱 열렸는데, 하고 나서 평가가 분분했죠. 시도는 좋았으나, 생각보다 행사를 위한 행사처럼 된 부분이 있었어요. 처음 할 때는 조화순 목사님 같은 사람들이 발굴되고, 자기 안에서, 그때도 제가 교육위원장이었으니까, 모토가 이건 에큐메니칼 부흥회다, 제 안에 그런 게 있었어요. 에큐메니칼 하면 자꾸 차갑게 느껴지고 열정은 좀 없고 항상 시니컬한 느낌이 있었어요.

그런데 실은 아니거든. 그러니 여기까지 왔는데도 겉으로는 늘 비판적인 것 같은 시니컬한 느낌만 있는데, 그거 아니지 아닌 것 같았어요. 조화순 목사님 같은 뜨거운 가슴들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런 생각을 했던 거죠.

우리가 신앙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그걸 모토로 삼아서 했는데, 생각보다 강연회만 된 거 같더라구요. 그러면서 ‘이건 이렇게 안 해도 되고, 이게 이렇게 한다고 될 것도 아니겠다.’ 싶어서 한 번 하고서 그 다음 연도부터는 생각도 못했죠. 그러다가 2016년도 넘어가면서 진광수 목사님 하고 저하고 몇몇 사람들이 이 사회선교에 대한 고민을 좀 더 해보자 했고 그러면서 몇 번, 몇몇 의견이 있는 사람, 고난을 중심으로 해서, 처음에는 제가 교육위원장이었으니까, 교수 두 분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한 두 명 정도 더해서 다섯 명이서 한 6개월 동안 사회선교에 대한, 그때만 해도 사회선교학교였는데, 사회선교 어떻게 교육할 건지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한 논의를 계속 했어요.

그러다보니까 고난이 할 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제안을 다시 했죠. 이게 우리 고난이 해 가지고, 자리 만들어서 와라, 그렇게 할 게 아니더라구요. 사실 올 사람들, 고난 일꾼들만 오겠지 하는 생각이 또 들더라구요. 그러지 말고 이게 논의 테이블을 넓게 하자. 그래서 이게 감리교 시국대책위에 올렸어요. 그리고 다행히 시국대책위가 받았어요. 시국대책위 대표회의로 모여서 사업으로 받자, 과업으로 받자 그래서 했고, 그때 TF팀을 꾸려서 저하고 지금 개발원에 있는 이은재라는 친구, 하의정 교수, 이영균 교수 등 몇몇이 TF처럼 해서 회의 구조를 가졌고, 그러다가 학교와 훈련원에서 조금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학교는 왠지 아직 느낌이, 오히려 예전엔 학교가 더 크고 무거운 개념이어야 하는데, 요즘은 하도 뭐 하면 무슨 학교, 무슨 학교 하니까 학교가 그냥 간단한 문화센터 같은 느낌으로 가더라고요. 조금 더 오히려 진중한 느낌이 뭐가 있을까? 그리고 더 분명한 커리큘럼을 가지고 교육훈련 할 수 있는 형태를 고민했죠.

그래서 고민하던 중에 감리교에 농촌선교훈련원이 있어요. 제가 농목활동도 하고 하니까. 그걸 밴치마킹 하고 스승 삼았어요. 거울삼아서 이런 모습은 지양하고 이런 모습은 지향하고 해야겠다. 그래서 훈련원으로 가자. 그게 작년, 아니 2016년 말쯤 되었을 것 같아요.

이제 테이블을 더 큰 데로 가져가자. 훈련원으로 할 거면, 프로그램이 아니니까, 프로그램이 아니라 이제 인스티튜트(연구원)가 되는 거죠. 제도를 만들고 싶은 거니까. 그래서 이것을 선교국, 사회선교 정책협의회에 올렸어요. 선교국 안에 8개 위원회가 있어요. 사회선교 관련된. 통일위원회, 정의평화위원회, 양성평등위원회, 에큐메니칼 뭐 이런 곳들이 있어요. 거기에 올렸고, 때마침 2017년 초인가 말인가에 사회선교 정책 세미나, 협의회가 한 번 열렸거든요. 그래서 그때 아예 진광수 목사님 통해서 의제를 사회선교사 제도, 이걸 의제로 올렸어요. 그때 사회선교 훈련원까지는 못 올렸고, 훈련을 통해 사회선교사 제도를 끄집어내자는 얘기가 나와서, 올렸어요.

원래 감리교회가 선교국, 교육국, 그리고 지금 사회평신도국이 있는데, 사회평신도국이 아니라 원래 사회국과 평신도국이 있었어요. 지금 UMC엔 아직도 사회국이 있고, 사회국은 워싱턴에 있어요. 정말 정치에 직접 제안하고, 로비하우스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불러서 어떤 미국사회를 향한 정치적 이슈들에 대해서 제안하는 곳이거든요 사회국이. 백악관도 문을 두드리는 데니까 항상.

근데 현재 사회평신도국은 사회국으로의 기능은 거의 사라졌고, 평신도국, 사회봉사부, 봉사, 평신도봉사부의 역할만 남은 거죠. 그때 사회선교사 제도 및 사회국 다시 복원. 뭐 이런 제안을 하면서 훈련원 이야기를 했고, 이게 전격적으로 받아들여졌어요. 그리고 이제 탄력을 받아서, 아예 제가 발제를 맡아서 사회선교훈련원이란 타이틀을 가지고 제안을 한 거죠. 그리고 그 제안이 위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제2회 사회선교정책 협의회에 의제로 올라갔고요.

거기서 채택이 되었어요. 거기서 제안하기를 아예 실무를 맡겨주시고, 거기서 10인 위원회, 각 위원회의 대표 1명씩을 파송해서주셔서 TF팀을 꾸리게 해주십시오 했던 것이죠.

“요즘 감리교도 그렇고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이미 출발을 했고. 사회선교사 제도, 이런 걸 꾸릴려고 많이 하는데, 감리교에서 생각하는 사회선교라는 개념, 다음에, 사회선교사라는 개념, 이건 어떻게 되는 건가?”

이건 100인 100색 인거 같아요. 서로 사실 달라요 입장이. 처음에 논의할 땐, 구분을 정확히 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왜냐하면 사회복지협의회가 따로 있으니까요. 복지 쪽은 원활히 움직여 지고 있는데, 사회선교는 좀 달랐어요. 하여간 어디까지가 사회선교로 볼꺼냐가 문제였죠.

“말을 끊어 미안한데, 사실 사회선교라는 게 해외 같은 경우는, 독일 같은 경우는, 사회선교랑 사회복지랑 어떻게 할 거냐에 대해서 논쟁이 많았다. 선교라는 개념, 사회라는 개념, 이거랑 복지라는 개념을 어떻게 나누어서 어떻게 자기 정체성으로 갈거냐는 논란이 꽤 되었던 것으로 안다.”

맞아요. 저희도 그런 거 같아요. 그러다보니까 사실은 입심 쎈 사람이 이렇게 얘기하면 그쪽으로 쏠리다가, 또 이 입심 쎈 사람이 하면, 이렇게 왔다갔다 하더라고요. 이게 기준이 명확하지도 않고, 칼로 자르듯이 잘라지지도 않는 개념인거 같아요.

그러니까 대원칙만 세워야겠다, 생각했는데, 대원칙도 애매해지는 거예요. 내부적으로 소셜 저스티스(Social Justice), 사회정의라고 하는 거에 중점을 맞춰서 체제 내에서 움직이는 거 말고, 오히려 체제를 향해서 체제의 변화를 가지고 어떤 입장을 가지고 가는 걸 사회선교로 보고, 체제 내에서 웰페어(Welfare)의 개념을 가지고 가는 걸 복지로 봐야하지 않냐, 이렇게 다들 마음은 심정적으로 하나, 그렇다고 해서 이걸 명문화처럼 해서 딱 하지는 못하겠고, 지금도 계속 얘기는 하고 있어요.

이번에 3월19일에 하는 사회선교세미나에서 또 이야기가 나올 꺼예요. 어디까지 사회선교로 볼꺼냐. 저는 개인적으로 사회정의라고 하는 걸 우리의 기본 고백으로 하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교로서 사회정의라고 하는 이 두 가지 축을 다 같이 가지고 가지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부분이 또 걸렸어요. 도서관이나 아동센터는 복지야? 정의야? 보니까 옛날에 사회선교 처음 하시던 분들이 다 빈민 운동하면서 했던 게 지역아동센터였거든요. 근데 지금은 다 복지로 분류가 되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분들한테 이걸 결정하도록 맡기자고 했죠. 사회선교란 이름으로, 이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시겠다 하면 사회선교로 가야되지 않겠냐는 거죠.

그러니까 나는 크게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가지고 이 사회를 향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대 사회를 향해서 나아가는 그 일에 교회라고 하는 담이 없더라도, 그릇이 없더라도, 갈 수 있으면 다 사회선교로 가야되지 않느냐, 그런데 이 일을 처음 주도하는 사람들은 주로 사회정의와 관련된, 에큐메니칼 운동하던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이 언저리와 그 경계선상에 있는 분들도 원한다면 같이 하면 좋겠다는 거죠.

재미난 것 중 하나는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니까 어떤 분들은 사회복지 쪽에 계신 분들 중엔, 오히려 사회선교란 이름을 가지면 불리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우리 선교 끊겨 그러면” 오히려 이런 분들은 그냥 복지라고 생각하시면 되지 않겠나 싶어요.

그러나 감리교에 ‘늘푸른자립학교’라고 있어요. 여기가 새날을 여는 청소년쉼터에요. 그게 모태고. 서울시에서 위탁을 받아서 옛날에 가출 청소년들, 또는 어려운 청소년들을 보호하는 곳인데, 보호만이 아니라 이 친구들 교육해서 내보낼 수 있게끔 하는 곳인데요, 서울시에서 위탁을 해서, 땅을 주고 모 기업에서 건물을 짓고 해서 되었어요. 근데 여기에는 교회가 들어갈 자리가 사실 거의 없는 거예요. 근데 이 분들은 사회복지로 보기는 하는데, 하지만 관장님은 생각이 명확하세요. 우린 사회선교다. 내가 투신운동을 통해, 옛날에 70년대 말들이 투신운동 출신이니까. 그 운동 통해 이 자리에 왔고 하나님의 선교를 가지고 온 거다. 이분을 인터뷰 했더니 우린 사회선교 할꺼고 내가 적극 들어 갈 거다. 전 그럼 이분도 사회선교 하는 거고. 그분들의 목소리를 남겨 두는 게 낫지 않을까하고 저는 제안을 또 할 꺼예요.

그날그날, 그때그때의 발언자에 따라서 계속 바뀌는 거라면, 이건 명확한 기준은 없다싶어요. 근데 크게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과 사회 정의 개념들, 복음이죠. 복음을 그 그릇에 담아서 가겠다고 하면, 누구든지 들어오면 좋겠다고 하는데, 형님이랑 인터뷰 오기 전에도 회의가 있었는데, 거기서도 어떤 분은 반대하더라고요. 그러면 너무 바운더리가 넓어지고 이게 뭐냐. 저는 선택의 몫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느 정도만 있으면.

“사회선교사를 생각하면 그 운동에 투신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게 기본인데, 교회 여건 상 아니면 교단 여건 상, 교회사역도 해야 하고 사회선교도 해야 된다는 개념들로 보면 사람들이 사실은 굉장히 번아웃 되기 쉬운데, 그런데 그것만 할 수 있도록, 사회선교사만 할 수 있도록, 어떤 제도적인 뒷받침을 하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교회도 하고 이 사회선교사도 하려 건가?”

아니죠. 이 사역만 하는 건데, 교회가 중요한 위치가 있어요. 정확한지 모르겠는데, 영등포사회 선교회 어느 한 목사님 활동비를 어느 교회에서 감당하고 있다고 제가 들었어요. 과천에 있는 어느 통합측 교회가 자기네 교회에서 사회선교사라고 해서 그냥 교회 내에서 일정 정도 감당하면서 평신도 선교사를 파송한 거예요. 그 자리로 가라고.

저는 사회선교사가 꼭 교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사회선교사 제도를 할 때는, 사실 그런 포석을 두고 싶은데, 그러니까 해외선교 할 때는 쉽게 하는데, 사회선교하면 그건 운동이니 성향이니 이런 식으로 색안경을 끼고 보니까 그러지 말고, 훈련원이 바라는 사회선교사는 대 사회를 향해서 나가는 모든 일을 선교로 받아들여줘라. 그 교회가 선교사 파송하듯이 이들을 지원해줘라. 교단은 그걸 제도로 인정해줘라, 하는 말인 거죠.

근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건 아니죠. 이 사람은 사회를 향해 나가서 복음의 일을 하겠고, 그리고 그게 목회가 되고 사역이 되겠고 인정받게 하는 것이죠. 제일 중요한 건 선교사 제도가 문제가 아니고 훈련원은 일하고 있는 과업 단체와 교회, 교단의 딱 중간에서 역할을 해줘야 할 거 같아요. 고난 같은 경우, 고난 이름으로 돈 못 넣는 분들도 많아요. 아직도 무명으로 해주세요. 우리 교회에 이거 들어가면 나 어려워. 이런 경우 많아요. 그때도 저는, 왜 그러하면 색깔들이 분명하니까, 여전히 인식이 바뀌지 않으니까.

사회선교훈련원이 기관화를 꿈꾸고 있는데, 총회 인준 기관으로 가려고 하고 있는데, 이건 다를 것 같아요. 이렇게 공식 기구로 서면 교회도 명분도 더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고. 그리고 교회하고 중간쯤에서 이 사회선교가 갖고 있는 지금 조금은 교회하고 맞지 않는 언어들을 교회의 언어로 바꿔주기도 하고 또 교회를 합류시키기도 하고 해서, 누가 보면 너무 보수적인 입장이 아니야? 하고 말할 수 있는 것까지 포용할 수 있는 훈련원을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듣기로는 이런 사회선교훈련원, 이런 사회선교사 이런 개념이 몇 년 어간에 갑자기 봇물 터지듯이 우르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는 왜 이런 일들이 생긴다고 생각하는가?”

전 이런 생각을 했어요. 사회선교사나 작은 교회 운동, 작은 교회 박람회 이런 거. 제가 개인적으로 평화교회연구소 운영위원장을 맡았는데, 평화교회연구소라고 열심히 하고 있어요. 다 같은 맥락인거 같아요. 이미 지금 있는 교회의 시스템이나 모양은 유통기한이 끝난 거 같아요. 운동을 통해서 얻어낸 것도 아닌 거죠.

개인적으로는 저절로 생명체 같이 유기체 같이 이 생명이 끝나가고 다음 계절이 오는 거 같아요. 그리고 사회선교사 제도는 이 시대가 흐르는 걸 사람들이 학습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회나 문화를 통해서 앞으로 교회가 어떻게 갈지 아는 거 같아요.

제가 이거를 조금 느꼈던 건 2000년대 학번 친구들하고 90년대 학번 후반 친구들 하고 다르더라고요. 2000년대 에큐메니칼 진영에 나온 친구들의 생리가, 90년 대 친구들이 생각하고 있던, 어떤 운동에 투신해야지, 헌신해야 돼 하는 거하고 달라요. 이 친구들은 놀이 같기도 하고, 그냥 생활 같기도 하고, 학습을 하지 않아도 오히려 더 지금 이 시대에 맞는 아젠다(Agenda, 의제)들을 분명히 갖고 있는 거고요. 근데 90년대 친구들까지만 해도 학습하고 해야 했는데, 다르더라고요. 그때 생각했던 게 ‘아! 이게 시대적인 흐름, 하나님의 섭리인가’ 싶었어요.

근데 교회가 무슨 문제가 있냐면, 모닥불 꺼져도, 꺼져도 온기가 있으니까 거기에 불 쬐고 있는 거예요. 불은 꺼졌는데, 근데 이 온기가 너무 좋았던 거라. 7, 80년대 부흥의 불씨가 90년대 2000년대 오면서 꺼져버렸는데, 아직까지도 그걸 생각하고 남아있는 교회들이 있으나, 그러나 이제 이걸 감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시대가 계속 오히려 작은 교회를 바라보고, 작은 교회라는 게 그냥 모양만 작은 교회, 큰 교회가 되지 못한 게 작은 교회가 아닌 거 같아요.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죠.

그러다보니까 이 친구들은 얼마 전에 자비량 목회도 감리교에서 통과했단 말이에요. 이중직을 허용한 거에요. 이중직을 제도로 허용했어요. 누구는 무책임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저는 그것도 교회가 보니까 막 교단이 연구해서 내놓은 게 아닌 거야. 시대가 오는 거에 따라서 ‘아, 이게 이렇게 갈 수밖에 없구나!’ 하는 거를 몸이 알았던 거 같아요. 그리고 그 얘기는 이중직을 하면서조차 이 일을 하겠다는 전혀 다른 선교 패러다임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 해왔다는 거죠.

교회의 사례도 받지 않아도 하는, 자기 일을 하고 싶은 친구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 같고, 사회선교도 그런 거 같아요. 이 사회 속에서 꼭 교회라는 틀이 없어도 하나님의 뜻이 펼쳐질 수 있다는 거를, 예전에 하나님의 선교를 학습하지 않아도, 공부하지 않아도, 이게 내 신앙고백인 걸? 이게 하나님의 일인걸? 이렇게 생각해서 나오는 친구들이 있고, 그걸 바라봤던 전 세대들이 저거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하면서 사회선교사 제도 같은 것들을 다시 찾아낸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이게 정말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일 인거 같아요. 각 교단마다 우리 교단 이 사람들이 만나서 만든 얘기가 아니고 이 교회에서 툭, 저 교회에서 툭 튀어나왔단 말인 거죠.

“근데 사회선교라는 개념이 아까도 말했지만, 7, 80년대 90년대 말까지의 개념이랑 지금도 상당히 다른 거 같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사실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사회선교라고 했을 때는, 이 사회 제도 시스템을 바꾸는 문제였거든. 체제 변혁 운동이었는데, 지금은 안 그렇거든. 사회선교라는 개념을 쓸 때부터, 무슨 차이를 두고 싶을까? 무슨 차이를 두고 싶어서 이러는 걸까? 아니면 세월이 바뀌어서 시대가 바뀌어서 이렇게 흘러가는 속에서 우리가 해야 될 운동들을 그 말에 담고 싶은 건지, 나는 마음에, 머릿속에 와닿지가 않아.”

다른 얘기로 풀어볼께요. 제가 고난 그만 둘 때 마지막으로 했던 게, 평화교회 운동이었어요. 저한테는 묘한 경험 하나가 있는데, 평화교회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게, 고난의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 선전구호)가 “평화로운 세상, 올바른 믿음의 교회”였는데, 그때가 고난이 20주년 할 때였어요. 제가 20주년하면서 그때도 사실 번아웃 되었어요. 왜냐하면 선배들은 척척 선배들 만나서 돈도 받아내고 일도 따오는 거 같은데, 저는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제 주변에 또래 동지들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나이드신 분들은 안 만나줘요. 연배가 안 맞으니까. 어쨌든 20주년 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엄청나게 힘들었어요. 제일 속상했던 건 왜 내 근처에 선배들 같은 두터운 동기층이 없지?

그런데 간단히 들여다보니까, 그 선배들은 시대가 주는 힘이었던 것 같아요. 시대가 민주화로 확 밀어치고, 하면서 그 힘에 딸려서 우르르 모여 있는데, 사실 그 시대가 지난 거예요. 그걸 보면서, “아 그러면 내가 해야 되는 건 교회 운동인가보다.” 그래서 다시 교회 운동은 어떻게 해야 되지? 그런데 그 교회 운동, 고난의 구호가 “평화로운 세상, 올바른 믿음의 교회”였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고난이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서 20년간 일했어요. 근데 올바른 믿음의 교회를 만드는 일을 못했으니까, 그러면 이제 다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꾼들을 양성할 수 있는 올바른 믿음의 교회 운동을 해야겠다 싶어서 말을 하다가 평화교회 운동을 했어요.

그때 때마침 박성룡 선생이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평화교회 제가 제안하면서, 근데 그때 아무런 생각도 없고 그냥 아이디어만 몇 개 떠올라서 얘기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교회의 작동방식 얘기를 하더라고요. 전 교회의 작동방식 생각을 못하고 늘 목표, 목적, 이런 거였는데, 선생님은 “교회의 작동방식이 그리스도의 복음, 평화지.”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참 많이 와닿았어요. 그래서 교회운동을 사회선교처럼 큰 담론의 운동이 아니라 작동방식의 운동으로 해야겠다. 교회가 추구하는 게 평화라면 평화로운 작동방식들, 어떤 평화로운 체제들, 평화로운 모임들, 이런 가치들을 심어야겠다, 하면서 평화교회 운동을 시작, 제안했고, 그래서 학습 모임들 하다가, 저는 거기까지만 하고 나왔죠. 이어서 다른 분이 받았고, 평화교회연구소를 만들었죠.

그쯤에서 조금 지나니까 작은교회박람회가 딱 나오더라고요. 그러면서 아! 이게 누군가 생각해낸 얘기가 아닌가보다. 이게 저절로 시대가 오면서 자꾸만 자극하나보다. 이렇게 생각을 했고, 사회선교도 옛날에 담론들을 잘 담아내는 멋진 이름, 네이밍(Naming, 이름 붙이기)을 한 게 아니라 교회의 작동방식, 교회의 어떤 내용들, 이렇게 말하니까 말하고 나서 좀 이상한데, 어떤 교회의 지향? 같은 말이죠.

(다음에 계속)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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