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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이유(누가복음 24:44-48)고난이 없는 영광은 없다
이성훈 | 승인 2018.03.25 23:28

본 설교는 2월 11일에 게시된 설교문 ‘예루살렘을 바라보며’부터 시작되어 사순절 기간과 부활절에 누가복음의 말씀을 함께 나누며, 누가복음을 기록한 공동체의 신앙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쓴 연작물입니다. 설교문을 읽으시는 성도님들이 개인적인 신앙으로 읽으셔도 좋지만, 교회에서 함께 이런 생각을 나누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쓴 설교문입니다. 하지만 설교문이 주일 저녁에 올라오는 이유로, 일부러 교회력보다 한 주 빨리 게제하고 있습니다. 교회력에 착오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이 이기셨기 때문에 영원히 죽을 우리들도 죽음을 이기고 죽음 이후의 세상,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소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부활절은 기독교의 가장 큰 절기이고 가장 기쁜 절기입니다.

저희는 사순절 기간부터 누가복음의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누가복음을 기록한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부활 사건을 통하여 이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보고 나누려고 합니다.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예수님의 고난

보통 저희가 복음서를 읽어나가면서 어떤 복음서를 읽던지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읽게 됩니다. 그때 저희는 부활에 집중해서 말씀을 읽기 때문에 그 이외의 이야기들은 잘 보지 못하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지난 몇 주간 누가복음을 함께 읽어나가면서, 특히 지난 설교인 ‘십자가 옆의 사람들’의 말씀 속에서 누가복음이 던지고 있는 새로운 질문 한 가지를 보았습니다.

사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 속에 계속해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이 왜 고난을 받으셔야 하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달려있던 한 죄인의 말처럼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저 로마를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면 될 것을 왜 예수님은 그런 일을 행하지 않고 잠자코 당하고 계실까? 비단 누가복음 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서들에도 이런 질문은 나타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이 질문을 더욱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는 초대교회 이래로 수많은 교부들이나 신학자들이 끊임없이 연구해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바울 역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 고민하였고, 자신이 찾아낸 바를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십자가 사건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하나를 택해서 말해보자면, 역전, 반전, 또는 막판 뒤집기입니다.

가장 강했던 로마의 권력 앞에 가장 약한 십자가로 대항하고, 로마가 아닌 그 십자가가 세상을 구원하는 놀라운 사건, 예수님을 처형하는 법관인 로마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에 의해 처형당한 예수님이 승리하는 사건, 그것이 사도바울이 바라본 십자가 고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었기에 우리 역시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사도 바울이 생각한 부활 사건입니다.

약간 다른 관점에서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기에 인간의 고통과 시험을 이해하시고 우리가 시험 당할 때에 힘을 주신다고 말합니다(히2:18). 히브리서가 생각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예수님께서 인간을 좀 더 알게 되셨으며, 그렇기에 인간을 더욱 가까이서 도우실 수 있게 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저희가 알고 있듯이 이사야의 흐름을 따라서 예수님께서 대속 제물이 되셔서 인간의 죄를 모두 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고 죄를 이긴 징표로 부활하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오랫동안 연구되어 왔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고난을 강조한 누가복음

누가복음이 던지고 있는 질문이 단순히 이것 하나라면 그것은 기존의 수많은 연구들과 말씀들을 통해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이 던지는 질문, 예수님께서 왜 고난을 당하셨는가? 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부활 주일에 계속 고난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합니다만, 누가복음은 예수님 부활 이후에도 고난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마태나 마가의 경우 예수님 부활 이후에 천사나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라는 말만을 전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의 경우 부활하신 이후, 24장에서만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언급이 네 차례 등장합니다.

천사가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 할 때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눅24:7).”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아나심만을 말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살아나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옆에 계신 분이 예수님이신지 깨닫지 못한 채, 예수님에게 십자가 사건을 말합니다.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눅24:19-20).”

이 두 제자를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24:25-26).”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열한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눅24:46)” 다른 복음서들은 부활 이후에 예수님의 고난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셨기에 앞선 고난은 이미 의미가 없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끊임없이 고난과 부활을 연결시켜서 말합니다. 고난이 있어야 부활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고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에도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고난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대속 제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라면, 그리고 죄를 이기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면,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면 안 됩니다. 고난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평화의 나라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그런 세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누가복음은 이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우리가 고난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부활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는가?”, 더 나아가서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왜 고난 속에서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입니다.

분명 초대 기독교인들은 로마에 의해서 박해를 받았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던 수많은 선교사들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바른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돈벌이로 삼는 사람들에 비해서 어렵게 살아가며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당합니다. 비단 기독교라는 종교의 영역만이 아니라, 우리들은 예수님에 의해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려움과 고통, 고난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왜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예수님의 답변은 한 가지밖에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을 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눅24:27, 44).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 즉 구약성경, 지금으로 보자면 성경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 안에 대답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약성경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인간이 고난당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서 이 땅이 악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은 고난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씀드리자면 끝도 없을 것이고, 구약성경에 나타난 죄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테지만, 그럼에도 죄가 무엇인지 한 마디로 표현해보면다면, 폭력입니다. 이 땅에 넘쳐나는 폭력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까지도 고통을 당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셨지만, 이 땅에 폭력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인해서 이 땅의 죄의 근원인 폭력이 사라져버리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폭력에 맞서는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고 부활 사건입니다. 로마의 폭력에 맞선 비폭력의 저항, 비폭력만이 평화를 이루는 구원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보면서 깨달은 바이고 지금의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폭력이 차고 넘쳐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이 폭력을 내려놓고 비폭력으로 폭력에 대항해 갈 때, 또 이렇게 폭력을 버리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갈 때에 이 땅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팝송 중에 존 레논의 ‘Imagine’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미국의 히피문화를 표현하는 곡이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가사에 천국과 지옥도 없는 세상, 종교가 사라진 세상을 외치기 때문에 목사가 좋아하면 안 될 노래 같기도 합니다만 사실 이 노래가 추구하고 있는 점은 누가복음이 이야기하며 추구하고 있는 세상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서 전쟁이 없고, 폭력이 없는 세상. 전쟁의 근본 원인이 되는 국가와 종교가 사라지고 평화를 이루는 세상으로의 초대입니다. 종교가 왜 전쟁의 근본 원인이냐고 물으실 수도 있고, 이런 음악은 악마의 음악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우리가 세계사 책을 조금만 읽어도 종교로 인해 발생한 전쟁은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세상의 모든 전쟁은 종교전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전쟁을 반대하며 비폭력을 주장하는 이들이 ‘차라리 종교가 없었더라면 전쟁도 없었겠다.’고 말하는 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바라보고 있는 점이 종교를 없애자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종교가 폭력의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되고, 폭력의 당위성이 되어서도 안되고, 오히려 모든 폭력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이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합니다.

나가는 말

최근 남북대화에서부터 시작하여 북미대화의 물꼬가 트였고, 많은 분들은 이제 평화의 시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십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분들은 북한과의 대화는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북한 빨갱이들은 척결의 대상이지 대화의 대상, 평화를 함께 이루는 대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적인 편 가르기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전 개인적으로 지금 이 시대에 자기 앞마당에서 실제로 전쟁을 일으킬 미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멀리 있는 땅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일은 스스로를 세계 경찰이라고 자처하는 나라에서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전 세계를 상대하는 하나의 나라라고 생각했을 때, 국가의 국방력은 더욱 키워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게 군사력 강화 쪽에 가깝습니다만, 전 한 사람의 개인이면서 또한 기독교인이고 목사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성경의 말씀을 따라야 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가진 무기를 모두 버리자고 한다면,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방력 강화냐 대화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기독교인은 어쩔 수 없이, 대화의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고 성경이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폭력,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폭력 없이 맞선다는 것은 결국 나만 손해보고 나만 고통 받겠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합니다. 한동안 우리나라에 싸드 배치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핵무기를 가져와야 한다고 말하던 사람들의 논리가 그러했습니다. 상대방이 총을 들고 협박을 하는데, 나는 아무 무기 없이 상대방에게 대화하자고 말하면 상대방은 결국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도 똑같이 총을 들고 얘기를 해야지, 그제야 대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손해보고, 고통 받을 것이다. 분명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에 의해 우리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받는 우리를 그냥 두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무조건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손해 보는 우리로 인해, 고통 받는 우리로 인해 구원의 역사가 세상으로 퍼져나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이 전하는 부활 사건입니다.

세상이 주는 고통 속에서, 세상이 주는 아픔 속에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으로 인해서 다시 살아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고통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신다면, 그렇기에 세상과 같이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폭력에도 비폭력으로 맞서나가실 수 있게 된다면, 그곳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역사가 시작될 때에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시게 될 줄 믿고, 그런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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