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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는 도마(요한복음 20:26-29)믿는 척 하지 않는 신앙이 아니라
이성훈 | 승인 2018.04.01 21:23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함께 기뻐하면서 오늘도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제 아내가 미술 전공자이고 고등학교 미술 교사이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미술 작품들을 많이 보게 되고, 미술 공부도 생각보다는 많이 하게 됩니다.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부활절이지만 예수님의 부활,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그 주변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카라바조의 도마

최근에는 유럽의 신고전주의 미술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만, 한동안 그 이전 시대인 바로크 작가들의 그림에 빠져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보았던 작가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입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가 지나가면서 사실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던 작가입니다.

카라바조의 작품 중에는 성화가 많이 있기 때문에 작품을 보시면 한 번쯤 보셨을 작품들도 많습니다. 그 중에서 유명한 작품이 ‘의심하는 도마’라는 작품입니다. 성경의 한 장면을 그려놓은 그림들은 과거로부터 너무도 많았고, 르네상스 시대에도 무수하게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도마에 대한 작품들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과 바로크의 대표주자인 카라바조의 작품은 보는 순간 명확하게 구분이 됩니다.

먼저 르네상스 시대나 그 이전의 그림들을 보면, 예수님과 도마가 거룩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림 속 장면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손에 이끌려서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넣고 있는 도마 혹은 당당하게 서 계신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고 있는 도마가 그려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예수님과 도마 단 둘이 화폭의 중심에 등장하게 되고, 다른 제자들이 함께 그려져 있다하더라도 배경으로만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들도 함께 첨부해드리면 좋겠습니다만, 워낙 그림이 많기 때문에 각자 찾아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 의심하는 도마 ⓒGetty Image

 

그런데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면 이런 구도가 상당히 많이 깨져 있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왜소해 보이는 예수님 주변에 세 명의 남자가 둘러서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넣고 있는데, 이 사람이 도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손으로 도마의 손을 붙들고, 자신의 상처를 만져보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로 예상되는 두 사람이 도마의 뒤에서 도마의 행동과 예수님의 상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미술비평가들 사이에서 카라바조의 이 작품이 대단하다고 평가되는 점은 예수님의 모델로 일용직 노동자를 세워서 사실적인 예수님, 실제로 살아계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려고 노력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도 과거 르네상스 시대에 그려졌던 제자들과 같은 거룩함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주름투성이의 허름한 사람들입니다. 르네상스로 인간중심의 문화가 발전하였고 종교개혁으로 과거 성화의 전통이 깨어졌다고 말하지만, 바로크 시대에도 아직은 성경을 소재로 삼은 그림들, 성화는 여전히 성화였습니다. 거룩한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그 틀을 깨버린 것입니다.

한 예로 카라바조가 그린 ‘성 마태오의 영감’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하늘에는 천사가 마태에게 뭔가를 전해주는 듯이 떠있고, 마태는 의자에 제대로 앉지도 못한 채, 천사의 입을 쳐다보면서 손으로는 뭔가를 적고 있는 그림입니다. 성경 저작에 대한 보수적인 해석이 잔뜩 들어가 있는 그림입니다. 카라바조의 작품 중에서 이 작품만을 알고 계신 분이라면, 카라바조는 전통적인, 혹은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앞서 말씀드린 성화의 전통을 깼다는 이야기에 의아하실 수도 있습니다.

▲ 성 마태의 영감 ⓒGetty Image

그런데 사실 카라바조가 처음 이 작품을 그렸을 때, 마태는 주름투성이에 뭔가 투박해 보이는 사람으로 그렸고, 천사는 마태의 옆에서 손을 이끌어가며 글자 하나하나를 써내려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래의 그림이 카라바조가 초기에 그린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의뢰했던 성당 측에서 마태를 불경스럽게 그렸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았고, 그림을 다시 그리도록 해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성 마태오의 영감’이라는 작품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카라바조라는 작가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였고, 다시 ‘의심하는 도마’ 라는 작품을 보셨으면 합니다. 미술비평가들은 예수님의 모델에 관심을 두었지만, 목회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저는 이 그림의 대단한 점을 다른 포인트에서 찾았습니다. 작품의 주인공인 예수님과 도마가 아닌,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의 표정과 행동이 바로 그 점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다고 말할 때에, 도마 이외의 다른 제자들도 이를 의심했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성경에 도마가 의심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도마만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그림에서 도마는 분명 자신의 의심을 표현하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의 행동이 이상합니다. 그들은 분명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말했는데, 도마가 손을 넣어보는 행동을 자신들도 궁금했다는 눈짓으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성경에 적혀있지 않은 이야기들

하나의 예술 작품이 성경보다 우선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이 주는 영감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 성경이 적고 있지 않은 이야기들을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술가들을 통해 이러한 영감을 우리에게 전해주신다고 믿습니다.

도마의 의심에 대한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는 없고 요한복음에만 단독으로 등장합니다. 요한복음에 이 이야기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요한복음이 기록된 때가 이미 예수님께서 승천하신지 오랜 후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보다는 보지 못한 사람이 훨씬 많은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요한복음은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부활 이야기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23절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문이 닫힌 상황 속에서 제자들 사이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 속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완전히 믿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였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제자 한 사람, 도마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예수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에 손을 넣어보지 않으면 예수님의 부활, 특히 육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8일 후에 예수님께서 또 한 번 문이 닫힌 상황에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는 도마에게 자신의 상처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도마의 이야기를 보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제자,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 도마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인 도마의 뒤편에는 예수님을 이미 만났음에도, 그리고 예수님을 만났다고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의심을 품고 있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하시는 말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라는 말씀은 비단 도마에게만 속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기 전까지 믿지 않았던 여러 제자들, 또한 보고나서도 마음에 의심을 품었던 여러 제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이것입니다. ‘모두가 의심하고 있었다면 그것을 표현한 도마가 잘못된 것인가?’ 라는 점입니다. 저는 반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도마는 오히려 자신의 의심을 드러내놓고 표현하였기에, 믿지 못할 것에 대해서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였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었고 그 육신을 직접 만져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도마가 예수님을 만졌다는 말도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만지지 않았다는 것도 이야기의 흐름상 좀 이상하기는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도마는 복음서의 고백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말해지는 고백,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여기는 고백은 도마가 유일합니다. 또한 이 고백이 삼위일체 신앙의 기초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생각을 더 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라는 말씀도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보지 않고 믿어야만 복되다.’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보고서야 믿은 도마는 복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범하는 가장 큰 실수 중의 하나는 성경에 적혀있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만을 보면서, 이분법적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가 복이 있다.’라고 하면 그것이 아닌 반대는 저주가 내려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적혀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지옥에 간다고 적혀있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지옥에 가게 된다는 말은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지옥이라는 개념을 더 생각해볼 필요는 있겠습니다만, 성경을 글자 그대로 단순하게 읽더라도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은 찾기 어렵습니다. 즉 ‘예수 천국’은 맞지만 ‘불신 지옥’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보고 믿은 자들, 의심하였다가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고 더욱 굳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복이 없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오히려 도마는 자신의 의심을 당당히 드러냈기 때문에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믿음을 가장한 사람들

믿는다고 고백하면 복을 받는다, 보지 않고도 믿는다고 말하면 복이 있다고 하니까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은 당연한 일이라면서 그냥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순수하게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과학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 사회 속에서 과연 우리는 1%의 의심도 하지 않고 예수님을,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의 말씀이 한 글자 한 글자 모두 틀림없이 사실이라고 믿으십니까?

지금 사회에서 보여지는 우스운 일 중에 하나가,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에 있어서 진화론은 잘못되었고 창조론이 맞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물리학에 있어서는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리학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진화론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물리학이 맞는다면, 요한복음에 나타난 바와 같이 닫힌 문 안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불가능합니다. 물리학적으로 증명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그저 ‘예수님이니까, 신이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라는 이유로 물리학의 법칙을 무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1%의 의심도 없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진화론은 믿지 못하면서 물리학은 왜 이토록 열심히 믿는지도 묻고 싶습니다.

이런 과학 시대에 성경의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을 100%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기록하고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행동하시고 말씀하셨을까? 그리고 그 의심을 표현해야 합니다. 믿지 못할 때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해야 합니다.

“남들이 다 믿으니까, 못 믿겠다고 하면 믿음 없는 사람으로 찍혀서 교회에서 입지가 나빠지니까 말 못한다.”고 하지 말고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신학자들이 존재하는 것이고, 성경 말씀을 해석해서 여러분께 전해드리는 목회자가 존재합니다.

믿음을 가장하고 의심하고 있지만 의심하지 않는 척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상한 것은 이상하다고, 믿지 못하겠는 것은 믿지 못하겠다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몸을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응답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무엇을 믿지 못하겠는지, 우리가 무엇에 의심을 품고 있는지, 당신이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실 것입니다.

도마는 자신의 의심을 말하고 8일 후에야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응답을 언제 받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의심을 숨기며 신앙생활을 하시진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이 부활절에 그저 남들이 믿는다고 하니까 나도 믿는다고 말하는 신앙, 믿는다고 말하지 않으면 뒤쳐져 보이니까 믿는 척 하는 신앙, 속으로는 의심하면서 아닌 척 하는 신앙은 버리셨으면 합니다.

오히려 의심을 내뱉으시고 그 의심을 풀고 도마와 같은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을 지키시며 바라보시는 주님께서 분명히 여러분들에게 응답하시어 의심을 모두 걷어주시고 더욱 굳은 믿음의 확신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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