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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로서의 라가츠라가츠의 생애 제1기(1868~1902)
류장현 | 승인 2018.07.05 22:18

라가츠는 1866년 7월 28일 그라우뷔덴의 타민스(Tamins)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가츠는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서 어려서부터 힘 든 일을 해야 했다. 라가츠가 본래 생각에도 없던 신학을 택하게 된 것은 장학금 을 받아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미주 1) 라가츠의 아버지는 마을 공동체 의장을 지낼만큼 정치적 관심이 높은 분이었으며, 그가 성장한 마을은 공동 소유, 협동조합적 생 활과 노동이라는 원초적 사회주의 공동체였다.

“가장 부유한 자의 풀밭에서 가장 가난한 자의 암소가 풀을 먹는다. 이 풀밭, 전답, 채소밭은 세습지로서 모든 가족의 것이다.”(미주 2)

이 원초적 사회주의 공동체에서의 라가츠의 유년 시절의 체험은 그의 정치적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미주 3) 라가츠는 대학생활을 바젤(1886 가을~1888 봄)~예나(1888~1889)~베를린(1889)~그리고 다시 바젤(1889~1890)에서 보냈다. 그의 대학 생활 중 가장 중요했던 시절은 예나와 베를린 시절이다. 예나 시절에 라가츠는 철학 서적을 광범위하게 읽었으며,(미주 4) 교회사 수녀인 니폴트(Nippold)를 통하여 라가츠가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이교도와 종파들 (Sektierern)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고, 신 약성서 신학 교수인 슈미델(Paul Wilhelm Schmiedel)을 통하여 성서비판을 알게  되었다. 라가츠는 이 시절에 루터와 칼빈보다도 앗시스의 프란체스코를 더욱 사랑 했다. 프란체스코는 라가츠에게 “가난한 자들에게 헌신하는 삶”만이 사회적 문제 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고, 또는 라가츠는 프란체스코를 “민중에게 민중종교(Volksreligion)를 설교한 사람”으로 이해했다.(미주 5)

▲ 레온하르트 라가츠 ⓒ위키피디아

베를린 시절에 라가츠는 극단적인 두 가지의 체험을 하였다. 그는 풍요로운 정신적, 문화적 경향들을 즐기면서 때때로 영화감상과 시적 구상에 몰두하기도 했는데,(미주 6) 농부의 아들인 라가츠에게는 베를린의 현대 문화생활은 “낯선”것이었다.(미주 7) 한편, 라가츠는 이런 풍요로운 생활 뒤편에 감추어진 대도시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고, 체험하기도 했다.(미주 8) 이 시절 라가츠는 스퇴거가 참석한 ‘그리스도교-사회주의자 회의’에 참석했으며, 노동자 회의에도 참석하여 자신의 사회적·정치적 관심을 나타냈다. 이러한 그의 일련의 활동들을 통하여, 우리는 라가츠의 사회적·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이미 그의 학창 시절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미주 9)

대학을 졸업한 라가츠는 하이젠베르크의 플레드렌 산지에서 큰 기대를 가지고 목회를 시작했다. 그는 목사 직분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교회의 실천적 문제에도 몰두했다.(미주 10) 그러나 이런 라가츠의 기대는 교회의 냉정한 반응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라가츠는 1892년 5월 쿠르(Chur)에서 ‘성직자의 교회와 민중의 교회’(Pfarrer Kirche und Volks Kirche)라는 주제 강연을 했을 때, 청중들의 무반응 속에서 사람들이 교회의 실천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실 망하였다.(미주 11)

하이젠베르크 시절에 라가츠는 성서를 깊이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철학 연구에 몰두했다.(미주 12) 그 중 헤겔의 역사철학은 그에게 새롭고 넓은 지평을 열어 주었다. 이 헤겔 철학의 영향으로 하이젠베르크 시절부터 바젤 시절 이전까지 (1903년  이전)라가츠의 신학은 다분히 역사철학적 범신론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1892년 8월 25일 립시우스(Richard Adelbert Lipsius)가 죽엇을 때, 라가츠는 개신교 신문(Protestantenblatt)에 추도사를 기고했다. 그는 이 추도사에서 비더만(Alos Emanuel Biedermann)과 립시우스의 신학적 차이를 비교 분석했다.(미주 13) 또 여기서 그는 립시우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면서도 자신은 이 두 가지 신학적 조류를 통합할고 했는데, 우리는 이 추도사에게 라가츠가 전개할 신학사상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라가츠가 초기에 가졌던 목사 직분에 대한 자부심과 목회에 대한 기대는 교회의 냉담함, 동료 목사들의 무관심과 천박성으로 인해 더욱 좌절되었다. 라가츠는 점점 깊은 우울증에 빠졌으며 생명력이 없는 설교는 그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 그래서 라가츠는 교회를 떠나 뷘트너 고등학교의 교사가 되었다.(미주 14)

그러나 라가츠의 교사로서의 “탈출 행각”은 2년만에 끝이 나고 그는 쿠르(Chur)의 시 목사(Stadtpfarrer)가 된다. 이 시절 라가츠 사상의 강조점은 조직신학적 문제에서 윤리적 문제로 바뀌게 되었다.(미주 15) 이것은 라가츠가 체험한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인 생활 때문이었다. 라가츠는 노동자들의 불결한 주거환경, 열악한 노동조건, 가족관계의 파괴, 이들의 범법행위와 알콜중독 등에 큰 충격을 받았다. 여기서 그는 죄의 사회구조적 측면을 발견했고 이것을 죄의 연대성으로 표현했다.(미주 16) 또한 이 시절에 라가츠는 하이젠베르크 시절에 가졌던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들을 심화 발전시키면서, 더욱 사회문제와 사회주의에 몰두했다.(미주 17)

라가츠는 이 쿠르 시절에 신학적·교회적으로 “통속적인 자유주의”와 결별했다. 이같은 라가츠의 사상적 발전은 1)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과 나우만과의 문헌상의 접촉, 2) 헤르만(Wilheln Hermann)의 신학적 영향과 역사적 예수문제에 대한 탐구, 3) 통속적인 자유주의에 대한 강한 환멸, 4) 슈렘프(Schristoph Schrempf)와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에 의해 이루어졌다.(미주 18) 라가츠는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의 주요 서적들을 대부분 탐독했으며 나우만의 ‘도움(Hilfe)’지를 ‘기독교 세계(Chrisrliche welt)’지처럼 정기구독 했다.(미주 19) 또한 슈렘프와 키에르케고르는 라가츠에게 교회비판의 안목을 열어 주었다. 라가츠는 “교회적 그리스도교”(Kircheliche Christentum)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비판에 동조했으며 특히 “신선한 공기”(Bergluft)처럼 작용했던 슈렘프의 사상은 라가츠에게 “가시적 그리스도교”(Scheinchristentum)와 교회의 관습(Konvention)이 얼마나 “커다란 속 임수”인가를 깨닫게 했다.(미주 20)

이 쿠르 시절에 라가츠는 역사적 예수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윤리화된 인간 예수,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만 이해되는 예수 연구에는 관심이 없었다. 라가츠는 부활하심으로써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활동하시는 ‘살아 계신 예수’에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A. 리츨적인 윤리적 예수와 “구역질 나는”레싱(Lessing)의 역사적 예수를 거부했다.(미주 21)

또한 이 시절에 라가츠는 사회적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회운동에 참여하여 학생시절에 가졌던 사회적 관심을 사회 활동으로 본격화 하였다. 1896년 그는 “알콜중독”(Alkoholismus)에 대한 투쟁, 1894년 급진주의자들과 함께 연방 관세 거부 투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라가츠는 1901년 10월 그의 평생의 반려자요 동지인 나딕(Clala Nadig)과 결혼을 하였다. 그는 이 쿠르 시절 말기에 그의 관념적이고 낙관주의적 세계관이 흔들리는 위기에 놓여 있었으며, 그의 역사신학이 산산히 부서지는 아픔을 겪었다. 이런 갈등을 안고 라가츠는 1902년 바젤 대성당의 목사로 취임했다.

미주

(미주 1)  E.부에스/M.마트뮐러, 예언자적 사회주의, s.78.
(미주 2) A.Pfeiffer, ed., Religőse Sozialisten, s.143.
(미주 3) A.Linbt, s.14.
(미주 4) 위의 책, s.17. 스피노자, 헤르만, 슐라이에르마허, 칸트, 특히 헤겔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TB 1889. 2. 11)
(미주 5) 위의 책, s.18. 또는 TB. 1889. 12. 22.
(미주 6) 라가츠는 Zofinger의 중앙신문 (Zentralblatt)에 시를 발표했으나 그것이 편집장 C. A. Bernoulli에 의해서 거부되었을 때 분노하기도 했다.(TB. 1889. 4. 3.참조)
(미주 7) A.Linbt, s.26.
(미주 8) 위의 책, s.20. 또는 TB. 1889. 3. 23.
(미주 9) 위의 책, s.20. 또는 TB. 1889. 3. 23. M. 마트뮐러와 예거(Hans Ülich Jäger)도 라가츠가 이미 학창 시절부터 정치적·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고 보았다.
(미주 10) 위의 책, s.26. 또는 TB. 1892. 1. 17.
(미주 11) 위의 책. s.26.
(미주 12) 위의 책. s.27. 라가츠는 이 시절에 칸트에 회의적이었으며 헤겔 이외에도 피히테, 데카르트, 브루너, 버클레이, 흄, 라이프니쯔, 스피노자 등의 작품을 읽었으며,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를 “정신적 빈곤의 증좌”라고 비판했다.
(미주 13) 위의 책. s. 28.
(미주 14) 위의 책. s. 37. 라가츠는 종교, 역사,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가르쳤다.
(미주 15) 라가츠의 쿠르 시절 주요 강연 내용은 A. Lindt의 위의 책, s.41를 참조하라.
(미주 16) Hans, Ülich Jäger, “von Christus zu Marx-von Marx zu Christus: Leonhard Ragaz und die Religiös-Soziale Bewegung” in : Religöser Sozialismus, Günter Ewald(Hrsg)(Stuttgart: W. Kohlhammer Verlag, 1977), s.43.
(미주 17) 하이젠베르크 시절의 라가츠의 사회주의 이해는 M.Mattmüller, Bd, 1., s.62. 이하를 참조하라.
(미주 18) A.Lindt. ss.31~34.
(미주 19) 라가츠의 영국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의 주요 저서에 대한 독서 목록은 본 논문 2장 1절의 각주 11번을 참조하라.
(미주 20) A. Lindt, s. 39.
(미주 21) 위의 책, s. 38.

류장현  jena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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