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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믿냐고 물으신다면까닭 없이(욥기 1:9-10)
이성훈 | 승인 2018.07.22 22:13

욥기는 우리 성경 순서에 따르면 에스더 뒤에 놓여있고, 시편 앞에 있는데다, 욥이라는 사람의 스토리로 시작되기 때문에 역사서의 하나로 생각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욥기를 차근차근 읽어나가신 분이라면 욥기가 절대 역사서가 아니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9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많이 듣는 욥기의 스토리 부분은 전체 42장 중에서 처음 두 장과 마지막 42장, 이렇게 세 장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 39장은 욥과 친구들의 논쟁,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욥기는 역사서가 아니라 지혜서에 속합니다.

욥의 이야기

그렇다면 욥기는 어떤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을까요? 어떤 학자들은 욥기의 본래 핵심은 3장부터 39장까지의 논쟁에 있으며 앞뒤에 놓여있는 스토리는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첨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욥기의 핵심은 욥과 친구들이 펼치고 있는 논쟁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은 결국 기존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관념인 ‘권선징악’이 하나님에게는 동일하게 적용될 수 없다는 결론을 맺게 됩니다.

ⓒGetty Image

하지만 지금 우리 손에 놓여있는 성경에서 버려도 되는 부분, 간과해도 괜찮은 부분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앞뒤를 감싸고 있는 스토리가 욥기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논쟁의 방향을 이끌어 가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교회에서 욥기의 스토리 부분만을 집중해서 봐왔기 때문에 이미 이런 방식으로 욥기를 읽어왔습니다. 그리고 많이 들어보셨을 해석은 ‘의인이 받는 고난’이었을 것입니다.

욥기는 하나님께서 욥을 의인이라고 말씀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정확하게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입니다. 그런 욥을 사탄이 시험해보자고 하나님께 제안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단순하게 보면 ‘의인이 왜 고난을 받게 되는가?’라는 주제가 적절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욥기의 주제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사탄의 질문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욥기는 바로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사탄이 하나님께 던진 질문입니다. 여기에서 ‘까닭 없이’는 히브리어로 ‘힌남(חנם)’을 씁니다. ‘이유 없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런 의미로 자주 사용된 곳이 시편입니다. 시편에서 ‘원수들이 무고하게 나를 공격한다’고 말할 때, ‘무고하게’가 ‘힌남’입니다(시편 35:7; 69:5; 109:3; 119:161). 우리는 분명 여기에서부터 욥기에 다가가야 합니다.

무고한 욥

먼저 욥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말씀을 진행해나가려고 합니다. 욥기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앞서 말씀드린 하나님께서 욥에게 내리고 계신 평가가 시작부터 미리 나오고 있습니다. 

욥에 대한 설명은 네 가지입니다. 온전한 사람, 정직한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악에서 떠난 사람, 이렇게 네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설명은 두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앞의 두 가지와 뒤의 두 가지입니다.

‘온전하다’는 히브리어로 ‘탐(תם)’인데, 완전하다, 바르다는 뜻입니다. ‘정직하다’는 말 그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는 히브리어 ‘야사르(ישר)’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두 단어도 시편에서 사용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온전’하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판단하시리라고 말하고(시편 7:9; 26:1), 내가 ‘정직’하기 때문에 나를 보호해 달라고 말합니다(시편25:21; 32:11; 33:1; 92:16 등). 이런 성경의 맥락에서 욥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욥이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욥은 무죄이며, 하나님은 욥의 무죄를 선언하시리라는 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의미이며 히브리어 ‘야레(ירא)’를 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그렇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의 ‘악에서 떠났다(사르 메라아 סר מרע)’는 부분과 연결됩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재판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사실 재판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네 가지 항목 모두가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지만, 뒤의 두 부분은 결론에서 또 다른 연결점이 있기 때문에 앞의 두 개와 나누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욥기 1장 1절에서 하고 싶은 말은 욥은 하나님의 벌을 받을, 하나님으로부터 유죄를 선고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8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이 땅에서 나에게 무죄를 선고받을 사람은 욥밖에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사탄은 묻습니다. 욥은 왜 무죄를 받기 위해 살아갑니까? 무슨 까닭으로 그런 삶을 살아갑니까? 지금 우리는 법치주의 국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법을 지키면서 살아갑니다만, 우리 역시도 걸리지 않는다면, 잡히지 않는다면 이라는 생각 속에서 법을 어길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완벽하게 법을 지키면서 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에 우리에게 부과되는 벌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을 받기 때문에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법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체계는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지키고 살아가는 이들, 하나님 앞에서 무죄인 이들에게 상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죄인인 이들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이것이 욥기에 앞서 저희가 읽어왔던 하나님의 법이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그 이야기를 합니다.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10절)” 그래서 사탄은 욥에게서 농산물, 가축, 자녀를 빼앗아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상을 빼앗은 것입니다.

상을 빼앗았음에도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자, 사탄은 또 다른 테스트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사탄이 욥의 건강을 빼앗았다고 생각합니다. 재신을 빼앗았으니 이제는 건강까지 빼앗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탄이 한 것은 건강을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2장 5절에서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욥에게 육신의 고통을 선사해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앞선 맥락으로 바꿔 말하자면, 욥에게 벌을 내려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욥이 벌 받은 상태가 되도록 해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봤을 때, 욥은 하나님의 법 앞에서 무고한 사람입니다. 욥이 무고하게 살아간 이유는 우리가 이미 성경을 통해서 읽어왔듯이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죄를 짓지 않으면 상을 받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죄를 짓지 않으면 벌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제안은 그 법칙을 깨뜨립니다.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상을 빼앗아갔고,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벌을 받게 했습니다. 그리고 벌을 받은 상태에 놓이게 했습니다. 이 상태 속에서 욥과 친구들은 욥이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놓고 다투게 됩니다. 그렇기에 욥에 대한 지금까지 우리가 많이 들어왔던 해석들, 권선징악이라는 구도를 깨기 위함이다라던가, 선한 사람이 고통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식으로 진행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 방식은 욥기의 후반부, 38-4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명확한 설명을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창조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십니다. 앞선 해석을 따르면 창조에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창조에 대한 지혜, 인간인 욥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결론은 사람의 지혜는 하나님을 넘을 수 없다. 혹은 사람의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할 수 없다는 해석을 덧붙이며 끝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욥기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탄은 분명 이야기합니다. 욥이 선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그 이유,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그 이유가 없어진다면, 선하게 살면 벌을 받지 않는다는 법칙이 깨진다면, 욥은 선하게 살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 말을 하나님께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선하게 살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법칙이 깨친다면, 욥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 정직하지 않으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사탄의 말을 들으시고 욥을 시험해보자고 하셨습니다. 욥기의 논쟁부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이유들이 사라지고 벌의 상태, 고통의 상태가 지속되자, 욥은 자신을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더 이상 선한 쪽에 서 있지 않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욥기 38장부터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자체가 기본적으로 지혜를 중시하는 지혜서에 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에 인간이 도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궁금했던 점은 왜 굳이 창조의 이야기인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다른 권위에 대해 말씀하셔도, 무시무시한 심판의 역사를 이야기하셔도 될텐데 왜 굳이 창조인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명확하게 창조 이야기만을 하십니다. 또한 욥의 특징 중에서 뒤의 두 가지는 결론과 연결된다고 말씀드렸는데, 뒤의 두 가지가 창세기의 표현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 일곱 차례 등장하는 문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히브리어로 ‘바이야르 엘로힘’인데, 이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히브리어 ‘비레 엘로힘’과 동일한 자음을 사용합니다(히브리어 첨가에 어려움이 있어서 생략합니다).

전체적인 문구를 봐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바이야르 엘로힘 키 또브’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는 ‘비레 엘로힘 베사르 메라아’입니다. ‘또브(좋음)와 라아(나쁨)’는 우리가 창세기 2장에서 보았던 ‘선악과’를 뜻하는 표현입니다. 욥기는 창세기에 나왔던 표현을 욥에 맞추어서 변형시킵니다. 이는 분명 우리에게 창세기의 말씀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러한 욥기와 창세기의 연결은 저에게 있어서 상당히 오랫동안 고민거리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제 가족, 아내와 9살짜리 아들과 함께 토요일에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TV를 보다가 우연히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만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1편을 봤는데, 엄마가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일하러 떠나가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 소설도 안 읽어봤고, 만화도 너무 오래전에 나왔던 것이라 본 적이 없어서 자세한 내용은 모릅니다만, 결국 주인공이 엄마를 찾아서 아르헨티나까지 가는 내용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1편에서 엄마가 아르헨티나로 떠나갈 때, 주인공이 “엄마 가지마!” 하고 외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냥 궁금해서 아들에게 물어봤습니다. 너는 엄마가 일하러 저렇게 떠나면 살 수 있겠냐고, 그러니까 아들이 엄마가 없으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보통 부모는 이 질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엄마를 물어봤으면 그 다음 질문이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으로, 그럼 아빠가 저렇게 떠나면 어떻겠냐고 물어봤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안된다고 합니다. 저희 집은 아내가 일을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제가 살림 전반을 맡아서 합니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일반적으로 가정주부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일을 합니다.

그래서인지 제 아들은 아빠가 살림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나 봅니다만, 아빠가 없으면 밥, 빨래, 청소 같은 집안일은 누가 할 것이며, 집안 돈 관리는 누가 하며, 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가 없어지면 안 되는 데에는 이유가 없는데, 아빠가 없어지면 안 되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많은 아버지들이 삐치는 포인트이기도 합니다만, 엄마는 그냥 이유 없이 엄마니까 좋고, 아빠는 뭔가 이유가 있어서 좋다는 겁니다.

그때 한동안 고민하고 있었던 욥기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창조 이야기를 하시는가? 욥기는 왜 우리의 시선을 다시금 창세기로 돌리고 있는가? 하나님의 상과 벌에 대한 기준점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왜 다시 창조인가?

욥기의 도입 스토리에서 사탄과 하나님은 사람이 ‘이유 없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욥과 친구들의 논쟁 속에서 이들은 하나님이 ‘이유 없이’ 사람에게 벌을 내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창조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야기는 창세기 1장 27-29절의 확대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 사람의 손에 이 땅을 맡기셨습니다. 이 땅의 동물과 식물, 모든 생명을 맡기셨습니다. 욥기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고, 힘을 주신 수많은 동물들을 어떻게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는가? 베헤못(하마)과 리워야단(악어) 같은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동물에 대해서 네가 아느냐고 물으십니다만, 사실은 이 동물들은 이미 사람들이 잡을 수 있게 된 동물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동물들마저 사람의 손에 붙이신 이가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람의 손에 붙이셔서 사람이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창세가 처음에 본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유’가 나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신 이유는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허락하셨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고 말하지만, 왜 사랑하시는지 ‘이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손에 이 모든 것을 맡기신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입니다.

앞선 제 이야기에 빗대어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이가 엄마를 좋아하듯이, 엄마를 사랑하듯이 사랑하십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가 아빠를 좋아하는데 이유를 찾듯이, 하나님을 따르고 사랑하는데 이유를 붙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벌을 받고 지옥에 가니까, 하나님을 잘 믿어야 천국에 가니까,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이 땅에서 복과 은혜를 누리니까, 이런저런 수많은 이유를 붙인 후에야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따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욥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무 이유 없이, 아무 까닭 없이 너희를 사랑해왔고 지켜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나가는 말

우리는 상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습니까? 벌을 받지 않기 위해 하나님을 믿습니까? 이 땅에서 복을 주시기에 하나님을 섬깁니까? 나중에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하나님을 섬깁니까? 그 모든 이유, 그런 모든 까닭이 없어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가 지금도 이 땅에서 살아가게 하시며, 또한 잘살게 되기를 끊임없이 바라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시고 이유 없이 사랑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까닭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도 아무런 까닭 없이, 아무런 대가 없이 여러분께 충만한 사랑을 내리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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