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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하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아이에게 나타내심(눅 10:21-24)
이성훈 | 승인 2018.08.12 17:41

오늘은 누가복음 10장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하는데, 누가복음이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지, 누가복음을 기록한 교회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특히나 이 말씀 속에서 어린아이를 이야기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난 ‘이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2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1장에도 나타납니다만, 마태복음에서는 21절과 22절의 구절만이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우리가 잘 아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은 분명 감춰진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두 복음서가 말하는 ‘이것’은 조금 맥락이 다릅니다. 결론적으로는 같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은 확실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이야기를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마태복음은 11장에서 시대를 분간하며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마11:20-24). 그렇기에 낮아지려는 마음,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은 기쁠 때 즐거워하고 슬플 때에 슬퍼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마11:16-17).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로 와서 나에게 배우고 나의 멍에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낮아지고, 때를 분간하여 즐거워하고 슬퍼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배우고 예수님의 멍에를 질 때에 우리는 쉼을,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마태복음은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의 ‘이것’

사실 제가 마태복음 11장을 읽을 때에, 딱히 슬기로운 자에게 감춰졌고, 어린 아이에게 나타난 ‘이것’에 집중해서 읽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을 읽어 가다보니 여기에까지 이어졌을 뿐입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린 아이의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이 자신의 의도에 따라 시대를 분간하라는 점에 집중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그럼에도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라는 점을 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누가복음의 말씀 속에도 동일한 의미가 담겨져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누가복음도 어린아이의 마음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무엇을 우리에게 전하려 했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어린아이에게 나타난 ‘이것’이 무엇인지, 누가복음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누가복음 10장의 흐름 속에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Getty Image

누가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서 70명을 세워 파송하시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16절까지의 말씀은 파송의 이야기이고, 17-20절의 말씀은 떠나갔던 70인의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뒤에 바로 이어서 오늘의 본문이 나옵니다. 개역개정 성경의 소제목으로 ‘예수의 감사기도’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제자들을 보시며 기쁨 가운데에서 이 말씀, 이 기도를 하셨습니다. 성경에 ‘성령으로 기뻐하시며’라고 되어있지만, 최근의 헬라어 성경 판본에는 괄호 속에 ‘안에서’라는 단어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저는 ‘성령 안에서’ 기뻐하셨다는 쪽이 맞다고 봅니다.

딱히 기쁘지 않았는데, 성령이 감동을 주어서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너무도 기뻐하셨기에 성령으로 충만해지시고 그 안에서 더욱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성령으로 기뻐하셨다’보다는 ‘성령 안에서 기뻐하셨다’가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 감사 속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사람들이 율법학자들이나 서기관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을 지칭하시는 말씀일 수도 있지만, 지혜가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보는 편이 좋을 듯 합니다.

특정한 계층을 겨냥해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그에 대비되는 사람들은 그 계층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지혜를 가졌다고 말하는 어른들, 성인들을 지칭하신 것이기에 대조적으로 어린 아이를 말씀하십니다.

저희가 교회에서 말씀을 들을 때, 어린 아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미련하다는 의미라고 들어왔습니다만, 미련하다는 의미보다는 아직 지혜가 성숙하지 않았다. 아직 지식을 많이 쌓지 않았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2절에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질 것으로 우상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도 주어는 일반적인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성인은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또 남들에 의해서 지혜롭다고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자기 손으로 신을 만들고 자기가 만든 신을 섬깁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지혜있다는 어른들에게 어리석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성인들은 어린 아이를 보면서 아직 지식이 모자라다, 지혜가 여물지 않았다, 성숙하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어리석은 것은 성인, 어른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24절에서 첨가하십니다.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렇기에 또한 제자들이 ‘보는 것을 보는 눈을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문법 자체가 애매한 말씀입니다만, 간단하게 말해서 ‘이것’을 볼 수 있게 되었음을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인가?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이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답은 나와 있습니다. 22절에 아버지가 누구신지, 아들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번 고개를 끄떡이게 되지만, 다시 한 번 말씀을 읽어보면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이걸로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일,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일은 결국 지식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단지 여기에서 끝난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지식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오히려 지식이 없고, 지식이 없다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지식이 있다”로 끝맺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말장난 같고, 조금은 아쉬운 내용입니다. 또 어떻게 생각하자면 너무 철학적인 이야기인 듯 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 없는 추상적인 신앙만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말씀은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은 그저 추상적인 이야기만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누가복음을 기록한 교회를 과격할 정도의 행동 중심적인 신앙 집단이라고 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는 불의한 재물이라도 쌓아서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고 말 할 정도로 행동 중심적인 이야기를 하는 복음서가 누가복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시선을 조금 돌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서 율법교사의 질문이 나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나옵니다만, 사실은 연결이 상당히 자연스럽습니다.

율법교사는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냐?’는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직전에 예수님께서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숨기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제자들에게만 따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율법교사는 앞의 이야기만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율법교사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감추셨다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그는 이것이 영생에 대한 이야기라고 판단합니다. 즉 저희가 찾아가고 있는 ‘이것’이 ‘영생’이라고 율법교사는 판단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 영생을 어떻게 얻느냐고, 당신이 그 지혜를 얻었다면 우리에게도 이야기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신 이야기가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예전에 드린 적이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돕지 않았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이냐 생명이냐 라는 갈림길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율법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자신을 정결하게 만들기 위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심플하게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가장 본질적인 마음. 생명을 구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 일을 가로막고 있는 어떠한 생각들이 있더라도, 그 생각들을 다 벗어버리고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에서 어긋난 행동이니까, 지금 난 도울 수 있는 돈이 없으니까, 지금 내 힘으로는 도움을 줄 수 없으니까’ 하는 이러한 생각들 다 버리고, 돕는 일이 옳다고 생각한다며 도우라는 말씀입니다.

얼마 전에 미투운동의 반작용이라면서 올라왔던 기사가 있었는데, 지하철역에서 한 젊은 여성이 쓰러지자 남성들은 아무도 그녀를 돕지 않았다는 기사였습니다. 괜히 건드렸다가 성희롱이니 성추행이니 고소당한다고 남성들 누구도 그녀를 돕지도 않고 보고만 있었다는, 그래서 결국 할머니께서 그녀를 도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다음날 가짜 뉴스, 조작된 뉴스였음이 드러났습니다. 한 남학생이 119에 신고를 했고, 구급대원이 올 때까지 자리를 지켰음이 알려졌습니다. 오히려 당시 사진을 촬영하고 있던 여성, 이 내용을 미투의 반작용이라며 남성들을 욕했던 여성이 그러한 입장을 취하면서 도움을 주지는 않고 촬영만 하고 있었음이 드러났습니다.

남성 여성에 대한, 미투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생각이 많아지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행위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남학생은 그녀 옆을 지켰지만, 실제로 많은 남성들은 못 본채 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여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에서 건졌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 옛 선조들의 말을 잘 따르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지 않습니다. 구해봤자 보따리 내놓으라고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생각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뒤이어지는 이야기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접대하는 일, 디아코니아를 위해 분주했고, 원어로 보면 그냥 분주한 게 아니라 바빠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마르다는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동생 마리아에게도 일 좀 하라고 하십시오.’ 자신은 열심히 일하는데 마리아는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으니 일 좀 시켜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개역개정 성경의 각주에 “GNT(The Greek New Testament) 4판에는 ‘몇 가지만 하든지’가 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원문을 조금 더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필요한 것은 한 가지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꼭 마리아처럼 ‘말씀 듣는 일’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만 해라’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디아코니아, 섬김, 봉사를 위해 이것저것 하느라 너는 너무 괴로워하는구나. 하나만 해도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일로 시작했을지라도 그것이 너를 괴롭게 한다면,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만 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나타난 것

사마리아인의 비유나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를 합쳐서 생각해보았을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일, 그 한 가지만 행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일이 정말로 귀하고 중요한 일이라면 다른 생각하지 말고 그 일을 행하라. 남들을 위해 섬기는 일이 중요하지만, 섬김을 위해서 이것저것 하다가 괴로워하지 말고 즐거워할 수 있는 그 일 한 가지만 행하라.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행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던 내용도 상당히 심플합니다. 너희는 가서 평안을 전하고, 그 안부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에 머물며 능력을 행하고, 안부를 받지 않는 사람의 집에는 머물지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떠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려 하지 말고 평안의 인사를 받아준 그 집에서 병자를 고쳐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받아주는 집에만 가라는 말씀입니다. 예전에 무슨 부흥회인지 간증 집회인지에 여신도 분들을 모시고 참석했던 적이 있는데, ‘진돗개 전도법’을 만드신 어떤 전도왕이라는 분의 ‘진돗개 전도법’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한 번 물면 교회 나올 때까지 놔주지 않는다고 해서 ‘진돗개 전도법’이라고 합니다. 곁가지로 교회 나올 때까지 찔러본다는 ‘고구마 전도법’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전도법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간단합니다. 받아주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평안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안 받아주는 사람 집에는 들어가지도 말고 마을 전체에서 받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마을에서 나와라.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이것이 감춰진 이유는 그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어렵게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모든 행동에 이유를 붙이고, 그 이유에 따라서 행동하려고 하고, 그 이유에 얽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은 다릅니다. 그냥 좋아하는 일을 합니다. 지키라고 하면 지킵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안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행동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어린 아이들의 행동은 본질적인 곳에 맞닿아 있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간혹 일반의 범주에서 벗어난 아이들도 있겠습니다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생명을 살리려는 행동을 합니다. 자신이 그 행동을 할 수 없다면 주변에 있는 어른이라도 불러오려고 노력합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그렇게 들어왔고 봐왔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아픈게 싫기 때문에 남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다만 커가면서 남을 아프게 하며 자신의 무언가를 해소하는 방식을 배워가기에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은 슬기로운 사람들보다 오히려 지혜에, 진리에 가까운 행동을 합니다.

나가는 말

담임목사 생활을 오래 하지도 않았지만, 6년차가 되면서 계속해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은혜로운 설교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학술적인 내용을 설교에 더 녹아들어가게 할 수 있을까? 저는 지금까지 신학교에서 이 둘은 양립 불가하다고 들어왔습니다. 신학과 신앙은 다르다는 이야기를 너무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 머릿속에는 늘 ‘조금 더 은혜롭게’, ‘조금 더 학술적으로’, ‘조금 더...’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답답해하고 있던 중에 초등학교 2학년인 제 아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아빠 이번 주에 설교 뭐할까?” 하고 물어봤습니다. 아주 가끔씩 장난으로 아들한테 물어봅니다. 그러자 아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개그콘서트처럼 재밌는 설교’ 그때는 그냥 웃어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이 정답 같습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또한 전하면서 재미있어야 하고, 성도님들도 말씀을 들으면서 재미있어야 거기에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개그콘서트 같은’ 설교는 좋은 설교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재미있다’는 표현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가벼운 재미가 아니라 깊이 있게 재밌는 설교라는 것은 저에게 있어서 아직까지 도달하지 못한 이상이긴 합니다만, 결국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삶은 복잡합니다. 계산할 일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고 신경 써야 할 일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만 해라”,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그냥 해라” 그리고 그것이 참된 진리. 하나님을 아는 지혜이고 예수님을 아는 지혜라고 하십니다.

제가 처음에 마태복음과 과정은 다르지만 결론은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렸는데, 결국 결론은 이것입니다. 본질적인 것,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복잡한 계산을 벗어버린 것, 그것을 행하는 일이 참된 일이고,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갖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행할 때에 우리의 눈에는 참된 진리가, 감춰졌던 지혜가 보이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방식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모든 짐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고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다 내려놓으시고 참된 지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쉼을 얻으시고 평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복잡한 생각들을 내려놓으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분명 평화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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