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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죽음신학자가 본 삶과 죽음 2
김흡영 대표(한국과학생명포럼) | 승인 2018.09.04 20:58

그리스도교 사상의 역사에서 의식실제주의자들처럼 몸을 떠난 의식 또는 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하는 입장과 인간을 단지 생물학적 물질로 보는 물리주의 입장은 그리 낯선 견해들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교는 이 둘과는 다른 제3의 입장을 견지하여 왔다. 두 극단적인 입장 사이에 중도적 입장을 택하고 있다고 하겠다. 영혼의 존재와 육체를 가진 인간(나)의 개체성을 동시에 믿는다.

『구약성경』의 「창세기」는 하느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2:7). 이 구절은 최근 과학자들이 자궁 속에서 태아의 얼굴 형성은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퍼즐을 맞추는 것 같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의 발견과 더불어 더욱 신빙성 있게 들려진다.(미주 9) 특히, 태아의 몸이 최종적으로 결합되는 중심은 인중과 코라는 연구결과는 이 창세기 구절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어 더욱 신비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하느님의 생기(영혼)와 육체(육체)의 결합으로 정의된다.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이란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만도 아니고, 개체성이 없는 영원불멸한 영혼만도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물리주의 또는 유물론적 환원론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본다.

또한, 신학은 인간을 몸이라는 개체성이 없는 영원불멸한 보편적 의식 또는 영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영지주의적 견해(Gnosticism)와 오랫동안 싸워왔다. 그리스도교 사상사에 나타난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은 가지고 있지만 육체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가현설(Docetism)이며, 고대교회는 가현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리스도교의 한 핵심적인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말하는 크리스마스 스토리는 인간의 육체성을 더욱 강조한다. 이른바 하느님(神)이 인간이 되는 성육신 사건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모형인 예수는 사람 옷을 걸치고 사람의 모습을 한 귀신이 아니라 병들고 죽을 수 있는 육신, 진짜 몸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짧은 일생을 통하여 몸으로 많은 고통을 몸소 감수해야 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또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최고의 명절인 부활절이 기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예수의 부활은 영혼만이 소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였던 도마가 확인했던 것처럼 몸의 부활을 포함한다. 이렇게 몸(肉體)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본 삶과 죽음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물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뇌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면, 이 인생에서 성취한 업적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악함과 불의가 영원히 보상되지 못하고, 인생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것이 된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핵심은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은 단 한번 발생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히 9:27).

다른 종교와 달리 같은 삶을 반복하거나 전생의 도덕성과 관련되어 있는 환생은 이러한 문제와 인간 삶의 당위성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해결책으로 수용되지 못했다. 그리스도교에서 그 해결책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죽음으로써, 그 공로에 의하여 예수가 부활함으로써, 그리고 그 대속적 공로에 의해 인간이 하느님과의 연합할 수 있게 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그 해결책이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의 죽음에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원의 확신을 주는 근거일 뿐만 아니라, 죽음의 이상적 모형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그리스도교 사상에 있어서 핵심적인 주제로서 오랫동안 논의되어왔다.(미주 10)

구약성경이 말하는 죽음

『구약성경』에서 죽음은 생명체에게 부수되는 일반적인 자연현상이며, 인간실존의 자연적인 부분으로 간주되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었으며, 그래서 인생의 목표는 길고 충만한 삶을 살고 평화롭게 죽는 것이었다.

삶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부채로 받아드려졌고, 신은 삶의 주재자이었다. 빨리 죽는 것은 악으로 간주되었고(왕하 20:1-11), 하느님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되었다(창 2:2-3, 신 30:15, 렘 21:8, 겔 18:22-32). 죽음은 신과 사람들 그리고 신께 드리는 예배로부터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신 21:23, 시 115:16-17).

유대인들은 인간을 영혼의 성육신 또는 육화보다는 육체에 영혼이 깃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환원불가한 몸을 가진 육체적 존재이며 그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지구였다. 그러므로 죽음을 떠난 영혼 또는 하느님께로 복귀하는 영혼과 같은 것에 대한 언급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 학자들은 그러한 언어가 사용되는 본래의 맥락은 개인적인 존속에 대한 믿음을 함의하는 것이 아니고, 신이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 보낸 영을 되돌려 받는 것으로 보았다.

신약성경이 증언하는 죽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약성경』에서 죽음은 신학적 문제이다. 불멸성(immortality)은 오로지 신에게만 속한다(딤전 6:16). 신에게만 속하는 것이므로 인간은 죽음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가지고 살게 된다(마 4:16, 히 2:15). 신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므로(롬 4:17), 죽음은 신으로부터 절단된 존재의 결과이다. 그 과정은 최초의 인간 아담으로부터 이미 시작되었고(롬 5:15, 17-18, 고전 15:22), 모든 인간이 참여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롬 3:23, 5:12). 죽음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분리된 결과로 피할 수 없이 다가온 운명인 것이다(롬 6:23, 히 9:27).

▲ 초대 그리스도교의 순교, 작자 미상 ⓒGetty Image

그러므로 죽음이란 인생의 종말에 발생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의 현재의 삶 속에서 지배하는 세력이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분리가 되는 것이며 곧 영적인 죽음이요, 그 죽음 안에서 사람들은 현재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죽음, 곧 신으로부터의 분리되어 육신을 따라 살게 되는 것이 모든 인간이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삶의 구성요소이다(롬 8:6, 요 1:3-14). 죽음으로 이르는 죄의 법은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에도 현실적으로 역사하고 있다(롬 7:9, 고전 15:26, 약 1:15).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의인으로 인정받았지만, 아직 죄성의 인력(inertia)에서 벗어나지 못한 죄인이다. 그래서 지상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의인이자 동시에 아직도 죄인이다(simul justus et peccatur). 그리스도인은 의인이자 죄인인 두 정체성이 충돌하고 있는 아직 모호한 양가적 존재이다. 죽음의 주인은 최고의 반역자인 사탄이며(히 2:14), 죽음 그 자체가 악마적인 세력이다(고전 15:26-27, 계 6:8, 20:13-14).

『신약성서』의 복음은 죽을 필요가 전혀 없는 그리스도께서 죽음 안에 들어가셔서(빌 2:7, 고전 5:7, 벧전 3:18)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는 것이다(막 10:45, 롬 5:6, 살전 5:10, 히 2:9). 그리스도는 악마와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그들을 극복한 능력으로 승천하였다(히 2:14-15, 계 1:17-18).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그의 신자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사망의 능력을 분쇄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와 함께 그리스도에게 속하여져서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과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들이다(롬 7:6, 갈 6:14, 골 2:20).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의 경험을 통과 한 자들로서 이제는 신으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세상과 죄로부터 분리되었다. 세상과 죄는 그 자체가 신과의 분리를 말하므로 곧 죽음이다. 죽음이란 다름 아닌 신과의 분리되어 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의 아들이시며, 곧 신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찾은 자들이다(고후 40, 5:14-15, 골 3:3).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을 주고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주셨다. 그 사역의 효과는 사망할 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세계 전체는 이미 죽었고(계 3:2), 세계는 “두 번째 죽음(the second death)”이라고 일컫는 신으로부터 영원한 분리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계 20:14).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되며(요 5:24), 더 이상 죽음을 볼 수 없게 된다(요 8:51-52).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죽어야 할 운명이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는 죽지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살전 4:16), 또는 그것을 “잠든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행 7:60, 요 11:11-14 등). 육체적인 죽음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극복되어야 할 적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그 승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롬 8:9-10, 고전 15:26). 죄가 이를 갈며 물어뜯으려하지만 결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인을 더욱 그리스도에게 근접하게 자극할 뿐이다(롬 8:38-39, 고후 5:1-10, 빌 1:20-21). 부활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들을 잠에서 불러내어 변화된 육체적 삶과 동시에 그들이 이미 향유하고 있는 영적인 삶으로 돌아가게 해준다(고전 15:20, 골 1:12).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한 이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신체적 실존이 가진 비극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점과 그리스도가 이미 죽음을 이기고 승리했다는 사실을 동시에 인식하며 살았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영원을 향하여 나가는 관문이었으며 죄로 말미암아 벗어났던 타락의 길에서 회심하고 되돌아와 하느님 안의 삶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계였다. 그래서 순교자들의 죽음은 축하할 일이었으며, 애통하지만 믿음에 따른 죽음에 대하여는 확신과 환희를 가지고 말할 수 있었다. 죽음을 부정하지 않았고 애통함을 억누르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죽음을 희망을 향한 그리스도 안의 사건으로 보였고 또한 모두가 준비해야 될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그들에게 죽음은 이미 그 쏘는 맛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미 죄의 세력을 분쇄한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죽음을 직면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고전적 인간론은 희랍 사유와 유대 영성 간의 융합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영혼은 신의 창조물이며 영혼불멸성을 지향한다고 가정한다. 동시에 그것은 육체는 인간에게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고, 몸의 부활은 미래의 완전한 인간의 실존을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한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을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것으로 간주하며, 마지막 심판 전에 우리의 도덕적, 영적 발전을 위해 설정된 한계로 인식한다.

정리하면,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죽음은 대략 세 가지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 죽음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자연적 한계다. 둘째, 죽음은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를 위해 그 죄를 대신지고 심판을 감당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진술한다. 셋째,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그들이 하느님의 은혜로운 품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이다. 죄로 얼룩진 혼란한 이 세상을 떠나 완전한 세상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는 은혜로운 순간으로 해석된다.

미주

(미주 9) Jacqueline Howard, “Fatal Development Video Shows How Face Forms in Womb,” The Huffington Post, 2012.07.05. http://www.huffingtonpost.com/2012/07/05/fetal-development-video-face-womb_n_1651207.html 참고.
(미주 10) 이하 부분은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EDT) 다음 entry에 많이 의존하였음을 밝혀둔다. P. H. Davids, “Death,” in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ed. by Walter A. Elwell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 1984), 299-300.

김흡영 대표(한국과학생명포럼)  heup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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