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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이신 하나님?은혜와 심판(신 30:19-20)
이성훈 | 승인 2018.10.07 22:23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일전에 나훈아 씨의 ‘무시로’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무시로’에 대한 말씀을 작성하면서, 한쪽에 편향되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남진 씨의 노래도 언젠가 설교에서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꼭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만, 운전 중에 남진 씨의 노래를 듣다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기에 그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노래 제목부터 말씀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그대여 변치마오’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최근에 계속 예언서를 읽어서 그런지 노래의 도입부 가사인 ‘오~ 그대여 변치마오’ 가 예언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외치는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그 다음 가사는 ‘불타는 이 마음을 믿어주세요, 말 못하는 이 마음을 알아주세요. 그 누가 이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당신이 없으면 나는 나는 못살아.’ 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긴 합니다. 하지만 예언서의 말씀들 속에서 하나님의 이러한 모습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과 불타는 마음은 성경의 많은 곳에서 드러납니다.

그런데 마지막 가사, ‘수 많은 세월이 흐른다 해도 당신만을 당신만을 기다리며 살아갈테야.’ 여기까지의 가사 내용에 예언서의 하나님을 이입시켜 본다면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행동이 하나님, 한 종교의 신이 보일 수 있는 행동인가?’ 하는 생각입니다. 자신을 배반한 신앙인들을, 자신의 뜻에 따라 살지 않은 신앙인들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신인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겁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

여기에서 한 번 생각을 고쳐먹고 노래를 다시 들었습니다. ‘이 가사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하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외쳐야 하는 소리이다.’ 즉 우리의 신앙고백이라는 입장에서 들어보자 하고 마음 먹었습니다.

요즘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한창 유행했던 복음성가 중에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이라는 찬양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가사도 단조롭고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는 찬양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열린음악회에 참석하셨다가 불렀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당시 MC가 약간 짓궂게 김수환 추기경에게 가요도 부르시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김수환 추기경이 그 대답으로 김수희의 애모를 불렀습니다. 아마도 짓궂은 질문이 아니라 짜여진 질문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김수환 추기경의 애모는 ‘그대’가 전부 ‘주님’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주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싶어라~ 주님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주님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 드는데...’ 이런 식으로 불렀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대여 변치마오’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라는 맥락으로 적용시켜 봐도 될 듯 합니다.

그런데 또 한 번 생각이 막히는 구간이 생겨버렸습니다. ‘그대여 변치마오’라는 가사에서 우리의 신앙고백이라는 생각이 다시 막힙니다. ‘그 누가 이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당신이 없으면 나는 나는 못살아’까지는 괜찮은데, ‘그대여 변치마오’가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한 번이라도 하나님께 변하지 말아달라는 간구나 부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떠나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간구도 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이를 신앙이라고 합니다.

찬송가 270장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를 부르면서 우리는 전혀 거부감을 갖지 않습니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하나님께서 변하시리라는 그런 부담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은 변치 않으신다는 이상하리만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그 확신이 강할수록 신앙이 깊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여러분과 한 가지 질문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직 메리트만 있고 디메리트가 전혀 없는 종교, 아무리 잘못해도, 나쁜 짓을 해도,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 교회에 와서 회개한다고 하고 기도하기만 하면 뭐든지 용서해주고 다시금 내 앞에 나타나 나를 안아주는 신. 그런 신을 믿는 종교가 진짜 종교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두 가지의 신앙

얼마 전에 한 모임에서 장일선 교수님의 책을 읽으면서 신명기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많은 성서 해석학자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러 계약들을 구분하고 그 계약의 내용들 역시도 구분해서 성경을 해석합니다. 예를 들자면, 노아 계약, 족장들과 맺었던 계약, 시내산 계약, 다윗 계약 등이 있습니다.

신명기에도 여러 계약 내용이 나옵니다만, 중요하게 살펴볼 두 가지 계약이 하나님께서 족장들과 맺으셨던 계약과 시내산에서 맺으신 계약 두 가지입니다. 결국 계약의 내용면에서 이 두 가지 계약으로 압축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족장들과 맺으신 계약은 간단하게 말해서 은혜와 은총의 계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시내산에서 맺으신 계약은 법 준수와 심판의 계약입니다.

▲ Moses at Mount Sinai by Jacques de Letin(1597-1661) ⓒGetty Image

신명기에는 이 두 계약이 혼용되어서 나옵니다. 은혜와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 어떤 순간에도 이스라엘을 지키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나옵니다. 또 한편에서는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옵니다.

이런 맥락은 이후의 신명기 역사서라던가 예언서에서도 동일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몇몇 예언서에서는 예외적으로 벌은 벌로 받아야 한다고만 이야기하기는 합니다만, 대부분의 예언서는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을 찾으시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오히려 그들을 죄로부터 되돌리신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돌아간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슈브’는 회개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예언서에서 ‘슈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되돌리신다’라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됩니다. 즉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개하도록 만드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은혜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을 넘어서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심판을 중지시키고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이 두 계약의 함께 나타난다는 점은 그 자체로도 모순되지만, 말도 안 됩니다. 혼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은혜의 계약이 심판의 계약을 뒤덮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지연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벌을 받는 이야기는 있습니다. 가장 쉽게 이야기해서 지옥 간다고 말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언제 지옥 간다고 말합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셨던 일들을 지키고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지옥 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장 쉬운 예로 예수님은 정죄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누군가를 정죄했다고 해서 우리는 지옥에 갈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내가 누군가를 정죄한다는 인식조차 없는 상태로 누군가를 정죄할 때가 더 많기는 할 것입니다.

앞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 비중 있게 나타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다고 느낍니다. 성경에 나타난 심판이 우리의 현실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기에서 욥이 이야기한 것처럼 악한 사람은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이를 심판이 지연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여기에서 심판은 종말과 동일한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기에 심판은 우리나라 전통 신앙 체계에서 말한 것처럼 죽어서 염라대왕에게 심판을 받는 이미지, 죽은 이후에 하나님 앞에 가서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결정된다는 생각만이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 심판의 지연으로 인해서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인해서 이 땅에 벌어지게 될 일은 무엇입니까? 성경적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벌어진 결과는 무엇입니까? 결론은 딱 한가지입니다. 악이 넘쳐나는 세상. 악이 선을 이기고, 강자가 약자를 수탈하는 세상이 됩니다.

은혜의 하나님께서 죄에 빠져있는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신 결과는 이 땅에 악이 넘쳐나게 된다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보고 있는 현상들입니다.

우리의 신앙

저는 우리의 교회들이 은혜의 하나님만을 강조해왔고, 심판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죽어서만 심판 받는 것처럼 이야기해 온 점에 대해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되어 왔기 때문에 교회들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런 심판을 강조하게 된다면 그것은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빠질 수밖에 없기에 약간 경계해온 면도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교회들이 은혜의 하나님을 말하면서 사회 전체적인 은혜가 아니라, 개인 중심의 은혜만을 이야기해왔기 때문에 세상에 악이 차고 넘치게 되는 그 결과를 바라보지 않았고 오히려 외면했습니다. 내가 잘 먹고 잘 살면 이 땅이 악으로 차고 넘치건 관심 없다는 신앙만을 가르쳤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은 없는가? 오직 은혜의 하나님만이 계셨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종말과 연결시켜서 생각해왔기 때문에 심판은 없었다고 말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있어서 이 지연된 심판이야말로, 악으로 찬 이 세상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이 사회의 모습, 악이 성행하고 강자에 의한 약자의 수탈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사회, 너도나도 강자가 되어서 약자를 수탈하고 싶어하는 사회, 70억 인구 중의 10%도 안되는 사람만이 강자가 되고 90%는 낙오자가 되어버리는 이 사회가 결국 우리가 받고 있는 심판이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악을 방치해온, 오직 개인이 받을 은혜만을 쫓아온 개신교가 받고 있는 벌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저는 저희 교회에서 지금까지 많은 교회가 강조해왔던 부분들, 주일 출석, 헌금 등을 강조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편한 교회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성도님들이 허세에 가까운 신앙생활을 하지 않기를 원하기에 그런 점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예배에 몇 번 참석했으니까,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으니까, 헌금을 얼마만큼 했으니까, ‘난 신앙이 깊다’라는 식의 생각을 버리시게 하기 위해서 그런 강조를 아예 안합니다. 그런 교회 생활을 많이 한다고 해서 신앙이 깊은 건 아닙니다.

저는 이런 교회 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일보다는 근본적인 신앙,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잘못을 행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또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선한 길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며 그때에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말씀드립니다.

때로 여행을 가기 위해서 주일에 빠질 수도 있고, 일 때문에 주일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미묘한 차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주일 예배에 빠지면 안 된다는 신앙을 가지고 주일에 빠지지 않는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주일에 빠졌다고 해도, 여행을 가셨다면 여행 장소에서 교회에 가실 수도 있을 것이고, 일이나 어떠한 사정에 의해 교회에 가실 수 없을 때에는 적어도 예배 시간 즈음에 잠시라도 하나님께 기도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런 행동이 나옵니다. 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본질적으로 나에게 신앙이 있는가 없는가는 그 두려움이 있는가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

하지만 제가 경계하고 싶은 것은 교회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 신앙의 자랑거리, 남들 앞에서 내 신앙의 깊음을 드러내는 행위가 되는 점입니다. 교회 출석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모든 신앙 행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행위는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표출되는 행동일 뿐입니다. 내 신앙의 깊음을 자랑하는 순간, 그 신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아니라 겉멋에 취한 신앙, 허세에 빠진 신앙이 됩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은혜만 내리시는, 끊임없이 죄를 범해도 끊임없이 용서하시는 그런 이상한 신이 아닙니다. 그런 신을 믿는다는 건 그냥 나 좋을대로 다 하면서 살면서 약간씩 느껴지는 양심의 가책마저 벗어버리겠다는 진정한 악행이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악한 일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달라는 대로 주기만 하는 하나님은 호구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을 점점 호구로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렇기에 죄를 멀리하고 선을 쫓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의 악을 줄여나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사이비들처럼 종말을 두려워하며 떨며 살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근본적인 두려움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때에 당신을 경외하는 백성을 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참된 은혜를 내리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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