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법의 본질(막 2:27-28)
이성훈 | 승인 2018.11.25 19:37

오늘은 한동안 계속해서 말씀드렸던 법에 대한 생각을 조금 나눠봤으면 합니다. 말씀을 준비하게 된 계기는 좀 다른데 있기는 했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법, 하나님의 법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법을 어긴 제자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공관복음서에 동일하게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저희가 읽은 본문은 마가복음의 일부인데, 마가복음 2장 23절에서 3장 6절까지의 내용이 마태복음 12:1-13, 누가복음 6:1-11에 거의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사실은 여기에는 안식일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를 다 다루기에는 시간이 부족할듯 하여, 오늘은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만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단순히 안식일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무언가를 먹는 일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말합니다만, 오늘 저희의 관심은 여기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으려고 합니다.

본문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어딘가로 이동하는 길에 누군가의 밀밭 사이를 지나게 됩니다. 물론 안식일에 장거리를 이동하는 일도 안식일 법에 저촉되기는 합니다만, 중간 중간, 일정 시간동안 쉬었다가는 편법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이동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은 듯 합니다.

밀밭 사이를 지나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밀 이삭을 잘라서 먹게 됩니다. 혹시나 남의 밭에 있는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의 행동에 대해서 당황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여기까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명기 23장 25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법이 있습니다.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손으로 곡식을 따는 일은 많은 양을 취하려고 한다기보다, 잠깐의 허기를 달래기 위함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법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신명기에는 낫으로 남의 곡식을 수확하지 말라는 단서 조항이 붙어있습니다.

▲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 예수님과 제자들 ⓒGetty Image

그런데 문제가 되는 점은 손이건 낫이건 안식일에 먹을 음식을 수확했다는데 있습니다. 먹을 음식을 수확했다는 것은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이 점을 지적합니다.

사실 율법을 가장 엄격하게 지켰다는 에세네파의 경우, 다마스커스 문서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가축의 출산을 도와서도 안 되었고, 가축이 물통에 빠졌더라도 구해주면 안 되었고, 이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리새파나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이보다는 훨씬 가벼운 법적용을 했다고 합니다. 다만 그들은 해도 되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을 하나하나 구분해 놓는데 집중했다고 합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에 먹을 음식을 수확하는 일은 법에 저촉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왜 예수님과 제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냐고 묻습니다.

여기에서 간단하게 그 하나님의 법을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안식일 법은 십계명 중 하나입니다. 출애굽기 20장 8-11절과 신명기 5장 12-15절에 나옵니다. 이 둘은 기본적으로는 동일합니다. 매 일곱째 날인 안식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하고, 6일간은 열심히 일하되, 안식일에는 모든 사람이 일하지 말고 안식해야 한다는 법입니다.

다만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차이점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창조를 이야기합니다.

“내가 창조 때에 6일간 창조하고 7일째에는 쉬었고, 그 날을 복되게 했으니까 너희도 안식일을 지켜라.”

반면 신명기는 출애굽을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종이었을 때에 내가 너희를 이끌어냈고, 내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다.”

뭔가 출애굽기에서 출애굽 얘기를 할 것 같지만, 신명기에서 출애굽 얘기를 합니다. 이 두 가지 상이한 이유에 대해서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도 있겠습니다만, 창조신학에서 이유를 찾건 출애굽 신학에서 이유를 찾건, 중요한건 안식일에는 쉬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와 신명기는 동일하게 6일간 일하고 하루 쉴 것을 명령합니다. 즉 안식일 법은 쉼의 법입니다.

예수님의 답변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하실 대답은 우리가 너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입니다. 27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안식일은 사람이 쉬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니까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과 공관복음서의 분위기를 보면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정반대에 서있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법, 또는 장로들의 전통에만 치중하였기 때문에 안식일이라는 법을 사람보다 위에 놓았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히려 유대교 랍비들의 전통적인 생각과 동일하다고 합니다. 그 예로 주후 180년경, ‘출애굽기에 대한 미드라쉬인 메킬타’에서 ‘랍비 시므온 메나지아’가 말한 내용을 보면, “너희가 안식일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너희에게 맡겨졌다”라고 말합니다. 혹시나 연대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을 이 랍비가 따라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의 말은 유대교 전통에 따르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의 저작권이 예수님에게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또한 학자들은 랍비나 서기관들이 궤변을 늘어놓을 때,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인용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다윗의 이야기를 인용하시고 계신 점은 랍비나 서기관의 방식과 유사하고, 심지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내용과는 조금 다르게, 어쩌면 틀린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점은 랍비나 서기관의 궤변보다도 훨씬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상 21장에 보면, 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치다가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아비아달은 그 아히멜렉의 아들입니다. 벌써 한 부분이 틀렸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다 제사장이었을 수는 있으니까 아비아달도 제사장일 수는 있습니다만, 복음서에는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라고 나옵니다. 아비아달이 대제사장은 아니었습니다. 혹시 ‘제사장’을 ‘대제사장’이라고 잘못 번역한 것일까 싶기도 합니다만, 아쉽게도, 헬라어 ‘아르키에류스(ἀρχιερεύς)’, ‘대제사장’이라고 써 있습니다.

게다가 사무엘상에 따르면 다윗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진설병을 먹지 않았습니다. 아히멜렉에게 떡을 달라고 부탁한 뒤, 진설병을 받아서 먹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다윗이 혼자서 떡을 먹었는데, 복음서에는 여럿이 먹었다고 나온 점도 잘못되었다고 합니다만, 그 점은 사무엘상을 잘 읽어보면, 일행이 뒤따라오고 있고, 그들을 위해서 많은 양을 받아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 시대에는 우리와 같이 성경책이 보급되어 있던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 사소한 오류는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구약을 인용하고 있다는 측면과, 인용 자체에서 보이는 오류들에 따라, 이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나중에 교회에 의해 첨가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말씀은 27절 한 절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본인의 어투가 아닌, 당시 궤변 취급당했던 랍비와 서기관들의 방식을 따라 바리새인들에게 대답하고 계실까? 저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방식대로 그들에게 답변하고 계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앞서 에세네파는 율법준수에 철저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바리새인은 조금 유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리새파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대교에 있어서 안식일 법은 생명에 관련된 일이라면 다소 용인해주는 부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밀 수확이 생명과 관련된 일이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로부터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치던 때, 먹을 것마저 떨어져서 목숨이 더 위태로워 졌던 때, 진설병을 먹었던 것처럼,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은 허기져 죽을지도 모르는 상태였다는 이야기를 바리새인들에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인용하고 계신 다윗의 이야기로 인해 안식일 법을 지켜야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의 ‘법준수’ 문제는 생명과 직결된 ‘상황의 문제’로 이야기가 전환됩니다.

이어지는 3장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3장 4절에서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은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법을 지키느라 생명을 구하지도 않는다는 얘기를 하시는 게 아니라, 그들 역시도 안식일에 생명 구하는 일은 허용하고 있으면서 왜 안식일에 치유행위를 하는 것을 비난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이 역시도 안식일 법 준수의 문제에서 생명을 구하는 일, 선을 행하는 일이 좋으냐 나쁘냐의 문제로 논점이 전환되어 버립니다.

여기에서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잠시의 허기짐, 육신의 아픔, 혹은 육신의 장애가 생명과 연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결국 생명, 삶과 직결되어 있다고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에게 있어서 안식일에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밀 이삭을 자르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되고, 안식일에 아픈 병자를 치유하는 일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됩니다. 이런 개념적인 수정을 위해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랍비들의 방식에 따라 그들에게 대답하셨고, 그들의 인식을 수정해 주셨다고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이 안식일 논쟁은 안식일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법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고, 무엇이 삶을 회복시키는 일이냐의 문제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은 고작 그런게 무슨 생명과 연관되어 있냐고 말하고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고작 그런 일이라도 생명과 연관된 일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생명과 법

예수님께서는 법 준수의 문제를 생명 살림, 삶의 회복 문제로 전환시키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점은 생명 살림의 문제가 왜 꼭 안식일 법과 연결되어서 나오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왜 굳이 안식일 법을 따지는 바리새인들에게 작은 일로부터 생명을 살리고 삶을 회복시킨다는 개념을 말씀하셨을까?

아주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안식일 법 자체가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7일째의 휴식은 사람을 노동으로부터 쉬게 만들기 위한, 그렇게 생명을 얻게 되고, 그 쉼의 시간을 통해서 자신의 참된 삶을 누리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중 단 하루의 휴식만으로도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런 개념은 단지 안식일 법에만 국한되지 않고 법 전체에 대한 개념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법은 사람을 가두고 옥죄는 법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 위한 법, 사람의 삶을 회복시키는 법이었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이 했던 말들과 방식들을 빌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도 생명을 살린다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그럼 생명을 살리기 위해 그렇게 법을 지키자!”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여러분 스스로가 하나님의 법을 통해서 살아나시기 바랍니다. 사람다운 삶, 회복되는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잠시의 허기짐도 생명에 관련되어 있고, 육신의 아픔, 육신의 장애가 모두 생명과 관련된 일이고, 삶과 관련된 일이라고.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법대로, 그들과 함께 삶의 회복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동안 서울 강서구에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 문제로 언론이 떠들썩했습니다. 장애아동의 어머니들은 강서구민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겠지만, 장애가 없는 비장애인들은 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걔네들이 교육을 받건 받지 못하건 장애인인건 똑같은데 왜 우리 동네 집값 떨어지게 장애인 학교를 만들어야 되냐!’하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 있어서 교육은 어떻게 생각하면 생명과도 연결된 문제입니다. 앞으로의 살아갈 날을 위한 교육이고, 지금 살아가기 위한 교육입니다. ‘고작 뭔가를 가르치고 안가르친다고 해서 걔들이 죽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 걸로도 사람은 죽는다고. 그 하나를 해주는 일이 그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문득 옛날 대학 선배들에게 배웠던 ‘철의 노동자’ 가사 한 소절이 생각납니다.

“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하루만 인간답게 사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온 삶을 하나님의 법, 생명의 법 안에서 사람답게 사는 삶을 먼저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만 살아나고 회복될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을 도움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전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라고 축원합니다.

이성훈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성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충정로 2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 생명의집 204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8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