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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 복음, 이를 둘러싼 신학적인 충돌세 가지 미완성의 장면들 속에서의 복음전파 (3)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 승인 2019.01.11 03:38

복음전파의 첫째 장은, 우리가 직접적인 접근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우리의 눈에는 숨겨진 신학적 충돌이다. 그런 투쟁은 우리의 시야를 넘어선다. 우리가 우주적 현실에 대한 불가지론적 표현을 받아들이게 하는, 상상의 긴 설화적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것에 대한 접근수단을 지닌다.

무엇과 무엇이 충돌하는가

우리는 존재론적 호소를 할 수 있는 표현을 위한 단 한가지의 규범적 형태를 갖고있지 않다.(1) 우리는 조금도 논리적 우선권을 갖고 있지 않는 단지 많은 상이한 예술적인 이야기들(tellings)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 선 대 악
• 생명 대 죽음
• 야훼 대 파라오
• 예수 대 사탄, 죄, 그리고 죽음

이러한 대치들은 특정한 방법으로 현실을 형성하는 기억들과 은유들, 그리고 상징들의 당파적인(partisan) 경향에 따라 생생한 현실을 묘사하려는 전적으로 대담한 시도이다. 신앙 공동체에 의한 이런 특징적인 표현들 속에는 논쟁 중인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실제로 승리를 주장하고 싶어한다. 물론 그 소식은 기쁜 소식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승리가 주장될 수 있기 전에, 우리는 충돌의 근거에 대한 은유를 확립해야만 하는데, 다시 말하면, 실제로 세상의 형태, 통치, 그리고 미래를 위한, 비록 숨겨져 있지만, 엄청난 투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투쟁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몇몇 결정적인 전환점을 지나왔지만, 그것은 아직 궁극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끊임없는 충돌과 변화되는 이야기들

성서는 우리에게 충돌과 승리의 이 드라마를 지배하는 단 하나의 사건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택일할 수 있는 많은 공연들(enactments)과 개작된 이야기들, 즉 다른 것들만큼이나 중요한 것을 제공한다. 나는 매 본문이나 모든 본문들이 여기에서 윤곽을 그렸던 드라마의 순서를 따른다고 제안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이 분류법이 성서 속에서 하나의 현저한 유형이라는 것만을 제안한다.

이 유형화(patterning)는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한편으로, 이 유형은 보다 긴 본문에서 중추적인 전환점인 것들 중에서 되풀이되는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본문들은 유대인 해석 공동체와 기독교 해석 공동체가 특징적으로 성서의 신학적 “알맹이”(meat)를 위해 결정적인 것으로서 취급하는 본문들이다.

나는 이런 연결망 바깥쪽으로 이탈한 많은 본문들,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것을 반박하는 몇몇 본문들이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내가 기꺼이 행하려고 하는) “정경적인 성경봉독”(canonical reading)과 같은 어떤 것을 실천하는 신앙 공동체 속에서, 이런 동일한 본문들이 성서 내에서 최고의 권위를, 즉 사용에 의해 그리고 확신에 의해 수립된 권위를, 발휘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내 표현(presentation)은 옹호하는 행위이지 흥미를 갖지 않는 중립의 행위가 아니다.

내 제안으로, 그것은 이런 공동체들의 실천에 일치하는 옹호이다. 나의 본문에 대한 감각은 사용과 확신이라는 그런 대략적인 의견의 일치를 따른다. 힘있는 세력들이 미래를 통제하기 위해 싸우는 충돌의 장인, 첫째 장에 속한 이런 여러 가지 번역들을 숙고해 보라. 이 장은 뒤따라 나오는 모든 것에 대해 결정적이다: 이 장은 동시에 복음전파라는 우리의 일반적 주제에 대해 가장 어려운 것이다.

신과 신들의 투쟁

이 첫째 장에 속한 한가지 이야기(telling)는 투쟁이 신들 사이의 투쟁(a struggle among the gods), 즉 생명의 하나님과 힘있는 죽음의 신들 사이의 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성서 배후에 있는 오래된 신화들 속에서 그리고 성서의 묵시론적 후대 발전 속에서 발견된다.(2) 이것은 첫째 장의 가장 기본적이고 포괄적이며 근본적인 이야기이다.

거기에는 신들 사이의 전투나 시합이 있다. 그 다음에는, 마치 축구경기의 심판들이 부쉬 경기장에서 판결을 했던 것만큼이나, 그 투쟁을 판결하기 위한 신들의 모임이 있다. 신들을 바라보는 좀더 많은 방청인들은 충돌의 결과와 평결을 기다린다.
바로 올림픽에서 아이스 스케이팅 경기이후 기다리는 것처럼, 평결이 주어지기 이전까지 하늘에는 침묵이 존재한다. 그 다음에는, 야훼에게 9.1, 9.6, 9.4, 8.9, 4.3 [루마니아 심판!]과 같은, 여러 신들에 의해 행해지는 표결이 있고, 관중석은 환호로 가득 찬다.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telling) 속에서, 야훼는 승리자로 선언된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시 96:4-6).

그 평결은 예식 담당자들에 의해 고지되며, 세계는 야훼의 통치에 새롭게 맡겨진다.

신들의 대리자와의 투쟁

충돌에서 나온 동일한 소식의 두 번째 이야기는 출애굽 설화이다. 이제 투쟁은 정치적 현실을 침범한다. 충돌은, 자유의 보증인 대 사회적 억압의 주권자인, 야훼와 파라오 사이에 있다. 그 전투는 재앙의 순환 속에서 모세라는 대리인을 통해 수행되지만, 자유를 위한 야훼의 의지는 그 설화의 추진동력이다.

누군가 처음부터 끝까지 설화를 따라 나아갈 때, 그 결과는, 제일 마지막 이전까지, 우리가 해안에서 죽는 이집트인들을 볼 수 있기 전까지, 분명하지 않다(출 14:30-31). 오직 그 때에만 우리는 황제의 치명적인 권력이 극복되었음을 알게된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이런 위대한 승리를 가능한 한 자세한 세부사항과 통렬함을 가지고 말하고 다시 말하기를 좋아했다는 것을 시에서 볼 수 있다.

모세는 노래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 앉았도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니이다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지푸라기 같이 사르니이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원수가 말하기를 “내가 뒤쫓아 따라잡아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내 욕망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거센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출 15:4-10).

승리는 파라오, 황제, 그리고 불의한 자가 이스라엘의 시야로부터 완전히 무가치하게 된다고 하는 끝맺는 찬양 속에서 분명하게 고지된다.

여호와께서 영원무궁하도록 다스리시도다 (18절).

지상의 절대 권력자로부터의 해방

이 기본적인 충돌과 승리의 세 번째 개작된 이야기는 바벨론 포로 중에 주어진다. 바벨론의 압제자의 권력은 도전의 여지가 없는 듯이 여겨졌다. 그렇지만 포로라는 역사적 경험은 바벨론의 신들과 야훼의 권능 사이의 충돌에 관한 예전 드라마로 시인에 의해 개작된다. 또 다시 그것은 전혀 동등한 시합이 아니다. 야훼는 권능과 다정함을 지닌 채 충돌에 임한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사 40:10-11).

혹은 은유가 시인에 의해 법정의 것으로 변경된다. 야훼는 다른 신들을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그들에게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도록 권한다. 그들은 그렇지만 바보 같고, 말이 없고, 무력하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하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이 어떠한 것도 알게 하라
우리가 마음에 두고
그 결말을 알아보리라
혹 앞으로 올 일을 듣게 하며
뒤에 올 일을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신들인 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재난을 내리든지 하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
보라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 (사 41:21-24).

개작된 이 이야기 속에서 재판의 결과는 제국의 권력이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야훼의 권위는 분명하고 명백하다. 자유와 정의와 귀국의 주님은, 전투가 의심할 여지없이 끝나기 때문에, 활동 중에 계신다. 다른 신들은 권력으로부터 쫓겨난다. 완전히 권력으로 확립된 충돌로부터 야훼는 나타난다.

제국과 성육신의 투쟁

네 번째의 개작된 이야기는 로마 제국의 깊고 숨막힐 듯한 절망과 유대교의 강력한 메시아 희망 사이의 충돌이다. 자신의 도구인 헤롯과 함께 로마제국이 그 어떤 경제 개혁이나 정치혁신을 막을 것이기 때문에, 로마는 물론 좀더 강력한 듯 보였다. 물론 가난한 자들은 로마제국의 정책들에 의해 가장 강한 타격을 입었다.

누가복음의 성탄절 이야기 속에서 목자들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아무 것도 희망하지 못하며 절망으로 종말을 고하는 주변으로 밀려난 자와 상속권을 박탈당한 자의 암호(cipher)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운명지어진 종말은 대담한, 기대하지 않았던 시작에 의해 분쇄된다. 시인들은 “구하다”라는 이름을 가진 이 연약한 아기에게서 절망과 무효화의 권력이 완전히 분쇄될 것이라고 대담하게 상상한다. 헤롯의 무섭고 치명적인 권력의 산산이 부서짐이 있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그 이야기는 헤롯의 광란의 반응(마 2:13)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숨겨진 사건은 헤롯이 이 우주적 시합에서 아무런 기회도 가지지 못한다고 대담하게 단언한다. 절망적 실패의 이 야비한 장면 속으로 심판들처럼 애매 모호한 증거를 판결하는 자, 즉 신생아의 승리와 평결을 노래하는 자인, 천사들의 분명한 목소리가 나온다(눅 2:10-14).

새로운 투쟁, 새로운 통치

다섯 번째의 개작된 이야기는 (많은 변형된 형태들 중 하나로)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눈먼 거지 바디매오에게 오신다(막 10:46-52). 그 이야기를 듣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제외하고, 설화 속에는 우주적이거나 범세계적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실제로 모든 우주적 위험은 자신의 마지막 희망을 얻으려고 애쓰는 이 불쌍한 눈먼 사람에 대한 이 한가지 대면 속에서 형성된다. 이 순간에 이 생명의 전달자에 의해 반격을 받는 절망과 어두움과 파괴의 권력 모두가 공중에 뜬다. 그 사람은 단지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할 뿐이다.

그의 동료들은 그를 제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하고 대답하신다. 그 사람은 보게된다.

그의 세계는 변형된다. 보지 못함의 권세는 극복된다. 그 세계는 새로운 통치 아래에 있다. 물론 우리는 그 같은 치유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신뢰를 파라오에게, 헤롯에게, 보지 못함에, 그리고 죽음에게 둘 때, 치유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 설화 속에서 그렇지만 그 같은 오래된 신념들과 그 같은 진부한 범주들은 산산 조각난다. 새로운 통치가 존재한다!

죽음을 극복하는 복음의 투쟁

복음을 위해 아주 결정적인 여섯 번째 개작된 이야기는 부활절의 기적이다. 교회의 부활절 선포가 창조 때와 출애굽에서 이루어진 우주적이고 신화적 주장과 다르지 않은 우주적이고 신화적인 주장들로 채워진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부활절의 기적은 단순히 빈 무덤이나 소생에 관계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죽음의 권세와 싸움을 하셨다는 것이다. 고전 15장에서 바울은 다음을 단언하기 위해 가장 오래된 공동의 교회의 주장에 호소한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기” 때문이다(고전 15:26-27a).

지금 바울에 의해 채택되는, 그 같은 가장 초기의 고백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선하고 기쁨에 넘치는 창조로서 생명을 위해 이제 자유롭게 된다고 단언한다. 죽음을 철저히 연구했던 그 승리는, 우리들 중 아무도 그리고 이런 옛 증인들 중 아무도 비밀의 그 토요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숨겨진다. 우리는 단지 비밀스러운 그 투쟁 속에서 모든 것이 변했다는 것을 알뿐이다. 새로운 삶은 실제로 가능하다.

의롭다 하심을 위한 복음의 법정

바울에게는 고전적인, 일곱 번째 개작된 이야기는 율법의 행위와 죽음의 권세,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정당함 입증의 은사 사이의 충돌이다. 이 개작된 이야기는 법정의 은유가 불가지론의 것인 양, 즉 바로나 바벨론인들과의 시합이 반대자의 것이었던 것만큼이나, 정의가 반대자의 절차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바울에 의하면, 이런 예수 안에서, 법정은 변형된다. 유죄는 새로운 표준들에 의해 판단되며 옛 평결들은 폐기된다. 바로와 느부갓네살과 헤롯으로부터의 해방을 반향하는, 범죄와 율법과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놓임과 용서와 석방이 있다.

새롭게 쓰여져야 할 복음을 위한 투쟁 이야기들

이 모든 이야기들, 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개작된 이야기들 속에는 단 하나의 규범적인 이야기가 없다는 점을 인식하라.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이야기들은 깊은 논쟁과 놀랄만한 결말에 관계한다. 우리들 중 아무도 혹은 현대의 사람들 중 아무도 논쟁과 결말의 순간에 있지 않았음을 인식하라.

그 논쟁과 결말은 우리가 있지 않았던 장소들과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들 속에서 일어났다. 이런 것들은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삶의 이야기의 많은 개작된 이야기들이다. 그것들은 다신론 즉 경쟁하고 충돌하는 세력들을 가정하는 이야기들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많은 개작된 이야기들 속에서 승리라는 놀랄만한 결말은 매 순간 다만 메아리나 반향으로서가 아니라 새롭게 예정되어 있는 시합으로서 언제나 쟁취되고 다시 쟁취되며 또 다시 쟁취되어야만 한다. 매 번 그 같은 투쟁은 어느 방향으로든 갈 수 있었다. 이런 첫 장면에서 성서는 엄청난 현실주의를 간직한다.

성서는 가차없이 하나님의 패배를 추구하는 악의 탄력 있는 세력을 인정한다. 여전히 악의 탄력 있는 세력의 완전한 패배가 없었다. 다만 우리가 다시 용기를 내어 따르는 길에 전투들만이 있어왔다.

복음전파의 첫 장면은 우리 미래의 통치와 세상의 미래가 위태로운 이 숨겨진 투쟁에 관한 많고도 많은 각색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개작된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자료의 애매 모호함을 무효로 하는 정직한 평결을 보증 받는다. 그렇지만 그런 분명한 평결이 완결되지 않았음으로, 충돌이 여전히 완결되지 않고 결정적으로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개작된 이야기들과 재상연들, 훨씬 더 많은 논쟁들과 결말들이 있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다시 이야기하는 매 번, 승리가 쟁취되는 매 번, 우리는 그것이 궁극적인 이야기나 혹은 궁극적인 승리라고 상상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경험 속에서 언제나 또 다른 이야기, 또 다른 평결이 요구된다. “또 다른 것” 이 없다면, 우리는 죽는다.

미주

(미주 1) 단 하나의 형태가 규범적이 될 수 없는 이유는, 형태를 취하는 모든 것이 “이론으로 가득 찬 것”(theoty laden), 즉 객관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Richard Harvey Brown, Society as Text: Essays on Rhetoric, Reason, and Realit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68과 여러 곳을 참조하라.
(미주 2) Paul Hanson, The Dawn of the Apocalyptic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5): 그는 가장 오래된 신화들과 좀더 후대의 묵시적인 본문들 사이의 결정적인 연결관계를 보여주었다.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sungildab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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