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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5장 16절에 나타난 바울의 자기 이해제사장 신학의 관점에서 본 바울 2
김재현 교수(계명대) | 승인 2019.01.12 19:19

롬15:16에서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 하지 않고 ‘일꾼’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일꾼’으로 번역된 λειτουργóς(레이투르고스)는 기본적으로는 ‘종’ 을 뜻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관원’이나 ‘공직자’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일꾼인가 제사장인가

롬13:6에서 이 단어는 로마와 공직자를 의미했다. “그들(다스리는 자들)이 하나님의 일꾼(λειτουργοὶ[레이투르고이]: 복수형 일꾼들)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롬13:6). 롬15:16에 있는 λειτουργός(레이투르고스)는 그 단어 자체로 ‘제사장 직무’를 뜻할 수도 있다. 빌켄스(U. Wilkens)는 λειτουργός가 바울 서신의 다른 곳이나 LXX에서 제의적인 개념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상급자의 지시를 수행하는 ‘종’을 뜻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는 롬15:16의 λειτουργός(레이투르고스)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적 직무를 제사장의 제의 직무의 상으로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고 본다.(1) 무(D. J. Moo)와 악테마이어(P. J. Achtemeier)도 λειτουργός(레이투르고스)가 제사장 직무를 가리킨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가 없다.(2)

반면, 던은 롬15:16에 등장하는 제의적 용어들을 알면서도 λειτουργός(레이투르고스)를 제사장과 같은 중재적인 역할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다. 그는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에바브로디도를 λειτουργός(레이투르고스, 빌2:25)로 묘사했고, 이방 교회를 위한 연보를 λειτουργία((레이투르고스, 고후9:12)로, 그 연보의 행위를 λειτουργειν(레이투르게인, 롬15:27)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 하지만 던은 분명 롬15:16의 직접적인 의미를 억지로 다른 본문들과 연관지어서 거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는 λειτουργός(레이투르고스) 뒤에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ἱερουργοῦντα τὸ εὐαγγέλιον τοῦ θεοῦ, 히에루르군타, 토 유앙겔리온 투 테우)”라는 말이 덧붙여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제사장 직분을 행하다(ἱερουργειν, 히에루르게인)이 ’라는 말은 명백히 제의적 의미를 가진다.(4) 따라서 본문의 λειτουργός(레이투르고스)도 명백히 제사장 직분을 뜻한다. 홀트그렌(A. J. Hultgren )은 롬 15:16이 시몬 대제사장의 제의적 활동을 묘사하는 시락50:12-14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고 본다.(5)

어떤 직문의 제사장인가?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을 메시아 왕국의 제사장으로 이해한 것일까? 일꾼이나 제사장 직무는 실제적인 자기이해를 나타내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은유적 표현인가? ‘일꾼’이나 ‘제사장 직무’를 하나의 ‘은유’로 이해하는 학자들이 있다.(6) 박익수는 이 구절에서 바울이 실질적인 제사장 직무를 상정했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거부한다.(7)

그렇지만 바울은 결코 복음을 제의적 제도로 간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결코 예배 때에 제의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제사장으로 이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바울이 이방인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제사장적 봉사’(priestly service)의 직무를 받았다고 생각한 것은, 한편, 그는 다만 하나님의 일꾼으 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파하여 이방인들을 성령 안에서 거룩하여진 제물로 불러오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바울이 자기 자신을 다른 신자들과는 구별되는 제사장으로 보았다거나 사도들이 사실상 제사장들과 같은 중재적 역할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 아래오바고에서의 바울의 복음 전파 ⓒGettty Image

제임스 던(J. D. G. Dunn) 역시 바울의 사역을 제사장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그는 이 구절 뿐 아니라 전체 바울 서신에서 바울의 교회는 “제의 없는 공동체”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롬15:16에서 바울이 제사장적 중재역할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바울이 “복음을 위한 모든 사역과 섬김을 특별한 제사장 계층이 아닌 모든 신자들이 참여하는 직무로 보았다”고 결론 내린다.(8) 그는 바울이 의도적으로 제의적 제사장적 흐름을 깨트린다고까지 말한다.(9) 이들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바울의 제사장 직무는 ‘은유’이다. 둘째, 바울은 다른 신자와 구별되는 일종의 제의적 중재자(브로커)가 아니다. 셋째, 바울은 “제의 없는 공동체”를 지향했다.

종말론적 성전 제의 제사장 바울

필자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자 한다. 첫 째, 제사장 직무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제사장 직무는 일종의 ‘영적 실재(spiritual reality)’였다. 바울은 구약성서를 그리스도 중심 적으로, 영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구약을 무효화 하거나 폐지시키고 단지 신약의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예화로 사용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바울에게서 구약의 내용은 연속성 가운데서 ‘변화’되었다.(10) 예를 들어 구약성서가 말했던 성전은 폐지되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다. 신자들의 몸이 종말론적인 성전이 되었다.

신자들의 몸이 종말론적 성전이라는 의식은 쿰란 공동체에서도 낯선 것은 아니다.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몸이 종말론적 성전을 의미한다면, 그 종말론적 성전에서 시중 든 종말론적 제사장이 존재 한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이러한 성전과 제사장은 바울에 게서 은유가 아니라 영적 실재였다.

둘째, 바울은 복음의 중재자이다. 바울 공동체는 마태복음에서 말하는바 ‘선생’도 ‘아버지’도 ‘지도자’도 없는(마23:8-10) 그러한 공동체가 아니다. 바울은 서신서에서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고 내세우고 있다.

정승우는 바울이 중재자(broker)로서의 자기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브로커 역할(brokerage)을 수행했다고 본다.(11) 주윗 (R. Jewett)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대사로서의 (ambassadorial)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12) 어떠한 형식이든 바울이 스스로 를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자로 인식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울은 마치 제사장처럼 자신이 특별하게 성별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롬1:1) 복음을 전하는 중재자적 역할(필자에게는 제사장적 역할이다!)을 수행해야 할 의무감을 가지도 있었다.

셋째, 바울의 공동체는 던이 말한바 “제의 없는 공동체”가 아니 라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제의 공동체였다. 물론 영적 예배라고 할 때 개신교적 예배를 떠올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구약성서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은 유대교적 성전 제의를 염두에 두고 영적 예배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것은 산 제사이다(롬12:1). 이러한 영적 예배는 제의의 폐지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며, 제의의 확대와 성취를 뜻한다.

바울의 복음 전파, 제사 활동의 하나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인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일종의 거대한 제사 활동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그의 전체 사역에 대한 자기이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바울 자신은 제사장이며,그의 활동은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롬15:16).

바울이 말하는 제사장직은 세례나 성만찬을 집례하는 것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복음 사역을 뜻한다.(13) 그는 스스로를 ‘새로운 시대(eon)의 제사장’으로 이해했다.(14) 악테마이어(P. J. Achtemeier)는 바울의 제사장적 사역 과 이방인을 제물로 드림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15)

바울은 그의 임무를 제사장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사로 데려오는 것아 다. 제사장의 책임 중 하나가 그가 가져오는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만한 것인지를 점검하는 것처럼-흠이 있거나 더 럽혀진 것은 될 수 없으며, 또한 을바른 방법으로 드려져야 한다(레22을 보라)-바울의 책임도 이방인들의 순종(즉, 그들의 믿음, 18절)이 하나님께 용납될만한 방법으로 드려지는 것을 점검하는 것이다.

악테마이어는 바울의 제사장직과 그의 제사장적 자기이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의 제물’이라는 말을 이방인의 순종 혹은 믿음으로 이해한다. 이에 반해 무(Moo)는 악테마이어와 달리 여기에서의  ‘제물’이 이방인의 희생이나 봉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롬15:16에서의 제물은 이방인 자신을 드림을 의미한다고 본다.(16) 무의 주장은 롬12:1에 의해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제물이 이방인 자신이라면 로마서에서의 바울의 생각은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제물과 제사”를 말했던 빌2:17에 비해 발전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사야서에 비추어 자기 이해를 시도한 바울

롬15:16은 이사야 66:20을 암시한다.(17) 바울에게서 이사야는 중요한 예언자이다. 홀랜드(T. Holland)에 따르면, “바울은 다른 모든 선지자들을 다 합친 것보다 이사야를 훨씬 더 많이 인용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자신이 전한 복음의 골격으로 사용하였다.”(18)

사66:20을 포함하는 사66:18-21은 이방인들에 대해서 예언한다. 이방인들은 야웨의 영광을 보고(사 66:18), 야웨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한다(사66:19).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형제를 야웨께 제물로 바치고(사66:20), 야웨는 그들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는다(사66:21).

사66:18-21의 해석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존재한다. 이 본문에서 이방인들을 전면적으로 개방하는 ‘보편주의(universalism)’의 목소리를 듣는 입장이 있다.(19) 이들에 반대해서 이 본문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디아스포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음을 뜻한다고 보는 ‘특수주의(particularism)’의 입장도 있다.(20)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 본문을 이방인에 관한 구절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성전의 제의에 참여하는 보편주의적 입장에서 이사야 구절을 바라보고 있다.

미주

(미주 1) U. Wilkens, Der Brief an die Römer 3. Teilband Rom 12-16 (Zürich: Benziger VerJag' and Neukirchen-VIuyn: Neukirchener Verlag, 1982), 118.
(미주 2) D. G. Moo, NICNT 로마서, 손주철 역(서울: 솔로몬, 2011),1189; P. J. Achtemeier, 로마서, 김도현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9), 328.
(미주 3) 10) J. D. G, Dunn, 바울신학, 박문재 역 (고양: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3), 729-731.
(미주 4) E. Käsemann, 로마서 (서울: 한국신학연구소,1994), 634.
(미주 5) A. J. Hultgren, Paul's Letter to the Romans: A Commentary (Grand Rapids, Michigan: Cambridge, U.K., 2011), 539.
(미주 6) Moo, NICNT 로마서,1190.
(미주 7) 박익수, 로마서 주석 II: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복음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8), 386-387.
(미주 8) Dunn, 바울신학, 730.
(미주 9) Ibid., 732.
(미주 10) R. B. Hays, Echoes o f Scripture in the Letters of Paul (New Haven: Yale Univ. Press, 1989), 158-159.
(미주 11) 정승우, “파트론/클라이언트 모델(Patron/Client model)로 살펴본 로마 공동체와 바울의 사회적 관계”, 로마서의 예수와 바울(서울: 이레서원,2008), 43-67.
(미주 12) H. Jewett, Roman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7), 907.
(미주 13) 차정식, 로마서 II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1), 430.
(미주 14) Ibid., 431.
(미주 15) P. J. Achtemeier, 로마서,김도현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9), 328.
(미주 16) Moo, NICNT 로마서, 1190.
(미주 17) Käsemann, 로마서, 635; Jewett, Romans, 907; Huitgren, Paul’s Letter to the Homans, 541.
(미주 18) T. Holland, 바울신학개요, 박문재 역 (고양: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5), 39.
(미주 19) C. Westerraann, 이사야 III, 번역실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484-486. 베스터만은 사66:21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이것은 엄격하게 신앙을 고수하였던 사 람들로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엄청난 진술이다. 즉 이방인들이 족보에 의해 정당화되고 보증을 받는 핵심 사제 그룹 안으로 밀고 들어오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방민족들의 미래에 대한 이 말에 한계를 긋는 첨가문이 덧붙여졌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미주 20) Huitgren, Paul's Letter to the Romans, 541-542.

김재현 교수(계명대)  verticalk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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