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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으로부터의 탈피개인이라는 정체성의 환상
김인(감리교신학대학) | 승인 2019.01.17 19:37

역설적으로 인간은 행복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부터 불행해졌다. 과거 수렵사회에는 행복이란 경험이 없었을 것이다. 그저 생존과 죽음 단 두 가지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경사회 이후 즉 계급이 나뉜 이후 ‘인간은 즐긴다’라는 것을 인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즐기는 것 = 행복”이라는 공식이 나타났고 이는 “타인이 나를 우러러 보는 것 = 행복”이라는 노골적인 것으로 넘어간다.

환상을 깰 수 있는 감정

이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간단하게 또 예를 사용하면 어떤 학생은 다른 사람들이 명문대에 입학한 것을 부러워하며 자신을 칭찬할 때(우러러 볼 때) 충족감을 느낀다. 부모가 자신을 같은 이유로 자랑스럽게 여길 때 또한 동일하다. 부모 또한 내 자식이 명문대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그렇지 못한 부모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것이다.

돈과 관련된 재력 또한 마찬가지로 동작한다. 우러러보는 타인을 인식한 후에야 우월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고급 스포츠카와 수 백 만원의 명품가방이 이 우월감을 상징한다. 생활적으로 보면 전혀 필요 없는 이 물건들을 고이 모시는 까닭은 타인에게 이것을 보일 때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이며 자신이 부정하여도 그 내면에는 인정욕구가 분명히 있다.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가고 우월감을 표출하기 좋은 곳을 하나 고르라면 그곳은 분명 마니아들이 모인 곳이다. 음악과 관련된 예를 든다면 그들은 수 천 만원 상당의 자신의 오디오 시스템이나 기타를 올린 뒤 이렇게 글을 올린다. “소소한 저의 시스템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이런 반응이 올라간다. 타인들은 부러움을 표현하며 “저게 소소하다고요?” 또는 “와 대단하시네요.” 같은 감탄을 표현하고 글을 올린 사람은 이렇게 답한다. 그들의 반응을 보며 “ㅠㅠ” 같은 모순적 감정표현을 붙이며 “아직 멀었습니다” 와 같은 가식적 말을 올리며 즐거워하는 줄 모르면서 즐거워한다. 자신들이 이곳에 온 좋아한다는 것의 근본을 잃은 채로 말이다.

▲ 우울증을 묘사한 일러스트 ⓒGetty Image

이들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예들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스스로 오디오와 소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들은 소리 그 너머의 가격을 지불하며 오디오를 구입하고 자신의 잔고를 “텅장”(잔액이 없는 통장을 가리키는 은어)이라 모순적으로 부르면서도 ‘나는 이만한 재력을 가지고 있다’라고 과시하는 것을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한 채 과시하면서 “ㅠㅠ”라는 부호 뒤에 숨어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이제 음악을 좋아했던 성장하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내 값비싼 장비를 타인에게 보이고자 하는 자들만이 존재한다.

그럼 이들은 또한 결국 타인이라는 지옥 속에 갇힌 존재들인가? 이들은 즐기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들은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상태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어느 순간 부끄러움을 느끼며 모든 허울이라 여기는 것 들을 청산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시 찾아가는 사람들의 글을 커뮤니티에서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겪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느끼는 감정이 있다. 그 감정은 바로 수치심이다. 그 수치심은 타인들로 인해 느끼는 것이 아니다. 남들에게 과시하려 자신의 재력을 낭비한 자신에게 수치를 느낀다. 이들은 왜 수치를 느낀 것일까? 그 누구도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간혹 이건 과하다 한 사람이 있더라도 그들은 그저 그를 자신을 질투하는 사람이라 여기며 자신의 재력의 우월감을 과시했을 것이다. 이들은 왜 스스로에게 수치심을 느꼈는가?

감정 그리고 수치심 이라는 스위치

사람의 감정은 가장 위험한 무기이면서 스스로를 죽이는 자살의 가장 큰 위험이기도 하다. 감정을 가장 잘 무기로 활용하는 예는 바로 “집단 조증이다.” 과거 유럽의 야만족이라 불린 켈트의 전사들을 보면 이들은 전투에 임할 당시 모든 웃을 벗고 알몸인 채로 칼과 방패만을 들고 적진으로 소리를 지르며 돌진했다. 이 행위에 주변 켈트인 들이 동조를 느끼고 자신도 옷을 던지고 함께 소리를 지르며 돌진한다. 승리를 확신하며 모두가 함께 소리를 지르는 것에 대한 것에서 희열을 느끼며 돌진하는 그들은 그 순간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이제 로마군의 입장에서 보자. 자신들은 무장도 훈련도 완벽하지만 그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집단 조증이 보여주는 광기이다. 로마군은 켈트족으로부터 그들의 광기를 느낀다. 그리고 그 광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다. 정상을 유지하던 그들의 감정은 집단 조증에 빠진 켈트족에게서 비정상적인 것을 느끼고 두려움을 가진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이런 용맹하고 대의를 가진 집단행동은 이런 광기를 동반한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앞장 선 독일인들과 관동 대지진에 집단 광기의 화살을 조선인들에게 돌린 이들의 사례 또한 해당될 것이다. 현대의 클럽 EDM과 같은 사람들을 흥분시켜 집단 트랜스 상태에 빠지는 것들 또한 다르지 않다.

감정의 힘은 이토록 강력하다. 이성을 흐리게 하는 유일한 인간의 단점이면서도 인간 집단을 결속 시키는 필수 불가결한 장치이기도 하다. 그럼 이 감정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집단에게 있어 그 영향은 한순간에 스위치로 작동한다. 그리고 일이 끝난 뒤에 빠르게 꺼진다. 하지만 개인에게 있어 감정은 천천히 이성을 잠식하는 퍼져나가는 독과 같이 작용하기도 한다. 이 독과 같은 감정은 정체성을 형성하고자 하는 인간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가?

간단하게 말해 우울에 다가선 사람은 대부분 지속적인 부정적 감정이나 큰 슬픔을 당할 경우 빠르게 우울 속으로 침식된다. 그리고 이 감정은 온전한 이성을 흔든다. 흔히 남성이 훈련소 문 앞을 들어서기 전 이렇게도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하늘이 노랗게 보인다.”란 표현이다 이 상태의 사람은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만 보일 것이다. 또 하나의 예화를 만들어보자.

한 청년이 군대에 징집되어 신병훈련소로 들어갔다. 이후 들어선 모든 것은 낮 선 것들처럼 보인다. 마치 잡아먹힐 것만 같은 공기가 나를 억누르는 것 같은 감정을 느끼고 저 멀리 서있는 교장과 조교는 나를 죽일 악마와 지옥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이 때 이 청년은 강렬한 우울 증세를 보인다. 강한 우울은 사람을 슬프게 만들지 않고 무기력하고 두려움에 감싸이게 한다. 이 경우는 가장 예를 들기 쉬운 경우다. 대부분의 남성은 이 시기에 많은 우울함을 느낀다. (물론 어느 경우 예외는 존재한다.) 우울을 느끼는 이들은 부정의 연쇄로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해 평소와 다른 이상행동을 보이거나 사회 속과 다른 모습들을 보이며 적응을 힘들어한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라는 의문을 가진다. 군대속의 자신과 사회속의 자신의 동일화에 어려움을 느끼며 스스로를 무의식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이때의 감정은 판단력을 앗아간다. 그리고 자신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수치심이 아닌 절망을 느낀다.

하지만 이 예를 조금 더 미래로 옮겨보자 이 사람은 무사히 군대를 제대해 다시 사회 속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예비군이 되어 그 때의 동기들과 함께 다시 그 부대 속으로 돌아간다. 분명 같은 “나“ 이며 같은 장소이지만 다른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과거에 이곳을 두려워했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부끄러워하며 수치심을 느낀다.

또한 자신을 지우려는 듯이 더 당당하게 행동한다. 이제 이곳은 더 이상 두려움을 주는 곳이 아니다. 그저 그 때를 즐겁게 추억하며 동기들과 며칠 밤을 지새울 수 있는 이야기 거리를 만든 곳이고 아주 편하게 잠자리를 들고 편한 마음으로 부대 안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당당하게 그곳의 현역들에게 말을 붙이면서 더 허세를 붙여서 이야기를 할 것이다. 두려워했던 조교는 귀여워 보이고 무서운 부사관 들은 그저 동네 형이 된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같은 장소 같은 인간이 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은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환경은 타자가 조성한 환경이다. 여기서의 타자는 완전한 타인이다. 하지만 그 개인 본인이기도 하며 군대에 대해 불안함을 불러오는 이야기를 했던 주변 사람들 그리고 실제로 두려움의 대상인 조교 선임, 간부들 그리고 불안함을 더 심화 시키는 같이 무서워하는 신병 때의 동료들에게서 켈트족의 집단 조증인 광기와 비슷한 패배를 직감하고 자포자기 하며 도망가는 군대의 집단 불안(또는 우울증)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환경은 개체에게 영향을 준다 하지만 개체는 분명 환경에게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찌 되었든 완벽하게 같은 환경은 아니지만 그 환경에서 우울을 느끼는 것도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개인이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 상태를 결정하는 것도 개인이다 그러나 이들은 감정이라는 창을 통해서만 타자와 그 환경을 바라본다. 감정이 렌즈라면 환경은 그 도수를 조절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환경이라는 것이 타인의 욕망을 비추게 만드는 것이며 개인의 정체성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작용하는 것이 수치심이다. 수치심은 개인의 렌즈를 흐리게 하는 환경의 도수를 낮추는 도구이다. 만일 저 상황에서 수치심을 느낀 개인이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전과 같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의외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부족함을 느낄 때는 타인과의 경쟁에서 패할 때가 아닌 스스로의 능력의 한계를 직접적으로 깨달을 때에 온다. 언어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 막상 해외에 나가서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려 했을 때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을 때에 오는 수치심은 그 사람에게서 “언어를 잘 사용하는 나”를 벗겨낸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안 뒤에 다시금 그 감정을 다시 바라보게 하여 자신의 부족함을 찾는다.

이것은 위의 마니아 에게도 동일하게 작동하는 도구이다. 스스로 음악을 좋아한다고 여긴 이 마니아는 어느 순간 자신의 장비들을 보며 자신이 추구하려 했던 것들이 다른 길로 왔음을 깨닫고 자신의 모습을 보며 수치심을 느낀 것이다. 그 순간에야 자신이 쌓아놓은 장비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다른 취미에 접근할 때도 다시금 이것을 교훈 삼아 다른 방법으로 접근할 것이다.

수치심은 감정적으로 보면 우울에 속한다. 스스로를 볼 품 없이 느끼거나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감정이다. 하지만 이는 우울이란 감정이 인간에게 있어 필요한 감정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물론 동시에 부정의 연쇄에 빠지게도 하는 감정임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저 청년이 기억을 그대로 가진 채로 과거에 돌아가 다시 신병으로 훈련교장에 들어간다면 그는 짜증이외에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수치심은 사람의 감정을 바라보는 높이를 바꾼다.

우울증의 이면

수치심이 극도에 달한 경우 강한 우울증을 느끼게 한다. 이에 대해서 재미난 연구가 하나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우울증을 부정적인 요소로 여긴다. 그리고 우울증에 빠지지 않으려고 갖은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 연구는 오히려 우울증은 인간이 사는데 있어 필요한 요소 중 하나도 여긴다. 폴 앤드류와 앤더슨 톰슨이란 학자는 Psychological Review에 한 논문을 게재하였다. 그 내용은 우울증은 정신질환이 아니라 수 십 만년 동안 인간의 생존을 도와온 환경의 적응을 위한 매커니즘이라는 것이다.

위의 예에서 말하지 않은 과정이 있다. 그것은 저 병사는 신병과 이등병 때 극한의 우울증은 느꼈지만 아마 상병과 병장에 와서는 그 강도가 약해지거나 없었을 것이다. 이 이유 중 하나가 초기에 우울증을 겪었기 때문이며 사회 초년생들도 같은 것을 겪을 것이다. 장기 여행을 처음 홀로 나간 사람들이 일정의 절반 정도가 지난 후에야 풍경이 제대로 보인다는 이야기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울증은 자기 방어의 기재중 하나라는 것이다. 인간이 우울증을 느꼈다는 것은 스스로의 한계를 느낄 환경이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는 우울증을 동반하게 한다. 우울증의 대표적 증상은 간단히 말해 욕구가 감퇴한다. 식욕 성욕이 감퇴하고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있길 원하는 이 상태는 외부의 자극을 최소화해 복잡한 환경이 준 문제를 해결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것에 있다.

실제로 우울증에 빠졌다가 무사히 해결하고 나온 사람들이 보이는 것은 그 환경 속에 다시 가는 것을 전보다는 덜 두려워 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런 우울증 상태에서 복용하는 약은 오히려 이 상태를 조금 더 조절시키면서 문제 해결에 집중하게 한다. 하지만 사회 구조의 분위기는 우울증이나 조울증을 질병으로 분류해 버리고 이들을 정신질환자 즉 잠재적 폭탄과 같은 존재로 낙인이 찍힐 두려움을 가지기 때문에 우울증 환자의 80%는 스스로 병원에 가기를 거부한다는 조사 또한 함께 나와 있다.

이로서 우울증은 자기 방어적인 기능에서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질병이 되어버렸다. 과거의 사람들은 종교라는 거대한 진정제가 있었다. 신은 죄인을 용서하고 사람을 선하게 만든다. 신을 따르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수양하고 진정시켰다.

하지만 현대의 사람들은 진정제가 없다. 그렇기에 이들은 오히려 그 진정제를 광기적인 면모 속에서 찾는다. 이들에게 신은 자신을 보호하고 내 뜻을 이루어줄 구세주이다. 새벽마다 가서 기도하는 그들의 기도 속에 과연 신의 위대함을 높이고 나와 신의 관계를 생각하며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 내 사업의 번창을 바라는 마음보다 크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는 사회적 욕망을 자신과 동일시해 이를 이루어줄 신에게 기도하며 안정제와 비슷한 작용을 얻는 과거와 비슷한 자신만의 처방이다.

아이돌들을 종교같이 따르는 자들의 심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멋있고 아름답다. 사회가 그리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면서 안정을 얻는다. 그러나 이 표상들은 개인을 더 초라하게 느끼게 한다. 그들과의 비교 속에서 강해지는 우울과 함께 말이다.

김인(감리교신학대학)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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