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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과 하늘나라는 상관이 없다보물을 쌓는 법(마 6:19-21)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2.17 18:27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저희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셨는지, 교회의 이야기 이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삶과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지난 두 주간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서 오늘의 말씀을 시작했으면 합니다. 우선 누가복음을 통해 팔복의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팔복은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복의 선포가 아니라, 누군가를 돕는 삶을 살다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함으로써 가난한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을 향한 복의 선포이고, 반대로 남을 돕기는커녕 자신의 재산을 쌓기 위해 빼앗고 착취하는 폭력적인 사람들에 대한 슬픔의 선포였습니다.

지난주에 함께 나눴던 말씀은 주기도문이었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과 용서의 이야기가 함께 나타남을 보았고, ‘죄의 용서’는 본래 빚을 탕감한다는 표현으로 말씀하셨음을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날마다 누리는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된 빚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탕감해주셨으며, 우리도 하나님과 같이 행할 것을 명하셨다는 점을 봤습니다.

제가 이번에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딱히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연결시키지는 않고 있습니다. 솔직히 너무 길어져서 안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잠깐 연결되는 이야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까지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왜 도와야 합니까? 그것이 주기도문에 나타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내어주셨고, 이를 무상으로 제공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러한 일을 해야만 합니다.

이 말씀을 제가 올해 처음에 드렸던 말씀과 연결시켜보셨으면 합니다. 달란트 비유의 이야기를 드리면서 종이 맡은 돈은 종의 돈이 아니라 맡아둔 돈이라는 이야기를 드렸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맡아둔 사람들이고 이 복은 다른 이들을 향해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결국에는 다 하나로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일용할 양식의 빚이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두신 복이며, 나 혼자서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베풀라고 내려주신 양식이기도 합니다. 이런 말씀의 흐름을 잘 기억하시면서 오늘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이 의미가 조금 더 확장됩니다.

마태복음의 구성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태복음 6장과 누가복음 12장에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오늘 본문 뒤에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씀이 나오고,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이 나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반면에 누가복음 12장에서는 ‘무엇을 먹을까...’ 말씀이 먼저 나오고, 그 뒤에 오늘 본문이 나타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5장에 나왔던 ‘소금과 빛’의 말씀과 결합되어 11장에 나오고,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은 16장에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뒤에 나타납니다.

▲ 헌금을 많이 하면 하늘곳간에 복이 쌓인다는 생각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 ⓒGetty Image

동일한 본문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서로 다른 곳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이 말씀들이 마태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 순간에 선포된 말씀이 아님을 알게 해 줍니다. 아마도 마태복음의 저자 또는 저작집단은 재물과 관련된 여러 말씀을 하나로 묶어서 예수님께서 한 번에 선포하신 것처럼 이야기를 만들어 놓았지만, 사실은 각각 개별적으로 선포되었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고 있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시기와 장소에서 말씀을 전하셨다 하더라도, 그 본질적인 의미는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마태복음은 거의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들을 하나로 묶어서 우리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좋을 듯 합니다.

어쩌면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말씀 묶음들이 본래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에 더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각각의 말씀들과 조금 더 어울리는 다른 본문이 함께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예수님께서 하고자 하셨던 말씀의 의미는 마태복음을 통해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상수훈은 분명 마태복음 공동체의 구성원을 향한 규범이며 모범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산상수훈에는 마태복음 공동체의 색이 진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전체적인 맥락이나 흐름은 예수님이 본래 전하고자 하셨던 말씀과 약간 달라진 점도 없잖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산상수훈은 특정한 주제와 의미에 따라 선포된 말씀들을 묶어놓았다는 데에서 큰 의의가 있고,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봅니다.

상하지 않는 보물 창고

오늘 말씀은 분명 재물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이 땅에서 재물을 모으는데 열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보물’이라는 단어는 조금 이질감이 들기 때문에 ‘재물’이라는 표현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본래 헬라어 ‘테사우로스(θησαυρός)’가 보물이라는 뜻이 맞긴 합니다만, 동시에 ‘곳간’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결국 ‘재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이를 ‘재물’이라고 번역해놓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헬라어 ‘쎄스(σής)’가 우리말에는 좀 벌레로 번역되어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그냥 벌레이고, 옷을 갉아먹는 벌레로 쓰인 걸로 보입니다. 그런데 좀 벌레가 재물 자체를 갉아먹지는 않습니다. 재물이 곡식이라고 해도 좀 벌레가 먹지 않고, 당시에는 종이 화폐가 아니었으니까 동전으로 된 돈을 먹을 일도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누가복음의 본문을 참고하면 조금 쉽게 이해가 됩니다. 누가복음은 ‘낡지 않는 배낭’, ‘돈주머니(발란티온 βαλλάντιον)’를 준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돈주머니는 천이기 때문에 좀 벌레가 갉아먹다보면 구멍이 생기고 돈이 떨어지게 됩니다.

아마 원래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은 ‘돈주머니’가 맞을 것이고, 이를 마태복음이 ‘곳간’의 개념으로 확대시켰다고 봅니다. 그러면서도 좀 벌레는 그대로 가져왔고, 누가에서는 ‘도둑이 다가가지 못한다’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도둑이 구멍을 뚫지 못한다’로 바꿔서 주머니의 이미지를 곳간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사실 돈주머니든 곳간이든 금고이든 큰 차이는 없습니다. 땅에 재물을 쌓아두면, 벌레가 들어서 상할 수도 있고, 도둑이 들어서 다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 자체는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의미 자체도 명확합니다. 그렇기에 벌레가 생기지 않고 도둑이 없는 곳에 재물을 쌓으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이 본문은 절대로 교회에 헌금 많이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에 내는 헌금도 돈이고, 그 돈도 결국 땅에 쌓이는 돈 아닙니까? 교회는 무슨 하나님 보호막이 쳐져서 좀 벌레도 안생기고 도둑도 안듭니까? 하늘에 쌓는 보물은 결코 헌금 이야기는 아닙니다.

보물을 쌓는 법

우리는 헌금을 많이 내야 하늘나라 곳간에 보물이 쌓인다는 그런 생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하늘에 쌓는 재물이 상함이 없다는 이야기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다면, 천국에 대한 신앙이 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재물은 어떻게 쌓아야 합니까? 헌금이 그 방법이 아니라면 어떤 방법으로 재물을 쌓아야 합니까?

누가복음의 경우 이를 명확하게 먼저 제시합니다. 누가복음 12장 33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누가복음의 방식입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 구제하는 일이 누가복음의 공동체가 장려하고 있는 신앙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 자체에는 이런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위로 올려서 6장 1절을 보면 그 방법이 이미 나와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6장 1절은 ‘의(디카이오쉬네 δικαιοσύνη)’를 행할 때, 사람 앞에 보이려고 행하지 말라는 경고로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의를 행하는 행위’ 세 가지가 나타납니다. 2절에 ‘구제’, 5절에 ‘기도’, 16절에 ‘금식’입니다. 마태복음 6장의 맥락에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방법은 이 세 가지 의로운 행동에 있습니다. 이를 남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목적과 의미에 맞게 행동하는 일입니다.

누가복음을 읽다보면 구제 행위를 신앙의 최우선 행위로 꼽고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조금 다릅니다. 구제가 중요하긴 하지만, 최우선 행위는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의로운 행위 중 하나에 속할 뿐입니다.

또한 마태복음도 분명히 누가복음과 마찬가지로 금전적으로 베푸는 방식, 자신의 재산을 남에게 주는 방식의 구제를 이야기합니다. 구제(엘레에모쉬네 ἐλεημοσύνη)라는 단어 자체가 그런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만 누가복음처럼 극단적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이 모아놓은 예수님의 말씀들 속에서 ‘구제’, ‘남을 돕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는지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들은 결국 재물로 연결되어서 재물에 연연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만약 마태복음 6장에 나타난 재물과 관련된 말씀들이 한 순간에 선포된 말씀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나누어 선포된 말씀이라면, 예수님께서는 내 재산 축적에 열중하지 말고 남을 도우며 살라는 말씀을 끊임없이 하셨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구제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예수님께서 재물을 하늘에 쌓는 방법으로 제시하신 방법은 구제, 남을 돕는 일이라고 봅니다.

예수님 말씀의 의미

여기에서 다시 지난주의 말씀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내가 지금 가진 것은 하나님께 빚진 것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놓으신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이 빚은 탕감됩니다.

주기도문, 6장 12절은 어떻게 말합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을 탕감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시고.’ 우리가 남에게 탕감하는 행위, 바꿔 말해 ‘구제 행위’를 하였을 때, 우리의 빚도 탕감됩니다. 성경에 ‘구제’라고 되어 있으니까 자꾸 ‘구제’라는 말을 쓰게 되는데, 쉽게 ‘남을 돕는 일’이라고 바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린 적 있는데, 예전에 대학원에서 교회사 교수님이신 나현기 교수님이 캐나다 교회에서의 일화를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세계 곳곳에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를 물어보면, 아이들이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돈을 모아서 기부해요”

기부는 참 귀한 행동이지만, 어쩌면 돈으로 모든 일을 해결한다는 생각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 같아서 약간 안타까움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꼭 ‘어려운 사람에게 돈을 주는 일’에만 국한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현실에서 생각해보자면, 힘든 일이 있는 사람들은 항상 신호를 보낸다고 합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줘’라는 신호를 보낸다고 합니다. 군대 가면 자살 예방 교육을 종종 받게 되는데, 자살하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자살을 실행하기 전에 자신의 자살을 막아달라는 신호를 주변 사람들에게 보낸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를 담고 제작된 공익광고도 있었습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예시가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에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 분명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게 됩니다. 도와달라는 신호, 때로는 그저 내 얘기를 들어달라는 신호를 보냅니다. 아이가 다쳐서 우는 것도 아파서 우는 이유도 있지만, 자기가 다쳤으니까 봐달라는 이유도 있습니다.

애를 키우면서 느끼는거지만, 애가 제 앞에서 넘어지던 어딘가에 부딪히건 상당히 아플거 같은데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반면에 혼자 있다가 다치면 별로 안아픈거 같은데도 제 앞에 와서 울고불고 난리를 칠 때도 있습니다. 이때 아이가 우는 건 다쳤으니까 봐달라는 신호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신호를 깨닫고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그보다 앞서 누군가가 보내는 신호를 깨닫기 위해서 미리 신경써주는 그 노력, 그 모든게 ‘남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짧더라도 그 대화 한 번을 통해서, 신호를 보낸 사람에게 건낸 단 한 마디의 말을 통해서, 누군가는 위안을 얻고 다시 힘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과 대화하려고 노력하라는건 아닙니다. 맡겨주신 달란트의 액수가 다르듯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도움의 방식도 분명 다릅니다.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들어주면 되고, 행동으로 도울 수 있는 사람은 행동하면 되고, 조언할 수 있는 사람은 조언하면 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과 역할로 도움을 주시라는 이야기입니다.

누군가를 도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일을 통해 망가지지 않는 창고에 재물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내주신 것들을 올바르게 사용하심으로써 하나님께 빚을 탕감 받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 이 음성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그 은혜를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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