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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생일>: 세월호 이후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잔잔한 응답정의로운 기억과 보존의 망각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9.04.08 18:53

“We all lie. Play with a mask to hide the truth
(모두 거짓말을 해. 진실을 숨기려 가면을 쓰지).”
- 하진, ‘We all lie’

세월호 이후를 다룬 두 영화가 있습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안겨준 집단적 트라우마에 대해 상업 영화로 다루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논쟁이 있는데, 이러한 논쟁은 그만큼 그 사고에 대한 정부의 대처가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지 않으면 잊혀지고, 잊혀지면 사건은 거짓이라는 ‘완벽한 대체물’로 전환되거나(한나 아렌트), 철학자 자크 데리다에 따르면 사건 그 자체의 원본을 파괴해 버리기 때문에 악착같이 기억하고 반복해서 상기하여, 거짓과 왜곡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반민특위(1)를 ‘반문특위’라는 말장난으로 넘어가는 정치인이나, 광주 5·18민주화 운동 때, “시민군 가운데 간첩이 있었다.”라는 주장은 모두 진실을 거짓으로 대처하거나, 혹은 진실 자체를 파괴해버리는 행위입니다. 아직도 정확한 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지 않은 세월호 사건입니다. 따라서 힘들더라도 두 영화는 보아야 합니다(이 글은 영화관에서 꼭 보시라고, 스포일러가 없습니다).

1. 아이들이 막다른 골목을 향해 폭주하고 있다

이상의 오감도(烏瞰圖)라는 시가 있습니다.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시인데, 원래 30편을 계획했으나 “내용을 알 수가 없다.”라는 독자들의 항의로 15편 만에 중단됩니다. 현재 한국 난해시의 최고봉으로, 지금까지도 아무도 정확하게 뜻을 해석한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이 시가 해석이 가능하기는 한지, 아니, 애당초 뜻이 있기는 한지조차 의심이 갈 정도로 난해한 작품입니다. 첫 작품인 ‘시제1호’ 전문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 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공중에 떠 있는 까마귀(烏)의 시각을 빌려 인간이 인간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길 수밖에 없게 된 인간 사회의 비리와 모순을 지적하는데 있다(권영민)”, “열세 명의 아이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타자에 대한 극대화된 적대감이기 때문에 이, 시는 완전히 개체화된 인간들이 타자에게서 동질감을 전혀 발견할 수 없음으로 해서 발생하는 공포감과 연결된 근대인의 불안이다(조해옥)”, “희곡적 형식을 통해 독자의 공포를 유발하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식민지 거리의 공포라는 테마가 그에 걸맞는 반복 강박적 형식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신형철).”

당시 혹독한 일제강점기(1910년 8월 29일~1945년 8월 15일) 기간에 쓰여진 시이기에 ‘인간 사회의 비리와 모순’이나 ‘타자에 대한 극대화된 적대감으로서 근대인의 불안’은 보편적 해석입니다. 따라서 신형철의 ‘식민지 거리의 공포’가 이 시의 실체적 배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서재경 목사의 해석은 타당합니다.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현실을 보여주는 시입니다. 여기 십삼인의 아이(아해)가 나오지요. 13이라는 수는 불완전한 수입니다. 불안하고 두려운 수지요. 이 아이들이 막다른 골목을 향해 질주합니다. 폭주하는 무서운 아이들입니다. 이렇게 무서운 아이들, 아니, 무서워서 떠는 열세 명의 아이들의 모습에서, 막다른 골목 같은 시대의 절망이 절절하게 드러납니다. 시대가 아프면 누구보다 먼저 아이들이 아파합니다. 아이들의 막가는 폭주는 병들고 절망하는 시대의 막바지 진통입니다.” (서재경, ‘산을 옮기는 믿음’, 『말씀과 삶』 4월 7일,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교육원, 2019.)

2. 세월호 이후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이들이 죽는 세상은 절망적인 세상입니다. 또한 죽어가는 아이들을 구하지 못하는 시스템은 고장난 시스템입니다. 영화 <생일>보다 먼저 개봉된 <악질경찰>에서 저는 이렇게 논평했습니다.

“이정범 감독의 <악질경찰>(2019)은 세월호 이후에도 어린 학생이 죽고, 또 변하지 않는 사회와 어른들을 보여주고, 어른인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영화이다. (중략) 강자가 약자를, 어른들이 아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침몰하고 있는 세월호는 지금도 여전하다. 세월호 이후 상처를 안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아이들과, 그럼에도 여전히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동시에 담고 있는 영화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8684)

논평의 제목은 「영화 <악질경찰>, 세월호 이후에 ‘악질’도 이렇게는 하는데, 당신은?」입니다. 따라서 악질경찰인 주인공 조필호(이선균 분)도 세월호 이후에 이렇게(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재벌 총수를 총으로 쏴 죽이는 것입니다. 왜 정치권력자가 아니라, 재벌총수인지는 저의 글에 잘 나와 있습니다.)라도 하는데,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 <생일>은 그에 대한 답을 우리들에게 들려줍니다. 다행히 총도 아니고, 재벌총수를 죽이는 것도 아닙니다.

자, 그럼 “세월호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영화를 본 후, 저는 세월호 이후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래와 같이 일곱 가지로 적어 보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영화에 나오는 것입니다. 보신분들은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1. 우는 사람 안아 주기
2. 아픈 사람에게 약을 주고, 대신 빨래하고, 밥해주기
3. 바람이 강한 태풍이 불 때, 그냥 아무생각 없이 함께 걸어주기
4. 돈 갖고 장난치지 않기, 죄송하다고 말하기!
5. 희생자가 하고 싶었던 것 하기: 알바하기, 여행가기
6. 기억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생일을 기념하기
7. 영혼이 있음을 믿기(그리고 심판도!)”

3. 벤야민의 기억투쟁과 <생일> 마지막 롱테이크 30분

발터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일명: ‘역사철학테제’)』 (길, 200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적들은 나날이 승리하고 있다. ‘지배계급의 도구가 되어 버린 전통’으로부터 ‘새로운 전통’을 빼앗지 못한다면, 과거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점화해 내지 못한다면 현재의 우리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자들도 안전해지지 못한다.”

따라서 벤야민은 ‘비상사태(state of emergency)’ 속에 있는 대중과 군중을 ‘역사의 주체’로 깨우고자 합니다. 비상사태란 말 그대로 국가적 위기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상사태는 헌법의 권한을 무효화 시킵니다. 가령,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국가에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국민의 주권과 권력은 제한됩니다. 그럼 이 비상사태는 누가 결정할까요?

벤야민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잊고 있을 뿐, 역사적으로 억압이 있었던 모든 시대에는 항상 비상사태가 있었다.” 비상사태는 지배자들이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현재는 노예제 사회보다, 봉건제보다는 좋아졌습니다. 5년에 한 번씩 선거를 통해 대통령도 직접 선출하기에 과거보다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현재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로서, 소비시대의 소비자로서, 지배 계급의 도구가 되어 버린 전통 속에서 수동적인 피지배계급에 불과한 비상사태의 상황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그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벤야민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이 비상사태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에 대한 활동을 개시할 수 있다. 그 때 우리는 구원자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화면이 카메라 작동이나 필름 편집에 의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롱테이크(Long take) 촬영으로 30분 정도 생일 파티가 열립니다. 물론 여러 대의 카메라가 있었기에 컷은 나눠집니다. 참고로 6.25 전쟁으로 이념대결과 미군에게 줄서야 했던 피폐해진 당시 상황을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시절로 멋지게 그려낸 이광모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시절>(1998)의 대부분도 롱 테이크 기법으로 되어있고 습니다.

그리고 바하의 마태 수난곡과 아름답고 시적인 화면,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를 통해 영화를 시와 철학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희생>(1986)의 첫 장면도 유명한 롱테이크입니다. 아무튼 <생일>이 마지막 30분은 구원자를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희생자들이 희생자를 기억하며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경험입니다. 그 제의에 참석해야 합니다.

4. 상속권과 회상의 정치

그리고 그 경험을 만드는 것이 바로 ‘상속권’입니다. 벤야민은 ‘전통’을 통해 ‘상속권’을 이야기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상속권은 “어떤 재산에 대한 나의 권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벤야민은 기존의 역사에서 이러한 상속의 의미를 찾습니다. 즉, 기존의 역사는 나의 상속권을 지배계급이 박탈해 간 역사라고 봅니다. 따라서 박탈당한 상속권을 요청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있는데, 이것을 ‘전통’이라고 합니다. 곧 적법한 상속자들이 상속권을 박탈당했는데, 적법하지 못한 이들이 스스로를 적법자라고 주장하면서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배의 모습이 앞서 언급한 ‘비상사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당시 박근혜 정부와 황교안 전 총리는 비상사태를 선포하려고 했었죠?

벤야민은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역사의 주인이냐?” 벤야민은 지금의 역사는 서자(庶子)인 것이 적자(嫡子)라고 주장을 하고 있는 역사라고 비판합니다(왕자와 거지 동화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따라서 역사를 다시 기술하는 벤야민의 전략은 상속권을 다시금 피지배 계급에게 찾아 주려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상속권을 되찾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벤야민은 ‘과거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점화해 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인데, 곧, ‘회상(Eingedenken)의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폐허가 된 과거의 이미지로부터 희미한 메시아적 힘을 읽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곧 있으면 기독교의 부활절이 다가옵니다. 예루살렘 사제 권력과 로마 제국에 의해 죽임당한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을 보았던 제자들은 바로 이러한 회상의 정치가 회상의 신앙으로 육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회상하고, 과거를 생각하는 것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주려고 하는 노력입니다. 과거로 들어가서, 상속권을 박탈당하고 고통당한 사람들, 죽은 사람들의 소리를 현재에 있는 우리가 듣고, 해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과거의 그들의 상속권도 되찾고, 동시에 지금 나의 상속권도 되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5. 거짓말의 역사와 용서

최근 번역된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거짓말의 역사』 (이숲, 2019)는 1997년 4월 파리 국제철학학교 강연을 묶은 책입니다. 그리고 『용서하다』 (이숲, 2019)는 데리다가 1997~1999년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행한 강연의 축약본입니다. 먼저 『거짓말의 역사』 에서 데리다는, 거짓말은 상태가 아니라, “거짓말하다.”라는 행위라고 규정합니다. 거짓말은 정박되거나 고인 대상이 아니며 행위로서 이해돼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행위에는 무엇인가를 ‘원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데리다의 말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거짓말은 어떤 사실이나 상태가 아닙니다. 거짓말은 의도적인 행위, 곧 ‘거짓말하기’입니다. (‘정해진’) 거짓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하기’라고 부르는 발언, 그 말하기를 원하는 바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거짓말인가’라고 묻기보다는 ‘거짓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한다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거짓말할 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거짓말하기 좋아한다.”라고 정의한 바가 있습니다. 중세의 교부 어거스틴 역시 타인을 속이려는 의도만이 거짓말의 조건을 형성한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믿는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근대의 루소는 “해를 끼치지 않는 거짓말은 거짓말의 조건을 불충한다.”라고 했으며, 칸트는 “상대를 속인다면 그 자체로 거짓말”이라고 언어의 조건으로 진실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데리다도 인용한, 한나 아렌트는 조작을 통한 거짓말의 자리에, ‘완벽한 대체물’ 개념을 등장시킵니다. 거짓을 생산하는 현대인들이 대상의 이미지를 원하는 형태로 조작하기보다는 절대적인 가짜를 내놓음으로 거짓말은 완벽한 대체물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의 은폐가 아니라, 원본의 파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2014년 9월 세월호 유족들의 광화문 광장 단식 투쟁 자리에,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회원들과 자유대학생연합(자대련) 학생들이 폭식 투쟁을 했던 것은 거짓말이 원본을 파괴하는 완벽한 대체물로 기능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데리다는 아렌트보다 한 걸음 더 나갑니다. 팩드의 대체물이 아니라, 과거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거짓말의 기능을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결국 거짓말의 화살이 겨냥하는 피해자는 언제나 희생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용서하다』에서 데리다는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학자인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의 『용서』 (1967)라는 작품을 분석합니다. 여기서 얀켈레비치는 용서는 ‘무조건적 용서’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용서는 항상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제공하는 순간적이고, 기적적인 ‘선물’과도 같은 사건이다. 이러한 새로움 때문에 용서는 화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데, 화해는 용서를 새롭게 계속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종결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용서는 적용에 있어서 보편성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불가능성이나 한계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용서는 ‘광기어린’ 용서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얀켈레비치는 『우리는 그들을 용서해야 하는가』 (1971)에서는 ‘용서의 죽음’을 선언합니다. 속죄하지 않은 범죄에 대해서는 용서가 있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따라서 이것은 ‘조건적 용서’가 됩니다. 물론 데리다는 이러한 얀켈레비치의 논의가 용서의 의미를 후퇴시켰다고 보고 무조건적인 용서의 의미를 되살리고자 합니다.

따라서 데리다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용서를 구하는 당신이 변하고 그래서 더 이상 동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조건으로 나는 당신을 용서하노라’고 내가 말한다면, 내가 용서하는 것인가?” 그리고는 스스로 “아니오.”라고 대답합니다. 따라서 용서할 수 있는 자를 용서하는 것은 용서하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 어떤 용서인가요? 얀켈레비치의 무저건적 용서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곧, 비즈니스와 같이 주고받는 경제의 논리가 없는 용서만이 참된 용서라는 것입니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는 항상 불가능성의 면전에서 예외적이고 비일상적인 것으로 머물러야 한다.” 이것은 용서가 도구화되는 것에 대한 반대입니다. 왜냐하면 용서가 도구가 될 때, 그것은 정치적 전략의 하나가 되거나, 심리치료적인 경제의 논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데리다의 용서는 ‘무조건성’과 ‘그 어떤 형태의 교회의 논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죄인에 대한 신의 대속적 은총 외에 이러한 무조건적인 용서가 구체적인 현실에서 가능하냐는 것이겠지요?

6. 리꾀르의 정의로운 기억과 능동적 망각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 생활을 겪었던 폴 리꾀르는 데리다와 달리 용서는 결말을 꿈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비탄의 기억을 치유하며 동시에 그것을 끝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리꾀르에게 있어서 희생자의 고통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의 도덕적인 의무가 되고 이를 통해 희생자를 두 번 죽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억의 작용은 앞서 벤야민의 ‘회상의 정치’와 상통합니다.

중요한 것은 리꾀르는 이러한 용서의 사건이 가해자의 ‘잘못’과 피해자의 ‘용서’ 사이의 불균등성에 존재한다고 봅니다. 피해자가 용서할 때 가해자는 과거의 기억을 숙고하고,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리꾀르는 ‘책임수용(imputability)’이라고 합니다. 희생자들에게 빚을 졌다는 의식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책임수용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 아시는 29만원의 그분입니다.)

아무튼 리꾀르는 정의로운 기억과 동시에 ‘능동적 망각’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삭제를 통한 망각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는 ‘보존의 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책임수용을 한 가해자에게만 해당이 되어야 합니다. 리꾀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는 일종의 기억을 치유하는 것, 즉 비탄의 시기를 종결시키는 것이다. 빚의 무게로부터 구원된 기억은 보다 위대한 기획을 향하여 해방된다. 용서는 기억에 미래를 제공한다.”

기억과 비탄의 변증법적 작용에서 용서가 나타난다는 리꾀르의 생각은 영화 마지막 롱테이크 30분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집단적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구원된 기억이 더 위대한 기획을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7.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사실 역사 속에서 패배당한 이들 안에는 ‘복수의 정신’이 오롯이 존재합니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을 소외하고 착취한 이들을 정당하게 증오할 수 있는 당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복수의 정신은 ‘증오’에서 드러납니다. 증오란 정당한 분노입니다. 그것은 미워해야 할 것들에 대해 정당하게 미워할 수 있는 정신이며, 동시에 전통을 탈취하기 위해서 버려야 할 그 무엇인가를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수의 에너지, 그 원천은 과거에 있습니다. 고(故) 김진영 선생은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포스트카드, 2019)에서 벤야민을 해설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한 복수의 에너지가 나오려면 그 원천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미래에 잘 살게 해달라는 자식들의 얼굴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을 떠올린다면 이는 이데올로기적 미래주의가 우리의 삶을 완전히 지배해버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원천은 바로 지난 날 짓밟히면서 살아왔던 우리의 아버지들의 얼굴일 것입니다. 과거의 아버지가 어떻게 짓밟히면서 살아왔는가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약속된 우리의 아이들의 행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들의 빼앗긴 전통을 회복할 때에만 새로운 미래가 만들어질 수 있으며, 새로운 미래 속에서만 나의 아이들이 행복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빼앗겨버린 전통을 되찾지 않고 지금의 전통에 그대로 의존한다면 우리의 아버지들이 실수를 했듯이 우리 자신의 실수에 의해 나의 아이들도 나와 같은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미래의 내 자식들의 얼굴이 아니라, 과거의 우리의 아버지들의 얼굴, 어머니들의 얼굴입니다.”

정당한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감추어진, 고통 받았던 역사를 회상하여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을 되찾아 주는 것이며, 그때 우리의 얼굴도 되찾게 되는 세상입니다. 영화 <생일>은 아이들이 병들고 절망하는 시대의 막바지 진통에 서서, 진실을 숨기려 가면을 쓰는 우리 어른들에게 다시 ‘정의로운 기억’과 ‘보존의 망각’을 통해 고통 받았던, 그리고 감추어졌던, 숨겨진 우리 아이들의 얼굴을 되찾아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습니다.

미주

(미주 1)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제국과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악질적으로 반민족적 행위를 한 자를 조사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서 설치한 특별위원회였으나, 친일 잔존 세력들이 반민특위를 ‘빨갱이 집단’이라고 외치며 특위 해체를 주장하여 출범 6개월 만에 사실상 와해되었으며, 다시 친일파의 세상이 되었다. 2차 대전 후 해방된 모든 나라에서 과거 청산이 이루어졌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좌절됐었는데, 그만큼 친일세력이 강고했던 것이고, 그 유전자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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