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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용정에 불어닥친 사회주의 바람다시 용정에서 보다 (3)
이이소 | 승인 2019.04.24 18:50

러시아 10월 혁명의 승리는 많은 조선 독립투사들과 청년들에게 사회주의에 대한 신뢰와 꿈을 심어주었다. 레닌의 피압박민족의 해방에 대한 관심과 지원 약속은 조선의 독립투사들에게 한 가닥의 희망이 되었다. 이에 고무된 이동휘, 박애, 박진순은 1918년 6월 26일연해주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였고 김철훈, 이성은 또한 1919년 9월 5일에 하바롭스크에서 ❰전러시아 고려공산당❱을 결성하였다.

1917년 소련 볼셰비키 혁명의 여파

이동휘는 레닌의 자금으로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잡지 ❰새벽종❱과 소책자 등을 만들어서 동북지역에 배포를 하였다. 조선인이 집중되어 있는 연변에는 다양한 루트를 통한 신문과 잡지 그리고 여운형이 번역한 ❰공산당선언❱을 비롯하여 ❰노동조합독본❱, ❰레닌❱, ❰우리 무산계급이 나아갈 길❱ 등의 책들이 재빨리 들어 왔다. 공산주의 간행물들이 밀물처럼 들어오자 이를 연구하기 위한 모임들이 속출하였다.

1922년부터 1923년에 이르는 기간에 용정의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의 진보적인 학생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는 비밀 학습단체인 ❰광명회❱를 설립하였다. 은진중학교 학생까지 망라한 30여 명으로 구성된 ❰광명회❱ 학생들은 이인구와 이주화의 지도를 받았다.

1923년 2월 초에 최웅렬, 한상오, 오성륜은 북경의열단원인 김강, 이열과 함께 영안현 영고탑에서 비밀 결사인 ❰적기단❱을 결성하였다. 김사국은 1923년 3월에 조선에서 용정으로 와서❰동양학원❱을 꾸리고 동북의 조선인은 물론 연해주의 조선 청년들까지 받아들여 공산주의 사상을 학습시켰다. 박윤서와 주청송 등이 1923년 9월에 연해주에서 용정으로 와서 동흥중학교의 진보적인 학생들을 담합하여 ❰사회과학연구회❱, ❰학생친목회❱등을 조직하고 과외시간을 이용하여 사회주의를 선전하였다.

▲ 1910년 명동교회 교인들. ⓒ사단법인 통일의 집

상해 공산주의 단체에서 1924년 7월, 장기영, 주건 등을 연변에 파견하여 옹성라자를 중심으로 청년학생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였다. 1924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고 용정에 돌아온 김봉익, 오리근, 주채희 등 공산주의자들이 ❰노동학원❱을 만들어서 노동자들에게 공산주의와 노농혁명사상을 가르쳤으며 ❰노농동맹❱을 창설하였다. 1924년 12월 길림성 반석현에서 김응섭의 발기로 ❰한족노동당❱이 조직되었고 기관지 ❰노동보❱를 통하여 노동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924년 11월 반석현에서 반석일대 11개 단체의 22명 대표가 참석한 회의에서 ❰남만청년총동❱을 창립하였다. 1925년 11월에 ❰북만노력청년동맹❱이 결성되었고, 1926년 12월 봉천성 홍경현에서 ❰남만청년연맹❱조직되었다. 1926년 1월 25일 용정에서 동진청년회 등 20개 단체의 대표 28명이 모여 ❰동만청년총연맹❱을 창립하였다.

1926년 8월에 조선공산당 중앙에서 파견된 조봉암 등이 용정에 조선공산당 동만구역국을 설치하였으며 산하에 9개구와 16개 지부를 건립하였다.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에 4개의 지부가 있었다. 동만구역국의 상부인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1926년 초에 중동선 일면파에서 건립되고 본부는 영고탑에 두었으며 산하에 동만구역국 외에 남만구역국, 북만구역국을 두었다.

1926년 10월에 고려공산청년회 동만도위원회가 창설되었다. 1927년 12월에 용정에서❰전간도조선인단체협의회❱와 ❰동만여자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1927년 10월에 중공만주임시성위가 설립되었고 1928년 5월에 동북조선족의 최초 공산당지부가 용정에서 건립되었고 8월에 중공동만특위가 건립되었다. 

사회주의 사상이 연변조선인 사회를 뒤흔들다

양반상놈의 계급사회에서 숨을 죽이고 살았던 소작농민 출신의 1세대 이주 조선인들과 2세대들은 착취 없는 세상, 평등한 세상과 대중적 투쟁에 대하여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다. 초기 공산주의자들은 연변의 조선족을 사회주의 세계로 인도하였다. 또한 사상을 접한 진보적인 학생과 청년들은 농촌순회 공연을 통하여 농촌 남녀청년들을 조직하여 문화와 사상학습을 시키며 몸소 실천에 앞장을 섰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및 그 산하의 각 구역국과 기층조직들은 동북각지의 조선인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항일혁명사상을 선전하고 민족문화교육을 발전시키는 활동을 추진하였다. 기층 조직인 정치 야학교, 농민조합, 노동조합, 청년단체를 확장하여 동북의 도시와 농촌의 조선인 거주지에서 반제와 반봉건의 불길을 일으켰다. 1928년부터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기 위하여 각파 성원들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에 파견하거나 민족유일당촉성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청년학생들과 조선 농민들을 이끌고 수차례나 항일시위운동을 벌려 일제침략자들에게 타격을 가하고 조선이주민들의 항일투지를 고무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은 거듭 탄압을 받았다. 일제는 1927년 10월, 1928년 9월, 1930년 4월에 걸쳐서 제1차, 제2차, 제3차 공산당검거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의 수백 명 간부와 당원, 군중들을 체포, 감금하여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과 그 기층 조직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생명을 걸고 저항하는 항일유격대와 동북항일연군을 괴멸시키지 못하였다.

망명 지사의 시대의 역사적 의미와 기여

어렵게 긴 글을 쓴 것은 그 시대의 의미를 음미하며 그 시대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찾기 위해서다. 용정의 이주조선인 사회의 흐름과 명암, 망명했던 지사들의 의식과 활동에서 보게 되는 명암이 평화로 가는 길 앞에서 좌절하고 있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사회에 익히 알려진 대부분의 독립투사들의 이 시대에 만주로 망명을 한 지사들이다. 그들이 독립운동사에서의 차지하는 비중과 위치, 이주 조선인 사회에 끼친 영향이 자못 크다. 봉건사회에서 바야흐로 근대정신의 맹아가 싹트고 있는 시대를 살아야 했던 그들이 우리 역사에 남긴 유산이 무엇인지 먼저 긍정적인 부분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망명 지사들의 첫 번째 기여는 조선 이주민들에게 항일민족 의식을 심어준 것이다. 1907년 만주에 진출한 일제는 자기들의 정치적 군사적 침략의 기반을 닦으면서 경제적 약탈을 감행하는 한편 사상문화침략을 강행함으로 식민지강점을 하루 속히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간도조선인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조선인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며 식민지 민족말살정책과 우민화교육을 실시하였다.

일제의 이런 정책에 반대하여 망명 지사들은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신학문을 수용하여 잃어버린 국권을 찾는 일에 전력을 다하였다. 당시 사립학교 설립자나 교사는 다 독립투사였고 애국자로서 긍지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교육과 계몽활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투철한 항일정신을 배양하여 조선인들을 독립투쟁의 길로 이끌었다.

두 번째 기여는 기존의 교육을 혁파하고 신교육의 체계를 정비한 것이다. 조선 500년 동안 서당, 서원, 항교, 학당에서 교육된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사서오경 등 공맹을 공부하며 주자학의 도덕윤리를 가르쳤던 교육체계를 과감히 혁파하고 근대적인 새로운 문화지식으로 교육을 전면적으로 개혁하였다. 새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서 교과목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연길에서는 간민교육회가 산하에 우수한 학자를 초빙하여 사립학교를 위한 교과서를 편찬하였다.

용정, 동변도, 하얼빈에서도 사립학교 교과서가 편찬되었다. 이런 교재는 민족 언어, 민족 문화, 민족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지식을 전수하는 한편 과학, 정치, 수학, 외국어 과목도 중요시 되었으므로 후세대가 세계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특별히 남존여비사회에서 여성교육은 망명 지사들이 이루어낸 교육 혁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세 번째 기여는 전쟁 없이는 독립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사대교린의 외교정책으로 임진전쟁, 정유전쟁, 정묘전쟁, 병자전쟁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유지해온 조선의 사대부들은 국방을 튼튼히 세우기보다는 주변의 큰 나라에 적당히 기대는 사대정책을 선호하였다. 아이가 부모에게 기대듯이 큰 나라에 기대어 나라를 유지하며 권력을 잡으려고 했던 친청파, 친러파, 친일파, 친미파로 얼룩진 대한제국의 역사가 당시 사대부들의 나라의 주권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를 잘 보여준다.

헤이그밀사파견, 파리강화회의 대표파견, 임시정부의 외교론, 상해파공산주의자들의 레닌 의존 등도 망명 지사들의 사대주의적인 자세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한국사회가 무저항, 비폭력 시위로 자랑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3.1운동은 외교로, 평화로, 지혜로, 인내로, 여론으로, 지배자를 감복시켜서 독립을 얻으려는 사대부들의 자기도취의 결과물이 아닌가! 결국 조선반도가 일제에 의해 다 유린당하고 난 뒤에야 전쟁 없이 독립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망명 지사들은 3.1운동 후부터 독립군 양성을 위해 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단체를 만들지 않았는가 말이다.

네 번째는 신분과 파벌에서 벗어나 연합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망명지에서 인간관계나 생활도 그대로 조선 생활의 축소판이었다. 관내나 동북지방이나 할 것 없이 기호 출신은 기호 출신 끼리, 서북인은 서북인 끼리, 한 사부 밑에서 공부한 동문들은 동문 끼리, 대종교는 대종교끼리, 천주교는 천주교끼리, 개신교는 개신교끼리, 왕당파는 왕당파끼리, 공화파는 공화파끼리, 양반은 양반끼리, 상놈은 상놈 끼리 어울렸다.

1907년 용정에 통감부 파출소가 세워지면서 일제의 만주 진출로 고난과 시련에 직면한 이주조선인 사회와 지도자는 간민교육회, 간민회를 통해서 비로소 자기 단체와 집단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연합활동을 시작하였다. 3.13 만세시위는 교파, 지연, 신분을 벗어나서 하나된 망명 지사들의 위대한 연합활동의 결과물이었다. 이로서 연변의 조선인들은 파벌과 집단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독립투쟁을 위해 하나로 뭉치기 시작하였다.

봉오동전투에서 신민단, 도독부, 국민회군, 홍범도부대가 연합하였고, 청산리전투에서는 9개 이상의 무장단체가 연합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일반 백성들 또한 연합해서 군자금 모금과 독립군 지원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하나 된 조선인의 긍지와 승리의 기쁨을 함께 누렸다. 연합이 살길임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망명 지사들의 한계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명 지사들의 한계점은 분명하였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봉건사회의 장자라는 태생적인 한계가 그들의 의식과 활동을 제약하였으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 조선 이주민사회의 사회주의 독립 운동가들의 구호가 ❰반제반봉건❱이었다는 것과 1917년 10월 혁명 이후 10년도 채 안 되는 상간에 조선이주민사회가 사회주의 물결에 휩쓸렸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그 이후로 동북3성은 사회주의노선의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 근거지가 되어 1920년에 있었던 전투보다 더 치열한 항일 독립 투쟁을 벌였다. 20년 상간에 항일투쟁으로 희생된 열사가 무려 13,000여명, 연변자치구에 세워진 조선족 열사기념비가 무려 610개에 이른다는 것이 바로 그 증표다.

첫 번째 망명 지사들이 가지고 있는 큰 문제는 망명으로 애국애족의 의지를 천명하였지만 그들의 사고가 봉건의식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나라가 망했어도 그들은 유교사회의 신분질서와 계급차별, 사대부가 누리는 기득권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권위의식과 우월감, 배타성으로 독립운동의 암초가 되었으며 파벌과 갈등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평등과 인권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가당착에 빠져있었다. 사실 그들은 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조선의 관료, 양반사회를 주도하면서 나라를 멸망의 지경에 이르도록 일반백성들을 수탈하고 억압한 계급의 장본인들이었다.

두 번째 그들은 이주 조선농민대중의 능력과 역량을 과소평가하였다. 그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위대한 존재이며 역사를 바르게 견지할 수 있는 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농민대중과 함께 그들 속에 들어가서 대중을 조직화하거나 의식화 교육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들이 일반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을 때, 사회주의가 출현하여 농민 대중과 청년들 속으로 들어가서 봉건타도와 혁명을 외치며 교육과 훈련을 하자 그들은 조직화되었고 연대되어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폭발적인 역량을 발휘하며 항일투쟁의 전선으로 나아갔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며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유교의 신분질서 속에서 상층계급으로 살아온 그들은 폭풍처럼 몰아쳐온 사회주의 사조 앞에서 혼란스러웠고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론적으로 실제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민족주의와 유교신분질서를 강조하였으며 종교의 근본주의에 집착하였다.

크리스천은 신을 부정하는 사회주의자가 될 수 없었고, 신을 부정하는 사회주의자들은 크리스천이 될 수 없어서 교회를 등져야 했다. 민족주의자는 민족을 부정하는 사회주의자가 될 수 없었고 사회주의자는 민족을 부정해야 했기에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1국1당 만 허용한다는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중공공산당에 가입하여 먼저 중국의 해방을 위하여 싸워야 했다. 이로부터 시작된 갈등과 대립은 독립운동사에 오점으로 남게 되었고 지금도 남북으로 유전, 계승되어 한국인의 발목을 잡고 있음을 본다.

망명 지사들과 종교단체가 최선을 다하여 세운 학교가 사회주의자들의 활동기지가 되고만다. 그들의 탈종교 운동으로 말미암아 입지가 좁혀지자 제 종교들이 민족문제와 사회문제에서 벗어나 영혼구원으로 돌아가 버리는 일이 왕왕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대 후반을 통과하며 제 종교는 사회주의 이론 앞에서 배타와 침체의 늪에 빠졌으며 조선 이주민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쇠퇴하며 자기 아성에 갇히게 되었다.

한 시대와 사회의 문제를 풀기위해서 사람이 만든 이념과 사상, 제도가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이전투구로 몰아가고 있는 현실이 몹시 가슴 아프다.  

지도자에 따라 정책이 뒤바뀌면서 남북한 8,000만 국민이 그토록 원하는 평화로 가는 길이 끊기고 막히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 옛날 독립으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평화 교류의 물꼬가 속히 트이길 빌면서 일송정 비암산 일송정에서 수전민들이 일군 평강벌과 서전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노고 위에서 출발된 망명 지사들의 시대를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의 숙제가 바로 그 시대의 숙제였음을 본다.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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