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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양인의 탄생연세대 김학철 교수가 말하는 기독교교양교육
이정훈 | 승인 2019.07.09 01:15

‘교양(敎養)’이라는 말의 뜻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렇게 풀이해 놓았다.

“1. 가르치어 기름. 2.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

교양교육이란

첫 번째 풀이는 한자를 그대로 풀어 쓴 것이고, 두 번째 뜻은 교양교육을 통해 길러진 사람의 품성이나 가지게 되는 지식을 뜻한다. 이런 용법이 어울릴 것 같다. “저분 교양 있는 분이네” 혹은 “생각보다 교양이 폭넓으시네요.”

그리고 교양 하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대학이다. 대학과정 자체가 교양과목과 전공과목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교양과목도 교양선택과목과 교양필수과목으로 나뉜다.

교양선택과목은 학생 개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과목으로 강의 주제가 매우 자유로운 반면, 교양필수과목은 말 그대로 그 과목에서 학점을 이수하지 못하면 졸업 요건을 만족시키지 못해 졸업 자체를 할 수가 없다.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과목들이다.

비기독교 학생들이 처음 만나는 기독교, 기독교교양교육

신학대학교나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대학교나 교단이 설립한 종합대학에서는 교양과목으로 기독교교양과목을 필수로 지정해 놓는다. 신학대학교는 사정이 조금 다를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소위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 학생들에게 종교를 만나는 통로이기도 하다. 참 중요한 과목이고 중요한 순간이다.

▲ 한국기독교교양학회 창립에 산파 역할을 했던 연세대 김학철 교수 ⓒ이정훈

하지만 기독교교양과목이라는 말이 언뜻 와닿지 않는다. 기독교를 교양으로 배운다는 말에 대한 낯선 느낌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는 자신의 삶을 걸고 투신해야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 탓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기독교정신으로 설립된 대학교나 교단을 배경으로 하는 종합대학에서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학생들은 기독교교양과목에 대한 반감도 크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데 왜 학점으로 옭아매려고 하냐는 목소리이다. 여기에 채플, 즉 예배가 필수라면 학생들은 더 심한 반감을 가지기도 한다.

형식이야 어떻든 간에 기독교를 교양으로 배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기독교교양과목을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궁금점을 가지고 연세대학교에서 기독교교양을 가르치고 있는 김학철 교수는 만났다.

김 교수는 지난 6월22일 발족한 한국기독교교양학회 창립에 동분서주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내가 방언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신약성서 중 마태복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교양대학에 임용되었다. 교양대학의 특성상 전공과목보다는 교양교육을 전문으로 해야 했지만 교양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기까지 3-4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기독교교양교육학자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고 술회했다.

또 하나, 김 교수는 기독교교양과목을 가르치는 중요성을 깨닫게 된 계기 하나를 이렇게 표현했다.

“본격적으로 기독교 교양 교수로서 가르치면서 제가 하는 말의 상당수가 이른바 ‘교회 용어’로서 비기독교인 학생들에게는 ‘방언’으로 들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학의 게토에서 나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는 비단 김 교수만의 깨달음은 아닐 것 같다. 기자도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지인들을 만나게 되면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면도 많아서 자칫 정치이야기는 말다툼의 원인이 되고 종교 이야기는 전도성 언사가 되니 그것도 마뜩치가 않다.

결국 가벼운 사회현상 이야기나 문학과 문화 이야기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는데, 꾸준한 독서나 문화를 접하지 않으면 이마저도 힘든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교육을 업으로 하는 교수들은 어떨까. 현실과 맞지 않은 극우 발언을 일삼는 신학대학 교수들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김 교수의 이야기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기독교교양교육의 목표, 종교문해력

또한 김 교수는 기독교교양교육의 목표를 이렇게 설명했다.

“기독교는 종교인데, 오늘날 우리 사회뿐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가 이른바 ‘종교 문맹’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종교문해력을 길러주는 게 필요합니다. 종교문해력은 다문화 이해에 결정적입니다. … 종교문해력은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역사의 다층적 맥락에서 종교를 이해하고, 종교를 통해 그 다층적 맥락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 세상을 보는 눈을 하나 더 하는데, 학생들이 그것을 거부할 이유는 없습니다.”

피상적일지라도 종교, 특히 기독교를 공부하게 될 때,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른바 종교 문맹에서 벗어나게 될 때 불가피한 다툼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등치가 아닐까 한다. 전도라는 차원이 아니라 기독교 이해시키는 과정이다.

한국기독교교양학회 창립 발족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신학을 쉽게 가르치는 것도, 교리를 교육하는 것도, 혹은 좁은 의미의 전도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교양교육의 차원에서 수행되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더 한층 깊은 이야기를 쏟아 놓았다.

“교양교육은 복잡성, 다양성, 변화를 능동적으로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능력이며, 경계를 가로지르는 학습 능력을 배양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회적 책임과 연대의 가치를 형성하고 분석적 사고와 문제를 탐지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키워주려고 합니다. … 교양교육은 지식의 변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져 더는 대학에서의 전공 교육이 변화 속도에 미치지 못할 때라도 근원적인 지적 능력을 키워주는 교육입니다. 곧 창조적 사고, 비판적 사고, 의사소통 능력, 질적 및 양적 사고, 다문화 이해 능력, 융합적 판단력 등을 키워주는 것이지요. 기독교 교양교육도 근본적으로 이런 교양 교육의 목표에 응답합니다. 다만 기독교 교양교육은 이른바 독일어 ‘빌둥’(Bildung)이 의미하는 대로 필요한 지식뿐만 아니라 도야(陶冶)를 더불어 생각합니다.”

다음은 김학철 교수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김학철 교수는 기독교교양과목을 가르치는 작업은 전공에 비해 중요도가 낮은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정훈

▲ 교수님을 찾아뵙고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은 한국기독교교양학회 창립 때문입니다. 먼저 이 학회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세요.

기독교 교양교육은 언더우드가 1915년 서울 YMCA에서 조선기독교대학(Chosen Christian Collge), 곧 현재 연세대학교를 출범하면서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00년이 넘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양학 및 교양교육과 관련된 전문적인 학회가 없었습니다. 한국기독교교양학회는 기독교의 교양학 및 교양교육의 학문적이고 실제적인 필요에 부응하여 설립된 학회입니다.

▲ 제가 신학대학 출신이라 기독교교양과목에 어떤 것이 있는지 거의 모르는데요, 종합대학에서 가르치는 기독교교양과목에 대해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종합대학 뿐 아니라 신학대학, 그리고 기독교 이념으로 설립된 전문대학은 모두 기독교 교양교육을 합니다. 예를 들자면, 한신대학에서는 ‘신앙과목’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한국기독교교양학회를 설립한 이유 중에 하나가 현황 파악인데, 아직 종합적으로 정리된 기독교 학교들의 기독교교과목 현황이 없습니다. 곧 어떤 교과목을 어떤 내용으로 몇 학점을 주어 누가 어떻게 가르치는지에 관한 통계가 없습니다. 그것부터 하고자 합니다.

▲ 일반적인 교양과목과 기독교교양과목은 어떤 차별성이 있을까요? 창립 발족문에는 “신학을 쉽게 가르치는 것도, 교리를 교육하는 것도, 혹은 좁은 의미의 전도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교양교육의 차원에서 수행되어야 합니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학회가 지향하는 교양교육은 어떤 것일까요?

일반 교양과목과 기독교 교양교과목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모두 교양 교과목입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한국교양교육학회’가 생긴 것이 2006년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교양교육에 관한 일정한 관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교양교육에 관한 인식이 매우 낮은 것이 사실이었지요. 그러나 교양교육의 중요성은 21세기에 와서 더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세계 고등교육의 분명하고도 명확한 현실입니다.

교양교육의 중요성에 관해 널리 퍼진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략 6-7개의 ‘직업’을 가질 것이라고 합니다. ‘직장’이 아니라 ‘직업’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무역회사에 취직해서 무역 업무를 보다가 퇴직하고, 농사를 짓다가 인터넷 신문 기자를 하고, 이후 코딩 개발자가 되어 회사를 차려 운영하다가, 컴퓨터 판매업으로 전업하고 살다 카페 운영자가 되는 것입니다. 모두 다른 ‘직업’이지요.

교양교육은 지식의 변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져 더는 대학에서의 전공 교육이 변화 속도에 미치지 못할 때라도 근원적인 지적 능력을 키워주는 교육입니다. 곧 창조적 사고, 비판적 사고, 의사소통 능력, 질적 및 양적 사고, 다문화 이해 능력, 융합적 판단력 등을 키워주는 것이지요. 기독교 교양교육도 근본적으로 이런 교양 교육의 목표에 응답합니다. 다만 기독교 교양교육은 이른바 독일어 ‘빌둥’(Bildung)이 의미하는 대로 필요한 지식뿐만 아니라 도야(陶冶)를 더불어 생각합니다.

현재 대학 및 중등학교 강의실에서 일어나는 기독교 교양교육의 솔직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세례자를 늘리는 데에 목표를 두고 있다면 그것은 빗나간 것입니다. 교회 신자를 만들려는 목표를 심중에 두고 한다면 그것은 교양교육의 근본을 오해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과 기독교 정신을 갖춘 교양인을 양성하는 것은 온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한국기독교교양학회는 기독교 교양학과 기독교 교양교육을 학문적 차원에서 심사숙고하고 실천적 차원에서 고민하는 회원들의 연대를 추구합니다.

▲ 요즘 극우는 아니지만 보수적인 기독교측에서도 인문학적 관점에서 기독교를 바라보자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과 기독교교양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교양교육은 영어로 Liberal education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서양 전통에서 자유인이 자유인답게 살게 하는 교육을 뜻했습니다. 라틴어로는 Artes Liberales입니다. 문법, 논리학, 수사학, 그리고 산술, 지리, 천문, 음악에 관한 배움입니다. 이것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을 위한 교육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양교육의 배경이 됩니다.

교양교육은 복잡성, 다양성, 변화를 능동적으로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능력이며, 경계를 가로지르는 학습 능력을 배양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회적 책임과 연대의 가치를 형성하고 분석적 사고와 문제를 탐지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키워주려고 합니다. 이것은 보수나 진보라는 이른바 진영적 사고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미 서양의 교양교육의 전통을 언급하면서 밝힌 것처럼 인문학은 교양과 매우 밀접합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모두 교양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 앞으로 대학들의 존폐 문제가 사회적 현상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입니다. 특히 경쟁사회가 도래하면서 소위 취직이 어려운 학과는 폐과가 되고 정교수들 또한 자리를 잃게 되는 현상도 벌어집니다. 교양교수들의 현실은 어떨까요?

교양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른바 선진 대학의 추세이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전공교육이 우선시 됩니다. 그런데 대학 전공과 취업 일치도가 40% 정도밖에 안 되는 거 알고 계신지요? 대학 졸업자들의 60%는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는 직장에서 일합니다. 일부 대학에서 폐과는 피할 수 없는 추세일 겁니다. 이른바 정년보장을 받은 교수들도 일할 수 없는 자리가 없어지지요.

교양을 가르치는 교수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른바 비정년트랙 교수들이 대부분입니다. 연구와 교육을 자신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합니다. 다만 그러한 현실을 개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만, 개선되지 않는 현실만 탓하고 세월을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땅한 지위를 얻으려는 노력을 계속하는 한편, 우리가 해야 할 근본적인 사명을 재차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기독교교양을 통해 비기독교 학생들이 종교문해력을 높이는데 한 목표가 있다고 하는 김학철 교수 ⓒ이정훈

▲ 제 친구들 중에서 꽤 많은 숫자가 자신이 전공한 신학 전공과는 상관없이 교양대학 소속으로 교양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들 어려워 하는 점 중에서 자신의 전공을 살리지 못하는 답답함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교수님도 교양을 가르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먼저 선생님 소개와 그리고 가르치고 계시는 과목들, 그리고 제 친구들의 답답함과 비교해서 교수님의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신약학, 그중에서도 마태복음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했습니다. 이후 대략 살펴보니 꽤 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중 상당수가 성서학 관련 글입니다.

2009년에 연세대학교 학부대학에 기독교 교양을 가르치는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제가 ‘신약학’ 전공이 아니라 ‘기독교 교양’ 전공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는 데에 3-4년 정도가 걸렸습니다. 부끄럽지만 아직도 신약학 관련 글을 읽고 신약학 논문 쓰는 게 가장 편합니다.

교양 공부는 기초부터 새로 했습니다. 간략하게, 또 선언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교양은 전공보다 하위에 있는 학문이나 교육이 아닙니다! 전공을 하지 못해 교양을 하는 게 아닙니다. 신약학보다 기독교 교양을 가르치는 게 열등하거나 모자란 게 아닙니다. 도리어 신약학을 할 때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기독교 교양을 하면서 알게 됩니다.

기독교 교양학 및 기독교 교양교육을 가르치는 일은 매우 전문적인 분야이고 그것은 여타 신학의 세부 전공 이상의 전문성과 고도의 학문성을 요구합니다. 전공을 하지 못해 교양을 한다고 하는 인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전공을 맘껏 펼친 공간이 없는 것이겠지요.

저는 기본적으로 <성서와 기독교>, <기독교와 세계문화>, <기독교와 현대사회> 등의 기독교 교양교과목을 가르치고 그 외에도 <현대과학과 윤리문제>, <삶의 의미 – 허무와 고통, 기쁨과 보람> 등의 이른바 일반 교양교과목도 가르칩니다.

▲ 교단이 설립한 종합대학이나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종합대학이나 교양의 하나로 기독교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주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학생들이 청강합니다. 이 학생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게 실제적인 어려움이 아닐까 합니다. 교수님의 비법은 무엇입니까?(웃음)

진리는 스스로 흥미로운 것이어서 따로 꾸며주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진리에 다가가는 태도에 여유가 필요하고, 그 여유는 유머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본격적으로 기독교 교양 교수로서 가르치면서 제가 하는 말의 상당수가 이른바 ‘교회 용어’로서 비기독교인 학생들에게는 ‘방언’으로 들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학의 게토에서 나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아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은 ‘아부’가 아니라 진리를 원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예수는 인류가 알고 들을만한 분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차용하자면 저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비종교인들이 들을 수 있는 언어 구사가 필요합니다.

▲ 교수님께서 교양과목을 가르치실 때 주로 어디에 중점을 두고 가르치시는지요. 학생들의 반응을 여쭈봐도 될까요.

반복되는 얘기지만, 저는 교양교육의 차원에서 가르칩니다. 다만 제가 일하는 대학의 역사와 한국의 근현대사 및 기독교 선교사가 많이 겹치기 때문에 ‘연세 정신으로서 기독교’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거의 모든 교수님의 경험이겠지만 어떤 ‘전도’의 말없이도 학기가 끝나고 나면 교회에 다니고 싶다는 학생이 2-3명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매 학기 편향 없이 가르치려고 노력합니다만 기독교의 정수가 기도에 있기에 마지막 시간에 단 한 번 학생들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몇몇 학생들이 그 기도에 웁니다. 울음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찾아와 강의와 기도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데, 그런 학생들 가운데 종교를 갖지 않은 학생들이 적지 않습니다. 물론 강의평에는 혹독한 비평의 말도 있습니다. 학생들의 강의평은 진지하게 참고하고 강의에 반영하지만, 그것에 좌우되지는 않습니다.

▲ 기독교를 교양으로 배우게 될 때, 종교를 가지지 않은 학생들에게 좋은 점은 무엇일까요? 혹시 종교를 가지지 않은 학생이 교양으로 기독교를 배우고 이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예가 있으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기독교는 종교인데, 오늘날 우리 사회뿐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가 이른바 ‘종교 문맹’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종교문해력을 길러주는 게 필요합니다. 종교문해력은 다문화 이해에 결정적입니다. 20세기 중반 대다수 학자가 종교의 쇠퇴를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종교 인구는 늘어갑니다. 세계 인구의 85%가 종교인입니다. 제1 세계의 종교 인구는 단지 줄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극단주의의 증가와 주류 종파의 감소로 양극화됩니다.

종교문해력은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역사의 다층적 맥락에서 종교를 이해하고, 종교를 통해 그 다층적 맥락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종교문해력이 긴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례는 손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을 하나 더 하는데, 학생들이 그것을 거부할 이유는 없습니다.

▲ 한국의 기독교는 이제 거의 출구가 없다는 자조 섞인 그리고 절망적인 이야기가 회자된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일반대학에서 기독교를 교양으로 가르치시면서 누구보다 종교를 갖지 않은 학생들의 기독교를 향한 비판 혹은 비난을 많이 접하셨을 것 같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주로 이룰까요? 그럴 때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해 주십니까?

간혹 우스운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독교를 설명해서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누그러들어도 길거리에서 무례한 사람이나 어처구니없는 몰상식한 ‘기독교 대표자’를 만나면 모든 노력이 다 수포로 돌아간다고요. 기독교 ‘박해’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기독교의 몰락은 기독교를 대표한다고 하는 사람들, 특히 목회자에게서 옵니다.

성소수자, ‘빨갱이’, 타종교인이 기독교를 몰락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혐오하고 경멸하고, 분노하라고 선동하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파멸시킵니다. 이제 학생들이 기독교를 향해 비판 혹은 비난을 많이 하던 시절도 지났습니다. 비판이나 비난이 아니라 아예 무관심한 경우가 더 많지요. 어느 편이 더 심각해 보이시는지요?

▲ 기독교 교양인의 배출은 우리 사회를 어떤 모습으로 변화시킬지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정훈

▲ 이미 일반대학으로 중심으로 교양교육학회가 창립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반교양학회와의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정립해 나가실 계획이신지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한국기독교교양학회는 기독교 교양학 혹은 교양교육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모인 학회이지 특정 대학 중심이란 것이 없습니다. 2006년 한국교양교육학회가 설립되고 올해 처음으로 ‘종교 분과’가 생겼습니다. 그간 종립학교에서는 중요한 종교과목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나 저조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책임 아니라 우리의 게으름 때문이었습니다.

운 좋게 제가 그 학회의 보직을 맡은 분과 인연이 있어 종교문맹의 심각성과 종교문해력의 중요성을 말씀드리게 되었고, 지난 6월 처음으로 종교 분과가 열리고 거기서 저도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종교분과에 좌장을 맡은 분은 무신론자 생물학자였습니다.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12월 학회는 한국교양교육학회나 연세대학교 교양교육연구소와 함께 할 계획입니다만 임원회의에서 최종 결정해야 할 사안입니다.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교양이라는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하게 될 때 어떤 좋은 점이 있을까요?

나를 아는 방법은 거울을 보는 길도, 상대방의 눈으로 나를 성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교양은 보편의 언어입니다. 그 언어로 기독교라는 고백으로 쌓은 탑을 풀어내는 일이니 즐겁고 흥미로운 일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우러러 모시고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교양은 비종교적 언어로 그 희망을 말하도록 해 줍니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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