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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전대미문의 선포레온하르트 라가츠의 산상수훈을 시작하며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 승인 2019.08.06 18:42

앞으로는 산상수훈의 중요성이 점점 더 강조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소위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로 대치되고 복음(Evangelium)은 신학으로 바뀌고 선포(Botschaft)는 도그마가 되는, 이 모든 대치와 더불어 예수가 예수를 잘못 이해한 바울로 대치될 때 산상수훈는 빛을 잃는다.

그렇게 되면 잘못 이해된 로마서가 산상수훈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산상수훈는 그 잘못 이해된 로마서에 준해서 해석되거나 잘돼봐야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나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취급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일(Sache Christi)은 급속히 희미해진다.

산상수훈에 관한 세 가지 오해

산상수훈는 또한 다른 방식으로도 오해되는데 세 가지 오해가 있다. 산상수훈는 너무 높게 과장되거나 너무 낮게 평가되었다. 오랫동안 산상수훈는 너무 낮게 평가되어 온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람들은 산상수훈로부터 언뜻 보기에 유토피아적이고 공상적으로도 보이는 면을 없애고 산상수훈를 보다 고상한 시민도덕 정도로 여겼다. 이런 경향은 특별히 개신교에서 뚜렷했다. 개신교는 잘 알려진 그 체재상 산상수훈를 적당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개신교의 출발점은 로마서였으나, 로마서를 출발점으로 본 것은 개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모든 업적에 대한 불신과 함께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개신교의 출발점으로 되었고 개신교의 이런 귀결이 정통사상으로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Nachfolge Christi)은 개신교 사상의 변두리로 밀려났다.

개신교가 산상수훈로부터 차용한 것은 이미 시민계급화된 윤리에 순응한다. 세례파에 집중되어 있는 개신교의 이단적 형태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위클리프파나 후스파 및 그들의 선후배들에게서도 산상수훈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되었다. 그것들 중 일부는 비현실적이라 할 만큼 철저하게 문자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것도 있다.

▲ 렘브란트가 그린 산상수훈 ⓒGetty Image

가톨릭은 그 나름대로 산상수훈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보존해 왔다. 그러나 가톨릭은 산상수훈를 단지 “완전한 사람들”만이 옳게 접근할 수 있고 또 그러한 “완전성”은 그들이 보기에는 본질적으로 오로지 수도사에게만 가능한 길로 설명함으로써 산상수훈의 가장 중요한 요구들을 너무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려 놓았다. 마침내 모든 형태의 계몽주의는 산상수훈를 시민도덕의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그러면 추는 다시 다른 쪽으로 기울어졌다. 예수의 요구는 그의 약속처럼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과장된다. 여기에는 톨스토이도 다소 책임이 있다.

바로 이전 시기에는 소위 철저종말론적이라고 하는 신학적 사고방식의 경향이 있었다. 그것에 따르면 복음은 지금 당장에 그것이 실현되기를 의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장래에 있을 것으로 기다려지는 우리 세계와는 낯설 수도 있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의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 두 견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산상수훈은 결코 시민도덕 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상향이나 환상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주 실재적인 것이다. 산상수훈는 유례없이 참된 현실론이다. 주님이요,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면 산상수훈는 우리에게 중요한 현실성을 지닌 것이요, 단지 현실일 뿐이다.

우리는 산상수훈를 그 의미나 의도와는 정반대로 제법칙들과 규정의 총화로 만들었다. 하지만 산상수훈은 대단히 일관된 것이고 단순한 것이다. 산상수훈는 세상의 길이나 종교 및 도덕의 길과는 대조를 이루는 하나님의 길이다.

또한 예수의 비유를 해석할 때와 마찬가지로 산상수훈를 해석할 때도 우리는 근본적인 오류를 범했다. 즉 우리는 산상수훈을 순전히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했다. 다시 말해서 순전히 개인을 위한 약속과 요구로만 해석했고 다소 부담스런 말로 표현한다면 산상수훈의 사회적 의미라고 할 수 있는 것과 산상수훈에서 뿐만 아니라 예수의 선포 전체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을 거의 전적으로 간과했다.

산상수훈, 그리스도의 일

산상수훈에 대한 이런 세가지 오해는 그리스도의 일에 치명적 인 영힘을 끼친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의 참된 의미, 원래적 의미를 회복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산상수훈은 하나님을 통해서 세상의 혁명이 온다는 전대미문의 선포이다. 산상수훈은 아무리 반복되어도 변함없이 산상수훈이다. 톨스토이는 한 때 산상수훈를 재발견했던 적이 있다. 산상수훈은 이제 세계의 파국과 세계혁명으로 인해 새롭게 관심을 끌고 있다. 산상수훈이 다시 나타나서 이 시대 최후의 의미인 그리스도의 일을 근본적으로 혁신하고 있다. (본 서는 1945년에 출판 되었음 - 역주)

산상수훈은 살아있다. 그러나 기독교(Christentum)가 지배할 때 산상수훈은 뒤로 물러나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그것은 전면에 나온다.

라가츠의 산상수훈 해설의 이유

저자는 산상수훈의 이러한 의미를 강조하고자 한다. 이러한 해석은 비록 성서에 박식한 사람이나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을 전제하고 있기는 하지만 신학자들이나 반은 신학자가 다 된 사람들을 위한 역사-주석적 설명이 아니다. 너무 거창한 주제에 비해서 해석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것은 단지 하나의 시도일 뿐이며 강한자극이 되었으면 할뿐이다. 이 해석이 그랬으면 참 좋겠다!

예수의 산상수훈에 대한 이 해석은 저자가 최근에 출판한 예수의 비유에 대한 해석의 보충이다. 예수의 선포에 대한 이 두 기 본 저서는 서로 관련된다. 양자의 관계는 예수의 비유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면 산상수훈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 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간단히 공식화할 수 있다.

물론 정확하게 이렇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선포의 이 두 요소는 그처럼 구분하기 힘들게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구별은 그것들 각각의 본질과 차이를 적절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비유 해석 다음에 곧 산상수훈에 대한 이 해석이 뒤따라 나온 것이다. 이 해석이 알게 모르게 세상이 찾고 있는 그리스도에게 가는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되고, 그럼으로써 기독교의 혁명과 세상의 혁명을 의미하는 저 그리스도의 혁명을 조금이나마 촉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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