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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숙과 결혼하다남편과 아빠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김정택 목사 | 승인 2019.08.09 22:58

해고노동자, 불랙리스트 사건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갈 즈음에 나는 종로2가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볼 수 없을 것 같은 후배 정귀열을 만났다. 귀열이는 감신대를 졸업하고는
곧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는 가끔씩 소문으로만 귀열이에 대한 소식을 들을 뿐이었다. 북에 자주 간다고 하고, 남북문제와 평화문제 전문가이면서 대학교수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한국에는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등이 내 안테나에 잡힌  정보였다.

그런데 종로에서 우리들은 만나고 있지 않은가! 참으로 반가운 상봉이었는데도 찻집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그냥 길거리에서만 우리는 얘기했다. 서로 찻값도 없었나?

우연한 만남 그리고 용기

어디 앉아서 얘기하자는 말이 아무에게서도 안 나왔다. 귀열이 옆에는 키가 작은 어떤 아리따운 여성이 서 있었다. 귀열이는 나를 감옥갔다온 선배라고 소개한다.

같이 온 여성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녀는 난지도에 살고 있는 넝마주의 자녀들을 위해 탁아소 일을 한다고 했다. 그때 문득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탁아소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 생각났다.

“혹시 시간되면 인천산선에 들릴 수 없을까요? 산업선교회에서도 탁아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좀 보여주고 싶어요.”

내가 그녀를 그때 흘깃 보고 또 만나고 싶어서 그랬을까? 그녀는 정말 인천산선에 왔다. 나는 탁아소를 보여주고 인천산선이 지역노동자들이 어려워 하는 생활문제 중의 하나인 자녀양육에 대해 신경 쓴다고 폼을 좀 잡으면서 설명을 했다.

임정숙씨와 먼가 통한 것일까? 임정숙씨는 그대로 느끼는대로 표현하는 존재인가보다. 얼굴에서 그냥 화사하게 웃으면서 뭔가 김정택씨가 유의미한 일을 하는 것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처럼 머리를 끄덕인다.

자기는 종로2가에서 만났을 때는 감옥갔다 온 선배님이라고 해서 난지도분들이 감옥을 잘 가서 그런 감옥 갔다 온 분인줄 알았다고 한다. 종로2가에서 만났을 때 내 양말에 구멍이 난 것을 보고 측은한 마음도 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난지도에서 나와 아산에 있는 충무 어린이집에서 일한다고 했다.

▲ 흑인 예수와 흑인 그리스도인들 ⓒGetty Image

난지도 탁아소를 맡았을 때는 혼자 돈도 모금하고 밥도 해주고 아이들도 돌보고 1인 3역을 했다. 존경하는 아일랜드 신부님을 따라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봉사활동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사당동 판자촌에서 일할 때는 마더 테레사수녀도 다녀갔다.

자꾸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나하고 결혼하면 딱 맞을 것 같았다. 가난한 사람들과 정말 함께 잘 살 것 같았다. 그런데 나에게 측은지심을 가진 여성과의 결혼을 떠올리는 내가 참 어처구니도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또 한번의 만남이란 약속도 없이 그냥 헤어졌다.

그런데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아산으로 갔다. 저녁쯤 도착했는데 충무 어린이집으로 바로갔다. 밖에서 안을 훔쳐 보았는데 부모들과 아이들이 함께 모여 잔치를 벌이는 것 같았다. 임정숙씨는 사회를 이쁘게 보고 있었다. 잔치가 빨리 끝나기만 바라면서 지켜보았다. 잔치는 끝나고 임정숙씨는 부모들과 일일이 악수를 한다. 이제 조용해졌다.

그렇지만 불안했다. 나를 잘 왔다고 기꺼이 만나줄지 그렇지 않으면 어색해할지 불안해졌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과감하게 그녀에게 나를 보였다. 그녀는 정말 반가운 사람이 나타난 것처럼 활짝 반겼다.

우리는 밤도 늦어서 곧바로 여관으로 갔다. 나는 그녀에게 결혼을 제의했다. 그녀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나와 결혼할 사람으로 산선에 나타났다.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산선에 근무하는 여성들이나 동일방직 해고여성들은 전혀 산선분위기에는 맞지않는 여성이 나타나서 산선총무를 홀렸다는 듯이 차게 임정숙을 대했다. 전에 조 목사님한테 들은 얘기가 있다. 정택아! 여성노동자들이 너는 좋은 사람이고 편하게 같이 놀 수는 있어도 결혼감은 아니라고 하더구나. 가정을 잘 챙길 것 같지도 않고 책임감도 부족한 것 같데 하고 말했었다.

그런 여성들이 막상 누가 데려간다니까 질투심이 발동한 것인가? 그래도 아쉬웠던 것일까?

임정숙씨의 아버지는 40대에 일찍 돌아가셨고 홀어머니가 있었다. 임과 나는 장모님을 만났다. 장모님은 내가 교회전도사라고 하니까 그게 무엇인지 모르시는 것 같았다.

결혼하면 성당에 다녀야지 하신다. 저는 성당과 교회를 넘어서려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래봐야 어른에 대한 말대꾸로만 여겨질 것 같아, ‘예! 성당에 다니겠습니다.’ 하고 거짓말은 할 수 없고 해서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자주 조사받고 감옥살면서 불리할 때는 침묵이 최고라는 것이 몸에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장모님은 내가 딸의 신랑감으로는 탐탁하게 여겨지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반대는 하지 않았다. 딸을 수녀나 노처녀로 만들고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확실히 인연이란 것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내 주변에도 임정숙을 아는 사람들이 참 많다. 정지강 목사도 알고 허춘중 목사도 잘 안다. 난지도에 다들 봉사활동으로 연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임정숙씨가 워낙 미인이라서 짝이 있을거로 알고 남자들이 감히 접근을 못했다고. 그러고 보면 나는 용기있는 남자임에 틀림없었다.

이제 결혼날짜도 잡혔고 주례선생으로 조화순 목사의 허락도 떨어졌다. 또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도 좀 느슨해지는 것같았다. 그 신호가 대학복학 허용이다. 나는 14년만에 감신대를 복학하고 4학년2학기로 등록도 했다.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었다. 나는 기뻤다.

그런데 이게 왠 대낮의 날벼락인가! 어느 날 임정숙씨가 나를 불러 조용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이 정색을 하며 “김정택씨, 안순애와 연애하고 있지요.”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안순애와? 기가막혀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안순애와는 둘이 만난 적이 없었다. 여럿이 만날 때 서로 본적은 있다. 지금은 기억이 안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안순애가 김정택씨를 좋게 얘기해요.’ 하고 말해준 적은 있었다. 그래서 나도 관심까지는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둘이 만나야 뭐 성사가 되도 되는 것이지. 둘이 만나보지를 못했는데. 산선 주변에서는 안순애의 단 한마디의 말이 신기했었나보다. 도통 남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그녀가 그냥 사람이 좋은 것 같다고만 한 것 가지고 무슨 대단한 관심인양 그것이 안순애가 김정택을 좋아하는 것으로 불려서 소문이 되었던 모양이다.

안순애 친구로는 글도 잘 쓰는 석정남도 있었으니까. 소설을 같이 쓰듯이 소설은 부풀려야 재미있고 독자들의 호기심도 불러 일으켜야 하니까. 미루어 짐작하건데 그래도 산선총무라고 모두에게 가십거리는 됐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임정숙도 어디선가 주워들을 수 있었겠지. 나도 안순애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는 말만 빼고 솔직히 그대로 얘기했다. 그러면 내가 안순애를 만나보겠고 그 결과를 가지고 결혼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한다.

임정숙과 안순애가 만난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들의 결혼일정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임정숙과 안순애로부터 둘이 만나 나눈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다.

나도 지금까지 두사람에게 그때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85년 9월15일 우리들의 결혼식은 거행되었다. 참으로 많은 하객들이 모였다.

사복경찰들도 안과 밖에 많이 보였다. 우리의 결혼은 위장결혼이 아니고 아름다운 결혼이었다. 조 목사님의 주례사가 묘한 여운을 남긴 것 말고는. 조 목사님은 김정택은 가정이란 걸 잘 모르고 수사가 되기에 적합한 사람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미인을 신부로 맞이하게 되었으니 노력을 열심히 해서 신부를 행복하게 해야할 것이라고. 느낀데로 표현하시는 솔직 그 자체인 조목사님의 훈시다.

가장의 책임감을 몰랐다

가좌동 아파트에 전세로 신혼방을 차렸다. 그리고 아내에게 공장체험을 하는 것이 산선과 노동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텐데 공장에 다녀보면 좋겠다고 했다. 아내는 좋다고 하고 공장을 찾아 나섰다.

임정숙은 본인 이름으로 그냥 쉽게 들어갔다. 나는 아내에 대한 지도를 용철이 한테 부탁했다. 공장에 얼마나 다녔을까? 아내가 애를 가졌다고 한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언제부턴가 나에게는 운동가는 결혼을 하더래도 자기 아이를 낳아서 키우면 안된다는 관념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 하필이면 성서에서도 이런 관념을 합리화 시켜주는 대목만 머리에 쏙쏙 들어오던 시절이었다. 바울이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은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오르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좋다.” 는 말씀대로 결혼한 것이라 생각했다.

결혼생활에서도 자꾸 예수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한 말씀이 나를 괴롭혔다. 혈연 가정과 뜻의 가정을 조화롭게 해석하지 못하고 때로는 대립적으로 닥아왔다.

나는 아내의 몸과 마음의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나의 관념이 이끄는대로 아내에게 애를 떼야한다고 했다. 낙태를 반대하는 천주교 집안이란 고려도 못하고 탁아소를 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이들을 돌봐주면서 자기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무의식에까지 깊이 박혀 있을 것이란 생각도 못하였고 성교육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어 아이를 떼는 수술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라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일은 저질러 놓고 책임은 지지 않았다. 가까운데서 지켜봐 온 조목사님과 여성노동자들의 느낌이 맞아떨어졌다.

그렇지만 87년 9월12일에는 사랑스러운 딸, 나래를 낳았다.

김정택 목사  kjt94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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