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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냐, 나도 아프다오병이어 사건(마 14:15-16)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19.09.08 16:32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오병이어 사건은 4복음서에 모두 나타나 있는 사건이고,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인 스토리는 4복음서가 거의 동일합니다. 하지만 복음서마다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다 다르기 때문에 오늘 저희는 마태복음이 전하고자 했던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후로는 복음서를 이야기할 때, ‘복음’은 빼고 이름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시기

마태가 다른 복음서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은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난 시점입니다. 사실 마태는 시간적으로 큰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14장 12절과 13절을 완전히 분리시켜서 전혀 다른 이야기로 본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12절과 13절을 연결해서 읽어보면, 다른 복음서들과 다른 시간에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복음서마다 시간의 차이는 종종 나타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대 자체에 오류가 있습니다.

요한은 완전히 독자적인 시간대를 제시하고 있지만, 마가와 누가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신 이후, 제자들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보고를 하게 됩니다. 마가 6장 30절은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로 시작하며 오병이어 사건이 전개됩니다. 누가 9장 10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하지만 마태는 아닙니다. 이야기의 순서 자체는 마가, 누가와 같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14장 1-12절은 헤롯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때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세례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생각합니다.

누가는 이정도의 이야기만 담고 있지만 마태와 마가는 세례 요한이 왜 죽게 되었는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 딸이 살로메라고 말하지만 성경에는 그 딸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영화로 치면 헤롯의 회상 씬이거나 스토리 진행상 필요한 과거 회상 씬에 속합니다. 세례 요한이 이미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헤롯은 세례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 동방교회 전통의 오병이어 기적 성화 ⓒGetty Image

문제는 마태 14장 12절 마지막과 13절의 시작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12절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세례 요한의 죽음을 전하면서 끝납니다. 13절은 “예수께서 들으시고”로 시작합니다. 마태는 교묘하게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와 이후의 이야기를 연결시킵니다. 별 생각 없이 말씀을 읽는 사람은 시간대가 꼬였다는 점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슬쩍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회상 장면의 시간대가 갑자기 현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태는 왜 이런 무리수를 두고 있을까요? 시간대가 꼬일 정도로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와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연결하려 했던 의도가 무엇일까요? 이는 분명 뒤 이어지는 예수님의 행동과 연결시켜 봐야 합니다.

따로 계시려던 예수님

마태는 마가, 누가와는 다른 상황을 그립니다. 마가의 경우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신 예수님께서 오가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제자들을 밥이라도 먹으라고 따로 보내셨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누가는 그저 제자들과 함께 벳새다로 떠나셨다고 나옵니다.

마태의 경우,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를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서 따로 빈 들에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따로 떨어져 계시려고 했을까? 그 이야기는 오병이어 사건 뒤에도 이어집니다. 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강 건너편으로 가도록 하십니다. 이어지는 23절에 비로소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해 따로 움직이려 하셨는지가 나옵니다.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십니다.

간혹 기도를 강조하시는 목사님들께서 예수님께서는 수시로 기도하셨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마태 14장 23절의 말씀을 하십니다만, 이는 마태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마태는 세례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으셨으며, 그 마음의 상실감과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따로 계시려 하셨고, 기도하셨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마태가 굳이 그런 이야기를 쓸 이유가 있을까?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의 인간성을 강조하고자 했다면 14장 33절에 나타난 제자들의 감탄,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심

이를 생각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 놓였고, 어떤 행동을 취하셨는지를 계속 살펴봐야 합니다. 마태에서 예수님은 분명 혼자 계시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쫓아옵니다.

그 중에 있던 병자들를 고쳐주셨다는 이야기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 아픈 몸을 이끌고 예수님께 나온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쫓아 온 사람도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마을에서부터 나와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신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십니다.’ 누가와 요한은 그저 무리가 예수님을 쫓아 왔고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거나 말씀을 전하셨다고만 나옵니다. 하지만 마가는 이렇게 쫓아온 이들을 보시면서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인 의미로 생각했을 때, 바른 길로 이끌어 줄 사람이 없음에, 또는 이들이 바른 길을 알지 못하고 있음에 불쌍히 여기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오늘 본문에서 ‘목자 없는 양 같다’는 말을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사람들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태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보며 불쌍히 여기시는 경우가 몇 번 나타납니다. 9장 36절은 예수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신 후에 받으신 소감을 적고 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 본문은 마가와 같이 ‘목자 없는 양 같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의미는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뒤에 설명이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고생하며 기진하였다’ 예수님을 쫓아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도시와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보신 사람들의 삶은 너무 많은 고생으로 인해 기운이 모두 빠져나가버린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시는 경우가 또 있는데, 칠병이어 사건으로 불리는 본문인 마태 15장 32-39절에, 먹을 것이 없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길에서 기진하고 굶은 채로 집으로 돌아가게 될까하여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마태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처참한 현실을 바라보실 때에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직전 예수님께 소리치던 맹인 두 사람을 보시면서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아픔도 고통도 없이 그저 자신의 사명, 치유하시고 복을 베푸시는 일만 수행하셨다고 여기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에 따르면 자신의 사촌이었고, 사촌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무언가 친분이 있었던 세례 요한의 죽음에 심적인 동요를 보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처참한 삶, 그들의 고통스럽고 어렵기만 한 삶, 굶주리고 아파하는 삶을 보시며 자신의 심정보다도 그들의 아픔을 더 우선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을 치유하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아픔보다 남의 아픔을 더 크게 여기셨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아프셨기에 남의 아픔도 크게 느끼실 수 있으셨다고 봅니다. 말장난 같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전 요즘에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픔을 겪어봤기 때문에 남도 그만큼 아플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도 다 겪어봤어. 괜찮아” 하는 말은 어찌보면 위로의 말 같지만, “나도 같은 아픔을 겪어봤는데, 난 이겨냈다. 너도 이 정도 아픔은 이겨내야지”라는 말로만 들립니다. 이 말은 오히려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그걸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넌 나만큼 강하지 않구나?” 하고 말하면서 아파하는 사람을 오히려 더 깎아내리는 위로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실제로 겪어봤다면, 상대방이 지금 얼마나 아파할지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셨기에 그저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셨습니다. 치유되길 원했던 아픈 이들을 치유하셨고, 말씀 듣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저녁이 되어 허기진 이들을 위해 그들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의 배고픔을 아시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십니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이때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을 마을에 보내서 밥을 사먹게 하십시오. 우리에게는 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우린 가진 것이 없으니 가서 사 먹게 명령하시라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제자들의 의견은 현실적으로 타당합니다. 자신들이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각자 마을에 가서 사 먹게 하는 일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먹일 만한 음식도 능력도 없습니다.”

마태에 보면 이때 모여 있던 사람들은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오천명이었습니다. 마가와 요한은 이들을 먹이는데 200 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여자와 아이를 포함하면 만 명쯤 된다고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설마 제자들이 대략 만 명분의 음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셨던 걸까요? 아니면 200 데나리온 이상의 돈이 있어서 빨리 사오면 된다고 생각하셨던 걸까요? 사실 당시에 아무리 대도시였다해도 한 순간에 만 명분 이상의 음식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그런 지극히 당연한 상황 속에서,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너희는 줄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다. 
“너희는 가진 것이 없어서 이들을 먹일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너희는 이들보다 가진 것이 있으니 주어라.” 
또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고 봅니다.
“너희는 가진 것이 없어서 줄 수 없다고 말하지만, 너희에게는 이미 충분한 능력이 있다.”

이후에 어떤 기적적인 현상이 발생했는지 저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제가 알 수 없는 어떤 현상이 벌어져서 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이 넘는 사람이 배부르게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할 수 있음을 보이신 예수님

마태가 전하는 오병이어 사건은 단순 기적 사건이 아닙니다. 아픔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치유를 행하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아픔을 겪으시는 분이시지만 다른 이의 아픔도 느끼실 수 있기에 아파하는 이들 속으로 먼저 들어오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당신은 이 무리들을 도우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시기에, 지금 나는 아프지만, 이들의 고통은 덜어줄 수 있음을 확신하시기에 그들 속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반면에 우린 가진 것이 적어서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제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베드로도 잠시 물 위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당신만 이런 기적이 가능합니다.” 라고 말하는, 할 수 없다고만 말하는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그랬기에 그들은 나중에 17장에서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지 못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7장 20절 앞에 나오는 ‘믿음이 작은’으로 번역된 헬라어 ‘올리고피스티아’, ‘거의 없는 믿음’의 번역과 해석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남을 돕는 일, 다른 이의 아픔을 돌봐주는 일,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주는 일, 물 위를 걷는 일까지도, 더 나아가 산을 옮기는 일까지도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진 것은 적어서 난 못합니다. 난 힘이 없습니다. 난 능력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단순히 베풀라는 말씀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아주 단순하게 ‘너희는 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읽어도 된다고 봅니다.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이루어갈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고 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 아니라 더욱 큰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을 변화시킬 수도, 이 땅에 잘못이 있다면 고쳐나갈 수도, 아파하는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만들어 갈 수도, 삶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 우리의 삶이 기쁨으로 충만하고, 능력과 확신으로 충만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서 이 땅을 변화시켜 가시는,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이루어 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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