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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역사의 강물은 평화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부평역에서 평화통일 집회를 열다
김정택 목사 | 승인 2019.09.21 18:05

1990년 어느 뜨거운 여름날로 기억된다. 부평역에서 평화통일집회를 개최하면서 벌어진 사건이 또렷하게 그림처럼 내 뇌리속에서 튀어나온다. 가난한 자의 민중생존권! 군사독재타도! 민주화만을 목표로 활동해온 내가 처음 평화통일집회를 주도하고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가운데 연설을 하고있었다.

그런데 전경들 수십명이 경찰차에서 급하게 내려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전경들은 시민들을 흐트러뜨리면서 달려오더니 소수의 운동가들을 에워쌓았다. 그리고는 상관이 끌고가라!고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나의 순간 상황을 돌파하는 순발력이라 할까, 상황대처능력이라 할까, 기지와 용기가 발동하였다. 제대로된 실전의 마당극 한마당이 전경들과 시민들로 하나 가득한 부평역전에서 펼쳐졌다. 나는 단전에서부터 나오는 배힘으로 짧고도 강열한 즉흥연설을 하였다.

경찰분들! 상부에 연락해 보시오. 당신들 우리를 잡아가면 큰일 날거요. 서울올림픽에서 우리 국민들 모두는 봤어요. 소련, 중국 그리고 모든 사회주의권 나라들이 함께 하는 것을 봤지요. 올림픽 이후로 세계가 남과 북의 화해와 교류를 환영하고 지켜보고 있어요. 그래서 국민들도 이 참에 남북이 서로 잘 알고 교류도 하면 좋겠다는 분위기요. 정부도 그래서 민간이 추진하는 남과북 그리고 해외동포들의 판문점에서의 범민족대회를 지원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우리를 잡아가보시오. 그러면 당신들은 정부의 노력에 똥칠하는 것이 될 것이오. 세계에도 창피한 일이 될 것이오. 여기 모인 시민분들도 어떻게 생각하겠소? 그러니 급할 거 없어요. 상부에 알아보고 잡아가도 잡아가시오.

내가 이 사람, 저 사람 눈을 마주치며 “내 말이 맞지 않소!” 하고 물어보듯이 얘기하니 청중들은 “얼씨구! 그래! 맞구먼!” 하는듯이 고개도 흔들고 “그렇지!” 수긍하는 듯이 미소를 짓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뭔가 좀 통하긴 통했나보다. 인솔자인 듯한 사람이 정말 전화를 건다.

한참 통화하더니 우리를 그냥 놔두고 철수하는 것이 아닌가! “하, 이런 일도 벌어지는구나.” 그날, 우리와 시민 사이에 있던 전경이라는 가시철망이 사라지자 서로 부둥켜 안았고 시민들은 우리들을 용기있는 젊은이들이라고 격려해주었다.

그후에 나는 “참 신기한 일도 벌어지는구나. 상부가 현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기에 철수지시를 내렸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나는.역사를 거꾸로 세밀하게 파들어가 보기로 했다.

남북평화를 향한 발걸음들

이 글 저 글 살피다보니 사마란치 위원장의 노력이 눈에 들어왔다. 사마란치는 84년 LA올림픽이 소련 등 공산권의 대거 불참으로 올림픽 정신이 훼손된 것을 아쉬워했다. 그래서 사마란치는 LA올림픽이 반쪽 올림픽이 되어버린 아쉬움을 씻기 위하여 공산권이 대거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남과 북을 열심히 접촉했다.

사마란치는 1985년 2월1일, 북한선수단의 서울올림픽 출전문제에 관해 협의를 하자고 제안하였다. 드디어 1985년 10월 8-9일 스위스 로잔에서 제1차 남북한 체육회담이 개최되었다. 남측은 일부 종목의 분산개최를 제시했다.

▲ 1963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남북체육회담의 현장 사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북측은 5가지 주장을 내세웠다. 첫째는 주최는 남북한 국가올림픽위원회가 공동으로 할 것, 둘째는 명칭은 조선올림픽 경기대회 또는 조선평양 서울올림픽 경기대회로 할 것, 셋째는 경기종목은 서울12개, 평양11개를 치룰 것, 넷째는 개폐회식은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따로 거행할 것, 다섯째는 텔레비전 방영권의 이익은 반반씩 나눌 것을 내세웠다.

IOC측에서는 공동개최는 올림픽헌장에 따라 불가능하나 일부 종목의 분산 개최는 가능함을 제시하고 절충을 시도하였다. 북측이 계속 공동주최를 주장하고 물러서지를 않자 1차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 회담은 4차까지 이어졌다.

이 회담이 2, 3차 진행되어 가면서 매스컴을 통해 세계로 알려지자 88서울올림픽의 남북공동 개최문제가 남북화해와 세계평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비상한 관심이 국내외적으로 상승하였다. 이러할 때, 1988년 3월29일, 서울대 총학생회장 유세에서 김종기 후보가 “사랑하는 동포, 김일성 대학 청년학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로 시작해서 남북한 국토순례대행진과 남북청년학생 체육회담 개최를 제안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각 대학에서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제안을 지지하는 의사표시를 이어갔다.

드디어 5월14일에는 전대협 주최로 6.10남북청년학생회담 실무회담 성사 및 공동올림픽 개최를 위한 범시민학생 결의대회가 치러졌는데 60여개 대학 1만7천여명이나 집결하였다. 대회에서는 회담에 나갈 학생대표를 선출하였고 회담 날짜는 6.10항쟁 1주년이 되는 6월10일로 정했다. 북한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150여개 대학 5만여 학생들이 남북학생회담 제안 환영집회를 개최하였고 일본내 54개 대학에 재학중인 교포학생 대표 250명은 5월24일 일본 도쿄에서  6.10 남북학생회담을 지지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5월15일에는 서울대생 조성만군이 올림픽 공동개최, 미군축출, 군사정부 퇴진 등을 외치면서 투신·자결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88서울올림픽의 공동개최는 남북화해와 세계평화에 긍정적인 계기로 작용할 수 있기를 바라는 국내외 민중들의  초미의 관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동시에 학생들의  움직임에 대한 관심과 지지도  높아져 갔다. 6.10남북학생회담이  민중들에게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자 미국과 노태우 정부는 몹시 당혹스러워 하면서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미국은 유엔사를 통해 판문점 출입을 불허하고 국무성 대변인을 통해 남북한의 인적 교류와 접촉은 정부 주도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논평을 발표하였다. 노 정권은 남북학생회담 제안이 의외로 폭넓은 관심을 불러일으키자 일단은 학생들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북한 접촉 창구는 정부로 일원화 하여야 한다는 창구단일화를 내세우고 학생들의 자주적 남북교류는 틀어막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노정부는 남북학생회담 관련 학생 35명을 지명 수배하고 6월10일 당일에는 2만6천명의 경찰을 동원하여 학생들의 판문점행을 원천봉쇄하였다. 결국 남북학생회담은 당국의 원천봉쇄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올림픽 공동개최도 결렬되어 버리자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 올림픽 보이콧을 제안했으나 소련과 중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88서울올림픽에 참가하였고 사회주의권이 대거 참여하자 88서울올림픽은 160여개국이 참가하는 올림픽사상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 되었다.

분단의 철책선을 넘은 사람들

남북 교류와 평화·통일의 기운이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상승기류를 타다 올림픽이 끝나면서 소강 상태로 들어가는 듯했다. 6월4일에는 김근태가 감옥에서 출소했다. 근태 형은 이부영이나 독자민중후보쪽까지 두루 접촉하면서 대선 패배의 좌절감에서 민족민주운동진영이 벗어나서 다시금 운동의 구심을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 결과로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약칭 전민련)이 1989년 1월21일 창립되었다. 나는 인천민족민주운동연합(약칭 인민연) 의장을 맡게 되었다. 전민연이 출범하고 얼마 되지 않아 1989년 3월25일 문익환 목사가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북녘 땅에 첫발을 내딛는 일이 벌어졌다.

▲ 문익환 목사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서 박용수의 “겨레말사전”을 선물했다. ⓒ사단법인 통일의 집

문 목사는 북한 방문기간 동안 김일성 주석을 만났고 문 목사는 개인 자격이기는 하지만 북한의 조국통일위원회 허담 위원장과 공동성명까지 채택하였다. 문 목사가 남한에 들어오자 노 정권은 문목사를 투옥하였다. 노 정권은 문목사 사건을 활용하여 다시금 공안정국의 분위기를 조성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미 봇물은 터졌는데 어찌 민의 움직임을 잠재울 수 있겠는가? 이번에는 한국외국어대생 임수경 양이 전대협 대표자격으로 평양축전에 참가하였다. 임수경은 6월20일, 서울을 출발하여 도쿄, 서베를린을 경유하여 열흘만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임수경이 평양에 도착하자 수십만의 평양시민들이 임수경을 환영하고 보기 위하여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평양축전이 끝나자 임수경은 곧바로 국제평화대행진에 참가했다. 행진단은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판문점으로 향하였다.

판문점에 도착한 임수경과 행진단은 미군사령부에게 임수경대표와 임수경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북한에 간 문규현 신부의 판문점 통과를 허락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미군사령부는 계속 거부했지만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그대로 판문점을 돌파하였다. 임수경은 곧바로 구속되었다.

전민련은 문 목사와 임수경으로 인해 남북의 “우리는 하나다”라는 뜨거워진 평화통일의 열기를 민족대단결을 공고히 해야하는 작업으로 나아가기 위해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들의 범민족대회를 제안했다. 남과북 그리고 해외동포는 1990년 8월15일 판문점에서의 범민족대회 개최를 전격합의했다. 노 정권도 범민족대회를 거부할 수가 없어서 1990년 8월13일부터 17일까지를 민족대교류 기간으로 선포함과 동시에 범민족대회 성사를 위해 협조할 의사가 있다고 발표하였다.

범민족대회를 명분으로는 거부할 수 없어서 협조한다고는 해놓고 실제로는 범민족대회가 성사되지 못하도록 교묘하고 악랄한 수법들을 동원하였다. 7월26일-27일에도 서울에서 제2차 실무회담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당국의 교란 술수로 열리지 못했다. 결국에는 8월15일 판문점의 범민족대회를 원천봉쇄하여 무산시켜 버렸다.

▲ 군사분계선에서 월경 직전의 임수경과 문규현 ⓒ오픈 아카이브(https://archives.kdemo.or.kr/isad/view/00717188)

여기까지 역사를 파고 들어가보니 확실히 잡히는 것이 있었다. “아하! 그러니까 부평역 앞 집회는 노 정권이 범민족대회를 지원하겠다고 의사표시는 해놓고 아직은 범민족대회를 무산시키기위한 계획은 수립하지 못한 때였구나! 그래서 상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리를 놓아주도록 지시했구나!”

이미 역사의 강물은 평화를 향해 가고

문득 장의균 사건이 떠올랐다. 재일유학생 장의균을 거대 간첩단조직으로 조작하여 6.10항쟁 지도부를 와해시키려고 했을 때 나도 안기부에 끌려가 간첩단의 일원으로 엮일 뻔 했다. 6.29선언이 발표되면서 풀려났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간발의 차이로 운명은 바뀔 수 있음을 연속적으로 체감하였다. 냉전종식을 향한 거대한 역사의 강물은 완전한 냉전종식이라는 바다에 도달하기까지 이제 흘러가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1989년 12월에는 미·소 몰타정상회의에서 부시와 고르바쵸프가 냉전종식을 공식선언했다. 1990년 1월에는 한·소 수교가 이루어졌다. 마침내 1991년 9월17일에는 남북한이 유엔을 동시가입하였다. 1992년 8월24일에는 한·중이 수교하였다. 정말 태풍 링링처럼 엄청난 속도가 붙었다.

김정택 목사  kjt94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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