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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마루를 쫓아 사는 존재우리 시대 하느님과의 소통 방법 (5)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 승인 2019.10.06 17:27

한얼의 얼김이 우주 전체와 우주 안의 모든 만물 속에 두루 퍼져 있다. 우주생명의 비롯이고 씨알이고 원칙인 측면에서 고찰된 하느님이 곧 ‘한얼님’이며 ‘한울님’이다. 텅빔으로서의 우주가 하느님의 마음이기에 그리고 이 마음이 무한우주 속에서의 유한우주의 다양한 펼침을 다 담고 있기에, 우주의 변화와 진화 속에 그 마음은 한얼의 얼김으로 작용한다.

하느님은 우주의 말[마루], 말씀이다

우주 속에 보이지 않게 담겨 있는[없이 있는]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우리는 마루뜻[종지(宗旨)]이라고 한다.(1) 그리고 이러한 우주진화의 마음은 낱낱의 우주만물 속에 각인되어 세세대대 전해지는데, 그것이 곧 속알이며 씨알이며 바탈이다.

몸[물질]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마음으로도 존재하는 생명체에 이르러 우주 속 하느님의 마음과 생명체의 마음 사이에서 교통이 펼쳐진다. 마음뿐이 아닌 정신으로 존재하는 사람에 이르러 하느님의 뜻을 읽어내려는 노력이 시작된다. 이것이 곧 생각이다. 우주생명[한얼]의 긋[끄트머리]이 이어이어 이어져 우리 안의 속알과 씨알로 전해져 우리의 얼존재[얼나]를 이루고 있는데, 이 얼나가 자신의 비롯이고 말미인 한얼을 생각하게 만든다.

한얼이 일으킨 생각의 불꽃으로 인해 사람은 하느님을 그리워하게 되고 그 그리움을 그림으로 그렸고 이 그림이 줄여져 글이 되었다.(2) 우주에 있는 모든 만물은 말없이 자신의 몸집을 태워 하늘의 뜻을 이행한다. 이것이 우주생명의 원칙이며 생명의 의미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사뢰는 존재인 ‘사람’은 자신 안에 담겨 있고 우주 전체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뜻을 읽어내야 한다.(3) 이렇게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게 되면서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말을 하고 글을 쓰게 된다. 그림이건 말이건 글이건 모두 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생각이 문제요 말씀이 문제다. 생(生)도 사(死)도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생각이다. 사람에게는 진리의 생각이 문제다. 위로 올라가는 생각이 문제다. 위로 올라가는 생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참이다. 나를 통한 성령의 운동이 말씀이다. 성령은 내 마음 속에서 바람처럼 불어온다. 내 생각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은 것이 말씀이다.”(4)

다석은 “오직 하느님의 뜻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영원히 갈 말씀은 이 혀로 하는 말이 아니라 입을 꽉 다물고도 응답할 수 있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강조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 소리를 받아서 귀로 들을 필요가 없다. 하느님의 말씀은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경전이다.”(5)

다석에 의하면 우리말 ‘말’은 ‘마루’에서 나왔다. 하느님의 마루(뜻)라는 의미가 우리말  ‘말’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말은 하느님의 마루다. 하느님의 마루가 우리의 얼 속으로 들고날 때 우리 안에서는 생각의 불꽃이 튀게 된다. ‘말슴’은 그렇게 튀는 생각에 답하면서 하느님의 마루를 우리의 말로 세우는 것이다.

▲ 사람에게 주어진 이성이 과연 하느님의 마루를 쫓아 사는 것이 가능할까 ⓒGetty Image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의 마루를 세우기 위해 인간의 말을 쓰는 것이 ‘말씀’이다. 이렇듯 하느님의 뜻을 찾아 그 뜻에 따라 말을 세우고 말을 쓰며 사는 삶을 다른 말로 말숨을 쉬며 사는 ‘말숨살이’라 한다. 다른 말로 그것은 말을 쓰며 사는 ‘말씀살이’이다. 말숨을 쉰다는 것은 영원을 그리워하며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속에 타고 있는 참의 불꽃을 태우는 것이다.

말숨이 곧 하느님이기에 말숨을 쉬면서 우리는 몸이 아닌 얼로 숨을 쉬는 것이다. ‘얼’로 숨쉬는 한에서 말숨은 다른 말로 ‘얼숨’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한얼[우주생명]과 하나가 되어 쉬는 숨이다. 그러기에 얼숨은 또한 ‘우숨’(우주적인 숨)이다. 가장 큰 우숨은 절대생명과 하나 되는 가운데 모든 것을 초월해서 짓는 웃음[우숨]이다.(6)

얼숨은 바로 존재의 소리를 듣고 그에 따라 사는 양상이며, 그 임무는 우주 안의 보이지 않는 한얼을 우주만물 속에 펴차는[우주만물에 펼쳐 채우는] 데에 있다. 다석은 유비적으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펴참이다’라는 말을 한다. 다석에 따르면, 우리는 가슴에 생명의 숨길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배(속)에는 얼뜻을 가지고 있다.

태양과 씨알이 하나가 되듯 우리의 얼나가 한얼을 만나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씨알이 태양을 만나 바탈이 터서 자라 나무가 될 때 태양과 하나가 되듯, 우리의 속알(바탈)이 한얼을 만났을 때 비로소 우리도 나무가 될 수 있다. 다석은 이처럼 생명의 잎과 바탈의 꽃과 얼뜻의 열매라는 차원을 고루 헤아려서 인간의 참 생명의 길을 유추해낸다. 우리는 생명의 숨결을 받아 잎사귀를 키우고 우리의 바탈을 꽃피워 얼뜻의 열매를 맺는다.(7)

하느님은 우주의 지향점[목적]이다

다석은 우주의 비롯이며 마침을 ‘하나[님]’에서 본다. 온통 전체로서의 텅빔이고 모든 상대적 유와 상대적 무를 다 담고 있는 빈탕한데로서의 절대공(絶對空) 또는 절대무(絶對無)를 ‘하나’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바로 이 하나를 추구하는 것이 모든 인생과 종교와 만물의 본분이고 사명이다. 인생과 만물은 ‘하나’로 돌아가는 것[귀일(歸一)]이다.

“(모든 것이) 하나로 시작해서 종당에는 하나로 돌아간다. 대종교가나 대사상가가 믿는다는 것이나 말한다는 것은 다 ‘하나’를 구하고 믿고 말한다는 것이다. 신선이고 부처도 도(道)를 얻어 안다는 것은 다 이 ‘하나’다.”(8)

하늘, 하느님, 하나를 동일시하면서 다석은 “하나를 알고 하나로 들어가라.”고 하였다. ‘하나’는 앎의 대상만이 아니라 삶의 대상이고, 참여와 일치의 대상이다. 하나를 알고 하나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사는 것”이다.(9) ‘하나’는 존재와 생명의 근원과 목적이며 생명 진화와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이다.

생명 진화와 역사의 중심에 있는 인간에게는 하나[하느님, 하늘]을 찾고 하나로 돌아가려는 본성이 있다. 하늘로 머리를 들고 곧게 선 인간의 모습이 하늘을 그리워하는 본성을 나타낸다. “하느님을 찾아가는 궁신(窮神)은 식물의 향일성(向日性)과 같이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다.(10)

“하느님은 무한한 공간의 큰 늘(常)이요 한 늘(常)인 영원한 무한우주다. 우리 머리 위에 받들어야 할 님이시라 한우님이시다.”(11)

우리가 받들어야 하고 추구해야 할 지향점으로서의 하느님을 다석은 ‘한우님’ 또는 ‘한웋님’이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부른다. 이러한 하늘의 하나(님)인 한웋님을 찾는 인간의 본성은 사랑의 대상을 찾는 것으로 표현된다. 사랑의 대상은 “마음 그릇이 커감에 따라 자꾸 높은 님으로 바뀐다. 그 기량이 아주 크면 사랑의 대상을 영원 절대인 하느님에 둔다.”(12)

사람이 하느님을 찾아 올라가는 만큼 사람의 얼은 커 간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하느님]를 그리워하며 하나를 향해 나가는 존재이므로, ‘하나[하느님]’와의 관련 속에서 인정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따라서 다석은 ‘하나[님]’를 향해 올라가는 과정이 있을 뿐, 완전한 진리도 완전한 인생도 없다고 한다. 인생은 “옛적부터 자꾸 하나를 향해 시험의 길을 걷고 있다.”(13)

다석에게 ‘하나’이신 님을 그리워하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통하는 나의 바탈,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생각하고 추리하여 영원에 들어가는 길은 자기의 속알(본성)을 깨치고 자기의 뿌리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14) 하느님께 가는 길은 자기의 속으로 들어가서 치성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15)

다석은 이 유일무이한 ‘하나’를 원일물(元一物, 원래 하나로 있는 것)이라고 한다. 본디의 하나인 원일물이 절대 진리 자체[절대진리물]이다. 다석은 ‘원일물’을 ‘본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상대 세계의 유무에 속하지 않은 원일물, 절대 ‘하나’가 ‘내’ 속의 속에 있다. 따라서 절대 진리인 ‘하나’를 이루려면 스스로 힘쓰고 스스로 이루어야 한다.(16)

다석은 “없[무(無)]에 가자는 것, 이것이 내 철학의 결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없’이 내 속에 있다고 말한다. ‘없’은 상대 세계와 단절된 것이 아니다. ‘없’은 상대적 존재[유(有)]의 세계를 초월하면서도 상대적 존재와 함께 전체 하나를 이룬다. 하느님은 ‘있음[유(有)]’을 나타내는 물질과 ‘없음[무(無)]’를 나타내는 맘을 통전시키는 ‘하나’이다. “몬, 맘은 둘이 아니고 하느님[큰 하나]만이 계시니라.”(17)

없이 계신 하느님은 유와 무를 종합한 전체로서의 하나이다. “유무를 합쳐 신을 만들고, 천지유무를 통하는 것이 신통이다. 신은 하나이다.” 전체로서의 하느님의 자리는 온갖 시비를 넘어서서 ‘하나 됨’에 이르는 자리이다. “시시비비 따지는 것은 내가 지은 망령이요 …… 하느님을 믿고 만족하면 일체의 문제가 그치고 만다. 시비의 끄트머리는 철인의 경지에 가야 끝이 나고 알고 모르는 것은 유일신에 가야 넘어서게 된다.”(18) 없이 계신 하느님과 통하면 신통하여 천지유무를 통하고 옳고 그름, 앎과 모름을 넘어서 하나로 통하게 된다.

“모든 문제는 마침내 하나(一)에 연결되어 있다. 문제는 언제나 하나[전체]인데 하나(一)로 참 살고 하나(一)로 돌아가자는 것이다.”(19)

21세기 영성의 시대를 기대하며

지금 인류는 절실하게 새로운 사유의 패러다임, 인식론적 틀, 창조적 해석학을 필요로 하고 있다. 서양에서 유래해온 이성중심의 사유는 인류에게 무한한 진보의 꿈을 심어주며 인간의 존재를 무한한 공간의 확장과 점령에로 뻗어나가게 했다. 이제 아마도 76억의 인간에게 이 지구는 너무나 좁은지 모르겠다.

그래서 존재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더 넓은 우주에로의 여행이, 다른 행성에로의 이주가 필연적인 미래의 과제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러한 끝없는 공간확장의 욕망과 태도가 존재중심에 사로잡힌 하나의 특정한 존재방식으로서 잘못된 존재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때가 되었다.

존재에 대한 인간측의 관계축을 감성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럴 경우 우리는 감각주의자와 실증주의자처럼 우리의 오관으로 감각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경험의 폭을 더 넓혀, 존재에 대해 인간은 지성적으로 관계를 맺는다고 할 경우에도 지성이 놓여 있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 때문에 존재를 다 포용할 수 없음을 시인해야 한다. 지성에 바탕한 우리의 경험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 제약되어 있지만 무한히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갈 수 있는 사유는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다.

이러한 사유의 도움을 받아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 전체에서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러한 능력을 우리는 이성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성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존재를 그 전체에서 어떠한 방식으로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에 대응되는 인간측의 관계축은 이성이 항상 맡아 온 셈이다.

그런데 은연중에 우리는 이 관계를 역전시켜 마치 이성에 의해서 파악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성중심의 사유태도와 생활방식 속에서는 존재의 바깥이라 생각되는 무(無) · 공(空) · 허(虛)가 없는 것으로 제외되고 삭제되고 망각되고, 망각된 것이 은닉되어 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반이성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몰이성적인 것으로 낙인찍혀 세상에서 내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이성을 둘러싼 현대의 논쟁이 결국 근대성을 둘러싼 논쟁이며 탈근대의 논쟁인 것이다. 현대를 근대성의 미완으로 파악하고 있는 하버마스는 이성개념을 좀 더 폭넓게 규정할 것을 제안한다. 이성을 떠나 갈 곳이란 비이성, 반이성, 몰이성일 텐데 그것들은 인류에게 더 심한 파국을 안겨줄 뿐 결코 구원의 대책이 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버마스가 발견한 것은 이론적 합리성, 도덕적 합리성 그리고 미학적 합리성을 아우르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으로서 <생활세계적 이성>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점에서는 하버마스가 옳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이성이란 곧 ‘생활세계적 이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성이란 곧 생활세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로고스 중심적인 서양의 전통 속에서 생활해온 하버마스가 제안할 수 있는 대안적인 이성이라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서구적인 생활세계의 산물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 번 물음을 던져 다른 생활세계에서는 다른 형태의 ‘이성’은 없었는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문화권, 다른 세계에서는 존재에 대한 인간측의 관계축을 무엇으로 보았는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한국인의 생활세계에서도 존재를 파악하는 인간측의 능력을 이성(理性)이라 보았다. 그렇지만 이때의 이성을 서구적인 로고스나 ratio나 Vernunft, reason를 번역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세계의 산물로서 우리 나름의 독특한 ‘생활세계적 이성’에 의해 각인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세계적 이성이 서구적인 이성과는 달리 무 · 공 · 허와도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오히려 이 무 · 공 · 허가 존재 내지는 유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무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간의 독특한 능력을 서구적인 이성과 구별짓기 위해 ‘얼’ 또는 ‘영성’이라 이름할 수 있다. 인간의 능력을 이성에서 영성에로 한 단계 더 높이 끌어올릴 때 우리는 현대와 같은 ‘우주적 시대’에 걸맞는 인간의 위상을 정립할 수 있다고 본다.

신적인 것이 배제된 철두철미 세속화된 생활세계적 이성에서는 성스러움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다. 우리는 한 번 현대가 처한 위기가 우리가 내몰아 버린 신성과 싹 쓸어버린 성스러움으로 인해 생겨난 것은 아닌지 물음을 던져 보아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우리는 한국인이 서양인과는 다른 존재이해의 지평에서 하느님과 관계맺은 소통의 방식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한국인의 존재이해의 지평이 실상은 ‘존재’가 아닌 ‘없음’[무(無)·공(空)·허(虛)]임을 확인하였다. 그러한 없음의 지평에서 파악된 신도 ‘최고의 존재자’나 ‘제일 원인’이나 ‘절대의 존재자’가 아니라, ‘절대공’이나 ‘텅빔’이나 ‘빈탕한데’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한국인이 없음의 지평에서 한국인의 독특한 ‘생활세계적 이성’ ― 차라리 ‘생활세계적 영성’ ― 이 파악한 다양한 신 개념을 고찰하면서 그 안에 간직되어 있는 신의 독특한 면모들을 제시해보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의 하느님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는 크게 네 가지를 구별하여 특징지을 수 있다. 첫째, 온통 하나로서의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다. 무극과 태극 그리고 영극(靈極)까지도 포함하기에 텅빈 온통 속에, 가이-없는 ‘빔-사이[공간(空間)]’와 끝없는 ‘때-사이[시간(時間)]’ 안에서 생성, 소멸, 변화하는 모든 것을 다 품고 계시며 주관하는 ‘하나님’, 그리고 변화의 한가운데에서도 온통 전체를 유지·보존하고 끝없는 힘돌이, 열돌이, 숨돌이, 피돌이로써 되어감의 맴돌이와 되삭임, 되먹임하고 이루어나가는 신비로운 힘으로서의 ‘하나님’이다.

즉 ① 텅빈 온통, ② 무시무종(無始無終)의 텅빔 속에서 끝없이 벌어지는 유시유종(有始有終)의 생성·소멸·변화의 사건 전체, 그리고 ③ 이 모든 것을 절대적 하나인 온 전체 속에서 운행하시는 신비스러운 힘 그 자체 ― 이러한 세 가지 국면을 지니신 ‘하나님’으로서의 하느님이다.

둘째는 이중 무극만을 떼어내 고찰한 절대공으로서의 ‘하나님’이다. 모든 있음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텅빔 그 자체를 의미한다. 모든 존재의 밑동과 비롯으로서의 ‘하나님’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리로 돌아가야 하는 ‘하나님’은 ‘한우님’ 또는 ‘한웋님’이라고 불린다.

셋째는 태극, 즉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되어감의 전개과정, 생성, 소멸, 변화를 주관하는 ‘하늘님’으로서의 하느님이다. 생명의 차원이 강조되면 ‘한얼님’이라고 불리고, 주재의 능력이 강조되면 ‘한울님’으로 불린다.

넷째는 흔히 하느님의 마음이라 표현되는 우주의 얼로서의 ‘한얼님’이다. 텅빔 속에 있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얼에 따라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서로 교통할 수 있다.

논의를 끝내며 끝으로 이러한 한국인의 독특한 신관이 새로운 정신성, 새로운 영성, 새로운 종교성의 시대에 지구인이 필요로 하는 통합적 신관 구축에 도움이 되리라 희망해본다.

미주

(미주 1) 다석은 우리말의 ‘말’이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한다. “말은 하늘 마루 꼭대기에 있는 말이다. 우리는 그 말을 받아서 씀으로 하느님을 안다. 그렇게 말을 받아서 쓴다고 말씀이다.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써야 한다.” 류영모, 『명상록. 진리와 참 나』, 박영호 풀이, (서울: 두레, 2000), 130/1.
(미주 2) 참조. 같은 책, 117.
(미주 3) “하느님이 [291] 우리 인간에게 높은 생각을 하게 하고 그말을 하게 시키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리켜 ‘사ㄹ·ㅁ(사룀)’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사뢰는 중심이 우리 ‘사ㄹ·ㅁ’이란 말입니다.” 유영모,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서울: 현암사, 2006), 290/1.
(미주 4) 류영모, 『명상록. 진리와 참 나』, 110.
(미주 5) 같은 책, 122.
(미주 6) “언제 숨이 질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다. 숨지기 전에 숨을 길러놓아 영 지지 않는 목숨을 길러내는 것이 오늘의 할 일이다. 그 길은 목숨을 말숨으로 바꿔놓는 일이다. 목숨을 말숨으로 바꾸고 말숨을 웃숨으로 바꾼다. 웃숨(天命)을 웃는 말숨만이 영원한 목숨에 들 수가 있다.” 류영모, 『제소리. 다석 류영모 강의록』, 김흥호 편, 76. 
(미주 7) 참조. 김흥호, 『다석 일지 공부. 류영모 명상록 풀이 1』, 510 이하.
(미주 8) 유영모, <까막눈>, 『다석 일지』(영인본) 상, 1982, 833.
(미주 9) 유영모, <여오>, 『다석 일지』(영인본) 상, 1982, 832.
(미주 10) 유영모, <매임과 모음이 아니!>, 『다석일지』(영인본) 상, 1982, 743.
(미주 11) 류영모, 『명상록. 진리와 참 나』, 239. 다석은 ‘한우님’이라는 표현보다 ‘한웋님’이라는 표현을 좋아했음이 그의 강의에서 확인되고 있다. “님. 언제든지 머리에 일 수 있는 ‘님’, ‘한웋님’, ‘한울에 있는 님’입니다.”(유영모, 『다석 강의』, 896] “한웋님 할 때의 ‘우’는 위아래를 상대적으로 말한 것이고, 상대(相對)에서 ‘위’를 높이 들어올린다는 뜻이어서 ‘ㅎ’ 받침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유영모, 『다석 강의』, 897) “‘한웋님’의 ‘웋’에서 이응(o)은 목구멍을 그대로 둥글게 하면 소리가 나옵니다. 더 깊은 소리를 내려면 ‘ㅎ’ 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를 더 깊이 받드는 뜻에서 ‘웋’이라는 소리가 안 나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한’에서도 첫소리를 ‘ㅎ’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한웋님’입니다.”(유영모, 『다석 강의』, 912)
(미주 12) 박영호,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 두레, 2001, 33.
(미주 13) 유영모, <하나 되게>, 『다석 일지』(영인본) ㊤, 1982, 812.
(미주 14) 유영모, <하나>, 『다석 일지』(영인본) ㊤, 1982, 757, 760.
(미주 15) 참조. 박재순, 『다석 유영모』, 현암사, 2008, 340/1.
(미주 16) 유영모, <까막눈>, 『다석 일지』(영인본) ㊤, 1982, 833-6.
(미주 17) 류영모, 『명상록. 진리와 참 나』, 328, 330, 337.
(미주 18) 유영모, <여오>, 『다석일지』(영인본) ㊤, 1982, 832.
(미주 19) 박영호 엮음, 『다석 유영모 어록』, 두레, 2002, 40.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saemo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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