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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사변이 아니라 현실적 경험삼위일체 하나님과 창조 (1)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0.01.04 17:17

칼빈은 지난 장에서 하나님께서만 참된 예배를 받으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13장에서 그는 경배와 섬김을 받아 마땅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진술합니다. “성경이 창조 이래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있다는 것이다”(I.xiii.1). 여기서 칼빈은 삼위일체 교리라는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신비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를 말하고자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한 분이신 하나님 안에 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 위격의 하나님이 계시고, 이 세 위격은 동시에 동일한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하는 기독교의 특유한 유신론입니다.

성서가 말하지 않는 삼위일체

그런데 성경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암시하는 말씀들은 있지만,(1) 삼위일체라는 말 그 자체가 성경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셋이며 하나’이고 ‘하나이며 셋’인 수수께끼와 같은 공식 자체가 성경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교리적인 용어는 고대 헬라 철학에서 차용한 고대 교회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고대 교회가 그저 무턱대고 이 까다로운 교리를 만들어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 초기부터 하나님을 잘못 알고 가르치는 이단 사상에 맞서서, 성경이 증언하고 기독교인들이 체험한 하나님을 될 수 있는 대로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교리를 만들어냈던 옛 교부들은 교회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고, 그리고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이 세상에서 변화시키는 일을 계속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는 이 삼위일체 교리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칼빈 역시 “삼위가 존재한다는 것과 이 삼위의 각자가 바로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여러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라는 우리의 확신”은 성경이 증거하며 보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와 ‘위격’이라는 표현은 성경해석에 도움이 되고, 따라서 인정할 수 있는 표현”이라고 주장합니다(I.xiii.3).

여기서 칼빈의 의도는 단순히 고전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당시 적대적인 두 진영 사이에서 중용을 찾고자 했습니다. 한쪽에는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 용어들을 신학에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성서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 대하여, 칼빈은 어떤 용어들이 신실하게 성경의 교리를 반영하는 한 성경에 없는 용어들을 사용할 수 있다고 반박합니다. 예컨대, 아리우스파 이단은 “동일본질”(Homoousios) 같은 헬라 철학에서 차용한 용어들의 도움으로 논박되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I.xiii.4).

아리우스파 이단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에게 있는 어떤 서열이나 순서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던 자들입니다. 이들의 주장을 “종속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에 의하면 한 분 위대한 하나님, 즉 영원한 아버지가 있고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의 대리자들이고, 아버지의 권위와 힘에 비하여 적은 능력을 가진 존재일 뿐입니다. 이것은 유일한 하나님을 옹호하는 입장이지만, 복음과 신약성경의 메시지에 모순되는 주장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와 성령이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에 의해 높이 올려진 피조물이나 제2위의 신성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구주가 될 수 있으며, 어떻게 성령이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이 될 수 있겠습니까?

▲ 성령께서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오신다는 것을 형상화한 작품 ©Getty Image

또한 칼빈은 종속론 못지않게 고대교회를 위협했던 소위 ‘양태론’에 대해서도 그러한 용어들의 도움으로 논박할 수 있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양태론은 사벨리우스의 주장을 말하는데,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중요하지 않으며, 이 명칭들은 구별을 위해서 설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며, 이러한 종류의 속성은 아주 많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I.xiii.4).

예컨대, 그는 하나님이 한 드라마에서 세 가지 역할을 담당하는 한 사람의 배우와 같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내적 존재를 명확하게 나타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진정한 하나님은 마치 한 드라마에서 세 가지 역할을 담당한 한 사람의 배우처럼 세 번이나 가면을 바꿔 쓰고 역사에 나타난 숨어 있는 제4자인 셈이고, 또 아마도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날 수도 있는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인 셈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탄생, 가난한 자들 가운데서의 예수의 사역, 그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오심 등의 사건들이 단지 ‘현상’들이었을 뿐이고, 하나님의 참 본성에 대한 신뢰할만한 지표들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만약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참 정체성을 깊이 감추는 이러한 외적인 가면들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이 진정 누구라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칼빈은 이러한 사악한 사벨리우스의 주장이 한 하나님 안에서 의 세 위격의 존재가 참되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했던 고대의 훌륭한 학자들에 의해 논박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I.xiii.4).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성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표현들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지만, 성경의 교리를 신실하게 반영하기 때문에 신학에서 사용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쪽에는, ‘성서주의자들’과 대조되는, 피에르 카롤리 같은 ‘전통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관례상 성별된 전문용어는 단지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요구되는 것들이었습니다. 카롤리는 칼빈을 삼위일체 반대론자라고 공격했던 사람입니다. 칼빈은,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교부시대의 격렬한 용어상의 논쟁들이 말해주듯 이 언제나 사용되어야 하는 말들에 대한 폭넓은 동의가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반박합니다. 그는 “실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가 서로 어떤 특성에 의해 구별된다는 이 한 점에 일치한다면, 이 용어들은 잊혀 져도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I.xiii.5). 그러나 진술된 그의 입장은 완벽하게 전통적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같은 본질을 공유하는 별개의 세 위격들입니다.

성자와 성령의 신성

칼빈은 7절부터 13절까지 성자의 신성을, 그리고 14절부터 15절까지는 성령의 신성을 다루고, 16절부터 20절까지는 그들의 본질적인 단일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세 위격들 사이의 현실적인 차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편의상 용어들을 정리하고 넘어 갈 필요가 있습니다. 한 분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하여 말할 때, “‘본질’(essence)은 단일하다”와 같이 주로 ‘본질’로 번역되었지만, ‘본체’로 번역된 곳이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리고 세 ‘위격’에 대해 말할 때는 ‘본체’ 또는 ‘위격’(hypostasis), ‘실재’(subsistence), ‘실체’(substance), ‘인격’(person) 등 다양하게 번역되었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위격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교회사 속에서 성부의 신성이 문제시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성자와 성령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앞서 언급했던 4세기의 아리우스파들은 예수가 단지 피조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성령 반대론자들은 성령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에 대해 주석적인 논증을 시도합니다. 여기서는 이 모든 논의를 세부적으로 검토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대신에 칼빈이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논증하는 방식만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칼빈에게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은 사변적인 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경험을 통해서 도달한 것이라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실로 경건한 자는 자신이 소생되고, 눈이 떠지고, 구원받고, 의롭게 되고 또 성화되었다는 것을 느낄 때에 의심의 여지없이 바로 곁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지각하게 된다”(I. xiii.13). 요컨대, 칼빈이 보다 특별하게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세 위격들의 신성이 이론적인 개념이 아니라 신자의 현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생시키고, 빛을 비추고, 구 원􏰁고, 의롭게 하거나 거룩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 성경 안에 있는 어떠한 활동이라도 신자는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삼위일체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위격들의 신성을 논증하는 칼빈의 방식들입니다. 이를테면, 그는 모든 은사들의 창시자는 단지 하나님일 수밖에 없지만, 서신들의 첫머리에 있는 인사말들(롬1:7; 고 전1:3; 고후1:2; 갈1:3)이 말하듯이, 성부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는 성자의 중재를 통해서 오며, 또 성자는 성부와 동일하게 권능에 참여함으로써 성자 자신이 바로 그 모든 은사의 창시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성자의 신성을 추론합니다(I. xiii.13). 같은 것을 성령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단지 하나님에게서 올 수 있는 “소생”과 “중생”, “칭의”와 “성화”(참조, 고전6:11), “진리, 은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일체의 선”을 경험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이 경험이 다만 성령에 의해서 제공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신성을 논증합니다(I.xiii.14). 칼빈은 “이 실제적인 지식이 아무런 쓸모없는 어떤 사변보다 한층 더 확실하고 한층 더 견실한 지식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I.xiii.13)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칼빈은 한 분 하나님과 세 위격들의 관계와 차이에 대해 말합니다. 세 위격들은 진실로 별개이나, 그들은 같은 본질을 공유합니다. 이 명백한 모순을 설명히기 위해, 칼빈은 ‘실재’(subsistence) 의 개념에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위격’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있는 한 ‘실재’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것은 다른 실재들과 관계되면서 교류할 수 없는 특성에 의해 구별된다. 우리가 말하는 ‘실재’라는 용어는 ‘본질’과는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만일 말씀이 단순히 하나님 이고, 다른 특성을 지니지 않았다면,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 1:11)라고 한 요한의 말은 부당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뒤에 그는 말씀은 또한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것을 덧붙이는데, 그는 여기서 우리 에게 단일성으로서의 본질을 상기시켜준 것이다(I.xiii.6).

이 구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말은 ‘실재’인데, 칼빈이 그것을 프랑스어 résidence(거주)로 번역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의 실재가 어떤 다른 것과 함께(요1:1에서처럼) 또는 안에 거주합니다. 여기서 ‘어떤 것’은 본질입니다. 한 위격이 한 본질 안에 거주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 본질이 존재하는 양식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본질의 단일성”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한 본질 안에 있는 실재”라는 표현은 본질과 그 본질이 실재하는 방식 사이의 차이를 가정합니다. 세 위격 들은 같은 본질을 공유하지만, 칼빈이 형용사 “교류할 수 없는” 것으로 제한한 특질들을 보유합니다. 실로, 성부와 성자는 둘 다 하나님이지만, 성부가 아니라 성자 홀로 죽고 다시 사셨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는 다른 보혜사(요14:16, 15:26)로서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자와 성령의 차이가 단지 명목상의 것이 아니라 현실적 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I.xiii.6, xiii.17).

그러나 칼빈은 세 위격의 현실적인 차이를 상세하게 설명하기 전에 헬라의 교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약390년경 사망)의 말을 인용하여 다시 한 번 더 세 위격의 밀접한 관계성을 확인합니다. “나는 즉시 삼위의 광채에 둘러싸이지 않고는 단일성을 상상할 수 없다. 또한 곧바로 단일성을 상기하지 않고는 삼위를 분별할 수도 없다”(I.xiii.17). 그리고 그는 세 위격 사이에 있는 현실적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다시 오래전에 확립된 전통을 따라서, 1) 활동의 기원, 2) 그것의 이유 또는 배열, 그리고 3) 그것의 실행 혹은 시행을 구별합니다.

성부에게는 모든 일의 처음과, 만물의 근원과 원천이 부여된다. 성자에게는 지혜와 계획과 만물의 질서 있는 배열이 부여된다. 성령에게는 모든 일의 능력과 효과가 부여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마음은 자연적으로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어서 그에게서 나오는 지혜를, 마지막으로는 그가 그의 계획의 작정을 실행하는 능력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자는 오직 성부에게서만 발생되며 동시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생된다고 말한다(I.xiii.18).

필리오케

성부는 모든 행동의 효과적인 원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인 성자는 모든 행동의 이치(또는 로고스)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모든 행동의 실행자입니다. 이것은 칼빈이 성령은 성부와 성자 둘 다에게서 발현하지만, 우선 어떻게 성자가 성부에 의해 생각되는지를 설명하게 하고, 그리고 둘째로 같은 하나님이 명확한 이유로(성자) 주도권을 갖고(성부로서) 특별한 방식으로(성령의 행동을 통해) 각각의 경우 에 행동하는지를 보여주게 합니다. 바로 여기서 칼빈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생”한다는 서방교회 전통의 “필리오케”(filioque)를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필리오케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고(필리오케- 그리고 아들로부터), 그리고 둘 다로부터 나온다는 서방교회의 교리입니다. 동방 교회는, 니케아 신조에서처럼, 영은 아버지에게서만 나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분열시킨 중요한 원인들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필리오케 논쟁’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초기 교회사 중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를 손꼽으라면, 동·서방 교회를 막론하고 니케아신조(325)에 동의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니케아신조는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온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은 서방교회는 라틴어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를 추가하여 성령을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809년 아헨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교황 레오 3세의 재가를 얻어 ‘필리오케’는 서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신학에서 규범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성령의 ‘이중 산출’개념은 동방교회 학자들을 크게 자극했습니다. 이 개념은 그들에게 신학적인 난점을 제기했을 뿐 아니라, 소위 불가침적인 신조 본문을 변조한 것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1054년에 발생한 동·서방교회의 분열이 이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동방교회는 삼위일체 안에는 오직 하나의 존재적 근원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성자와 성령도 성부에게서 나오나 그 방식은 다르다고 보았습니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셨고’,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생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용어의 차이는 성자와 성령 이 모두 성부에게서 유래하나 다른 방식으로 유래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동일한 성부에게서 성자와 성령이 유래하는 방식을 구별하지 못하면 하나님에게 두 아들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고, 이는 해결할 수 없는 신학적 난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신성의 유일한 근원인 성부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동방교회는 성령의 “이중 산출”이라는 서방교회의 개념을 불신앙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사상은 어거스틴이 처음 제기한 이래 서방교회에서 계속 발전되어왔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생각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의 에큐메니칼 대화에서 이 문제는 아직 미해결의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동방교회는 위에서 말한 문제 때문에, 필리오케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서방교회는 여전히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를 묶는 ‘사랑의 끈’이 되기 때문에, 필리오케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성, 통일성을 수호한다고 주장합니다.(2)

다시 『기독교강요』로 돌아가서 칼빈의 말을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칼빈은 19절에서 ‘필리오케’를 근거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긴밀한 관계를 말합니다. “성자는 성부와 더불어 똑같은 영을 소유하시기 때문에, 성자가 성부와 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따라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성부, 성자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증명해준다”(xiii.19). 앞에서 칼빈은 세 위격의 현실적인 차이, 구분을 했지만, 그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영을 지니시기 때문에, 이 구분은 결코 위격들의 통일성과 한 분 하나님의 단일성을 조금도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절에서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질서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이 질서는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따르는 순서입니다. 그는 먼저 일반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부성적인 자비심을 고려합니다. 이어서 그는 인류의 죄에 의해 필수적이 된 성자의 사역을 통한 부성적인 자비심의 구체적인 적용을 다룹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안에 근거되고 그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사랑을 그의 선택된 자들에게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성령의 역사를 다룹니다. 13장의 나머지 부분(21-29절)은 이단들을 논박하는 내용입니다. 칼빈이 여기서 비판하는 이단들은 고대 교회를 혼란케 했던 이단들이 아니라 16세기 당시에 등장하여 종교개혁 진영과 특히 제네바에 문제를 일으키던 이단들입니다.

미주

(미주 1) 삼위일체 교리의 성경적 배경을 지목할 때, 가장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성구들은 마 태복음 28장과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이다. 전자는 세례를 통한 연합 때문에, 그리고 후자는 기독교인의 기도와 간구에 거의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절들 을 함께 혹은 따로 분리하여 고려하더라도, 삼위일체론을 말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주 2) 이 논쟁에 대해서는, 도날드 K. 맥킴, 『교회의 역사를 바꾼 9가지 신학논쟁』(서울: UCN, 2005), 57-62를 참고.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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