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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하나님의 자유로 산다진실 (3)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 승인 2020.01.08 17:02

문: 이제 진실에 대한 예수의 요구의 특징들이 완전히 다 밝혀진 것인가?

답: 결코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도 또 하나의 특징이 강조되어져야만 할 것이다. 진실이라는 것이 이처럼 총체적인 것이라는 특성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결론이 나온다. 우리가 무슨 말과 행동을 하든지 진리와 더불어 꼭 진리를 말하기로 한 곳에서, 결정적인 데에서 허위를 물리치고 진리를 말한다면 그것으로써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끝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개별적인 진리의 명령에 대해서는 충실하다.

그러나 그들은 전체로서의 진리를 부인한 셈이다. 그들은 전체로서의 진리를 못보고, 그것을 찾지 않고, 그것에 열중하지 않고, 그것을 증언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 전적으로 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말로하면 그들은 작은 진리를 옹호하고 있지 큰 진리를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큰 진리를 인정하고 실행하지만 작은 진리는 소홀히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떤 미덕과 관련된 보다 사소한 잘못이긴 하지만 그래도 잘못은 잘못이다.

큰 진리와 작은 진리가 함께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작은 진리는 큰 진리에서 나오지만 반대로 큰 진리를 받쳐주는 것이다. “너희가 작은 일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에게 어떻게 큰일을 맡기겠느냐”(누가복음 16장 10절) 그러나 너희가 오로지 작은 일에서만 진리를 존중하고 실행한다면 그것으로 너희가 진실하다고 생각하지도 마라!

▲ 진리는 하나님 그 자체이시고, 진리는 자유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자유롭게 하시는 진리로 하는 것이다. ©Getty Image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사실이 다시한번 강조되어야 한다. 즉 우리는 진리나 진리의 확증, 혹은 그와 반대되는 것이라도 그런 것들이 항상 말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진리는 본질적으로는 오히려 행동이다. 진리는 생활이다. 자신의 생활 전체가 거짓일 수 있는가 하면 진리의 확증일 수 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생활전체가 말과 맞지 않는 곳에서 말만 가지고 하는 주장은 효력이 없지만 비록 불완전한 실행일지라도 그 점만이 문제되는 곳에서는 진지한 의욕과 철저한 태도를 갖추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그리스도의 일을 선포하는데 적용된다. 여기서 사랑과 믿음의 행위는 천 마디의 아름다운 말보다도 낫다. 비록 그 많은 말들이 성서에 있는 말들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진리이신 그분도 바로 그렇다. 그 진리는 단지 말 뿐이 아니요, 무엇보다도 그의 삶과 죽음에서 말씀이 구체화된(육신이 된) 것이다.

문: 이제 예수의 말씀은 철저히 다 언급된 것인가?

답: 아직도 아니다! 거기에는 아직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 있다. 만약 하나님 자신과 마찬가지로 진리도 무한하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결코 소유할 수 없고 언제나 하나님을 찾아야만 하는 것처럼, 진리도 결코 소유할 수 없고 진리를 찾아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에서도 가난의 법칙은 중요하다. 우리는 결코 완전한 진리를 가졌노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보다 큰 하나님의 진리를 향해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그 진리에 주리고 목말라 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마음이 깨끗해야만 한다. 우리는 어떤 오류 속에서라도 이 진리를 인정해야만 한다. 즉 반대자와도 관계하시는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굉장히 혁명적인 결과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이런 방침으로 모든 자기 의를 배제한다. 이것은 또 정통성이라는 것을 배제한다. 왜냐하면 이 자세는 하나님의 진리를 일정한 형식으로 파악하려는 모든 도그마들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세는 또한 정통성에 대한 반대가 또 하나의 도그마가 될 정도라면, 그렇게 정통성에 대해 맹목적으로 반대한 것도 배제한다. 이 자세는 또한 모든 신조지상주의(Doktrinarismus)도 배제한다. 설사 그 신조들이 최고로 훌륭한 것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신조들보다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이 자세는 이름하여 평화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반군국주의, 채식주의 등등의 모든 헛된 사상체계들보다 훌륭하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항상 인간들의 규정일 뿐인 인간의 이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 말미암아 산다. 이 자유는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광적으로 믿는 모든 광신을 막아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력을 넘어설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보다도 넓으시다. 이로써 또한 모든 전통의 속박도 극복된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리가 미래의 것들과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들을 위해서 기존의 것들과, 다만 존재하고 있는 것뿐인 것들의 지배력을 돌파한다. 예언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제에게 나아간다. 하나님은 마음을 넓게 하시고 멀리 보는 눈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위대하게 하시고 자유롭게 하시는데, 바로 그런 위대함과 자유를 예수께서 가지고 계시며 또 예수가 바로 그 자유이다.

문: 좁히는 데에 위험이 있다면 그것과는 반대로 넓히는 것도, 즉 너무 넓히는 것도 위험하지 않을까?

답: 율법의 영역에서는 그런 위험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는 진리의 엄격함, 진리의 절대성, 진리의 예리함도 나온다. 관용과 엄격함, 이해심과 심판, 넉넉함과 예리함이 함께 전체를 이룬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들이 법적으로, 이치적으로, 기계적으로 분리한 것이 하나님 안에서는 하나요, 그의 진리의 양극성이요, 운동이다.

이것을 음미해보라! 얼마나 새로운 혁명인가! 예수는 율법의 장벽을 다시 분쇄하고 세상을 화해시키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진리의 물줄기를 터 놓았다.

문: 이제 새로운 혁명은 끝났는가?

답: 끝나다니?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이 모든 것은 단지 새로운 의(義), 예수께서 의도하시는 진리의 첫 부분에 대한 언급일 뿐이다. 이 원칙은 하늘처럼 넓고 바다처럼 깊다. 우리의 마음보다 넓고, 우리의 생각보다 넓다. 살아계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무한하시고 절대적인 하나님, 모종의 율법이나 율법을 심의하는 곳이 아닌 하나님이 바로 진리의 근원이다.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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