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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일상생활의 정의(正義)를 넘어정의(Das Recht) (4)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 승인 2020.02.05 17:16

문: 우리 시대에도 정의를 능가하는 어떤 것이 중요할까? 우리 시대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정의가 와해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오늘날에는 정의를 능가하는 어떤 것을 강조하기 보다는 정의의 필요성과 신성함이 강조되어져야만 하지 않겠는가?

답: 오늘날 정의의 신성함이 매우 각별하게 강조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예수께서 하신 진리의 말씀도 그것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시대와 양식에 따라 유효하게 선포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다시금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 정의이며, 정의는 어떻게 해서 정의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고민은 민족들 내에서 또 국제관계에서 각 민족이 그의 권리를 갖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 즉 각 민족이 자기 민족의 중요성에 대한 권리나 이를테면 “독일국민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그것이 정의다.”는 식의 민족이기주의를 정의(권리)라고 선언하는데 있지 않을까? 보다 높은 수준의 정의, 단지 인간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이런 “정의”(권리)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에서 도움과 구원이 올 수 있지 않을까? 모든 폭력과 맞서는 정의, 그러므로 여러 민족과 개인들 안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정의를 드높이는 정의에서 도움과 구원이 올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정의가 은혜 없이, 단순한 정의 그 이상의 것이 없이도 구현될 수 있겠는가?

문: 하지만 예수께서 요구하신 그 말씀 하나 하나들은 다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문자대로 해석하지 않는 것은 그것의 의미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답: 그와는 정반대이다. 축자적으로 생각지 않음으로써 예수의 요구는 더욱 예리해진다. 축자적으로 생각하지 않게 될 때 비로소 예수의 요구하는 무한한 힘을 갖게 된다. 잘 생각해 보라. 자신의 매일 매일의 의무를 다하는 것보다는 특별한 업적을 행하는 것이 훨씬 쉽고 이웃집 부인을 용서하는 것보다는 신발 속에 든 콩알 만한 돌을 빼내지 않고 속세를 떠나 지낼 것을 찾아 순례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심지어 끊임없이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방해가 되는 것은 그것이 가령 가장 사랑스럽고 귀한 것이라면 그것을 하나님께 희생물로 드리는 것보다는 자기의 눈을 뽑고 팔을 자르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다.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의미에서 예배(Gottesdienst)는 스포츠보다 힘들고 종교예식(Kultus)보다 힘들다.

예수의 요구는 문자적인 성격을 띤 것이 아니라, 원칙으로서의 성격을 띤 것이다. 만약 네가 오른 뺨을 맞았을 때 그대로 왼쪽 뺨을 내놓지 않아도 될 것이다. - 예수조차도 산헤드린 앞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너에게는 아마 결코 오지 않겠지만 말이다. - 그러나 너는 너를 모욕하는 자에게 그 이상으로 대해 주어야 한다. 즉 너도 잘못한 점이 있다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정의로 그를 대해야 한다. 너는 어떤 소송에서 너의 속옷(저고리)을 원하는 사람에게 너의 겉옷(외투)까지 주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물건에 대한 그런 분쟁에서 엄격하게 정해진 상대방의 권리를 훨씬 넘어서 그의 의도를 폭넓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너는 결코 부역을 하도록 강요받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역과 유사한 일을 네가 하게 된다면 너무 적게 일해주지 말고 차라리 일을 많이 해주라. 그런 것들이 단지 너의 사적인 일인 한, 또 큰 관심을 가지고 정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닌 한, 그런 것들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너는 너에게 경제적 도움을 달라고 조르는 모든 사람을 즉시 응해주어야 할 필요는 없다. 네가 응해줌으로써 일종의 과시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는 또한 그런 응대를 악의를 가지고 오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그에게 경제적 도움 이상을 주어야 한다. 너는 그에게 책임감을 깊이 느끼고 어떤 다른 방법으로든지 그를 도와야 한다. 너는 사회현실의 보다 나은 정의를 위해 책임을 가지고 일함으로써 그 의무를 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예수의 요구의 역설적 성격은 문자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다. 예수의 역설들은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역설들 안에서 가히 하나님 나라의 자유를 느낄 수 있지만 엄격함에 있어서 예수의 역설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훨씬 넘어서는 전혀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 인류 역사에서 한번도 그 필요성이 부정당한 적이 없었지만 현시대만큼 정의가 필요한 시대도 드물다. ⓒGetty Image

문: 이 모든 것이 사생활뿐만 아니라 공적인 삶, 특별히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도 적용되는가?

답: 반드시 공적인 삶과 특히 정치, 사회적 현실에 적용되어야 한다. 산상설교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에 속하여 결코 사생활에만 관련된 것이 아닌 포괄적인 질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개인에 대한 지침은 항상 하나님 나라는 이런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다.

문: 예수의 이런 지침은 정치, 사회적 현실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답: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세계혁명일 것이다. 이런 혁명의 결과로 정치, 사회적 현실에 있어서 민중의 자유와 평화가 생길수도 있고, 이 결과로 민족들의 자유와 평화가 생길지도 모른다. 민족의 모든 일원과 또 각각의 민족마다 그들이 속해 있는 제각기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존중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하나님의 정의에는 단순한 인권, 그 이상의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로지 여기에서부터 자유와 평화가 개별 민족들과 국제 세계 안에서 솟아나온다. 단지 여기에서만 진정으로 민족을 초월한 정의가 나오고, 여기서 틀림없이 참된 국제 연맹이 나온다.

문: 그러나 예수의 요구는 주님이시오,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깨닫고 인정한다는 전제조건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

답: 물론이다. 그러기에 민족들 내에서 또 여러 민족들 간에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복종을 위한 투쟁이며,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그 정도로만 민족들은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의 요구도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원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나름대로 예수의 요구를 실현코자 하는 사람은 예수의 요구가 세상에서 실현된 것에 협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이기도 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더불어 이러한 예수의 요구를 세상 안으로 가지고 가야한다.

문: 이것으로 예수의 혁명은 이제 완전히 다 이야기가 된 것인가?

답: 어떻게 예수의 혁명이 남김없이 다 이야기 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은 단지 예수의 혁명에는 완성이라는 것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마태복음 5장 38-42절에 있는) 이런 예들에서도 예수의 혁명이 지닌 그런 무한성(Unerschöpflichkeit)을 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계명은 한정적이고 편협하다. 그것은 일종의 울타리, 율법의 울타리이다. 이 울타리는 인격의 거룩함을 권리(정의)로 여기고 수호한다. 그러나 이 울타리는 그밖에 생명, 그 외에 진리는 배제하거나 약화시킨다. 이러저러한 삶의 영역이 법의 규정 안에 들어오고, 또 이러저러한 법률사건이 이런 법의 규정에 상응해서 해결된다면 그것을 충분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일이 다 잘되고 있다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리게 되면 율법의 이런 울타리는 무너진다. 율법의 울타리가 무너지면 하나님의 요구의 무한성과 또 단순한 정의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정의의 무한성을 보는 눈이 뜨이고 예수의 혁명의 무한성을 내다보게 되며 그때 율법의 해체에서부터 율법의 완성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과 향제에게 진, 결코 갚지 못할 끝없는 빚을 갚아나가는 일이 인간의 정의와 인간의 규정을 대신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정의의 이런 영원무한성을 지시하는 것이 예수의 말씀의 역설이 가지고 있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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