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원죄는 유전되는가하나님께만 영광 (1)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0.02.08 17:05

『기독교강요』는 신론, 기독론, 성령론, 구원론 등 개별교리를 차례로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일관된 논지를 실타래를 풀어가듯 계속 이끌고 가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그런데 제2권에 들어서면 상당한 변화가 감지됩니다. 예컨대, 칼빈은 헬라 철학자들에 대한 언급을 줄이고 대신에 교부들에 대해 더 많은 언급을 합니다.

타락한 인간에 대한 이해

처음 다섯 장은 일반적으로 로마 교회와 개혁자들 사이의 큰 차이점들 가운데 하나인 의지를 속박하는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칼빈은 제1권 1장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하면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시켜준바 있는데, 여기서 다시 그 기억을 되살려줍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첫째로 창조 시에 우리가 무엇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관대한 호의를 계속하시는가를 생각하는데 있다.”

이러한 생각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선천적인 우수성이 원상을 유지했더라면 얼마나 위대했을까를 아는 동시에,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것이 조금도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의 묵인 하에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아담의 타락 이후에 불행하게 된 우리의 처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의 모든 자랑과 자신이 사라지게 되고 우리는 진심으로 겸손하게 되고 수치심으로 위축될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처음 사람과 함께 우리가 원상태에서 타락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로 이 사실을 지각할 때, “우리 자신에 대한 증오심과 불쾌감, 그리고 동시에 진정한 겸손이 생기며, 아울러 우리가 완전히 잃어버린 좋은 것들을 하나님 안에서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겠다는 새로운 열성의 불길이 일어난다”(II.i.1).

이런 이유에서 칼빈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던 고대 격언을 상기시키며 이 격언이 악용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 격언을 악용􏰀여 우리 자신의 우수성을 아는 것이 이 교훈의 목표라고 오도해왔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허망한 자신과 자만에 부푼 헛된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 Johann Fischen(circa 1650), 「Adam and Eve were children in paradise」 ⓒ

이렇게, 칼빈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은 망상적인 자기도취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맹목적인 자애(自愛)는 모든 인간의 천성”입니다. 그래서 너나없이 골수에 깊이 박힌 자존심 때문에, 자존심을 만족시키는 매혹적인 언사를 가장 좋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우리의 선한 특징만을 생각하라고 하면서 우리를 만류하는 교사들의 말을 듣는 사람은 자기 인식이 향상되지 못할 것이며, 도리어 최악의 깊은 무지에 빠질 것이다”(II.i.2)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비교할 때, 비로소 우리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앞에서 말했던 지혜의 둘째 부분을 다시 회상시켜줍니다.

육적인 판단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를 아주 잘 아는 것 같다. …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을 표준으로 하여 자기를 세밀히 검토하는 사람은 결코 용기와 자신을 품을 이유를 찾아낼 수가 없다. 자기 성찰이 깊어 갈수록 더욱 낙심하며, 드디어는 일체의 자신을 빼앗기고 인생을 바르게 지도해 줄 것 이 자기에게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II.i.3).

타락의 원인

그리고 칼빈은 4절에서 성경에서 죄라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합니다. 죄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첫 범죄를 살피는 것이 우선적인 일일 것입니다. 에덴동산 중앙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순복하는가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뱀에게 속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불순종을 타락의 시초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도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가르치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인용합니다(롬5:19). 그런데 칼빈은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있게 고찰합니다.

그는 불순종이 타락의 시초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처음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하여 반역한 것은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빠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진실을 멸시하고 허위로 돌아섰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모든 경외심을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칼빈은 ‘불신앙’을 타락의 근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번역본은 ‘불충’으로 번역하였는데, ‘불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신앙이 타락의 근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 야심과 교만이 배은망덕과 함께 생겨났으니, 아담은 받은 것 이상을 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신 그 위대하고 풍성한 은혜를 파렴치하게 경멸했기 때문이다. 흙의 아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도 또한 하나님 과 동등하게 되지 않는 것을 사소한 일로 보았으니, 이 얼마나 해괴하고 흉악한 태도였는가!(II.i.4).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 불신앙이 모든 악의 뿌리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심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위보다 더 크게 되고자 하는 교만이었습 니다. 그리고 교만의 결실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나타났습니다.

칼빈의 원죄 이해

5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란이 되는 ‘원죄’에 대한 해설입니다. 아담의 타락은 단지 한 사람에게 발생하고만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타락은 불행하게도 모든 후손과 피조세계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말았습니다(롬8:20,22). “그렇기 때문에, 저 하늘 형상이 그에게서 말소된 후에 이 벌을 받은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후 손까지도 끌어넣어 같은 불행에 잠기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물려받은 부패이며, 이것을 교부들은 ‘원죄’라고 불렀다.”

오늘날 현대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원죄를 단순히 ‘유전죄’ 또는 ‘생래적인 죄’와 동일시하지 않습니다.(1) 칼빈이 “한 사람의 죄책으로 모든 사람이 죄책을 지게 되어 죄가 공통한 것이 된다는 것은 상식과 가장 먼 일”이라는 말을 할 때, 그 역시 원죄를 단순히 ‘유전죄’라 고 보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것은 칼빈이 분명히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라는 다윗의 고백을 그가 자신의 부모의 죄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인애를 더욱 칭송하려고, 자기는 잉태된 때부터 악했다고 고백한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II.i.5).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만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제1권 1장 3절에서 확인했습니다. 여기 원죄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칼빈은 원죄를 내 부모의 죄 때문에, 우리 선조의 죄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았어도 죄인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원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말하자면 단지 우리가 어떤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로 인식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칼빈의 말을 살펴봅시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부활에 대한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시키고자, 아담 안에서 잃어진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고전15:22). 그는 우리가 모두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 선언함으로써 동시에 우리가 죄의 병에 전염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단언한다. 불의의 책임이 없는 사람에게 정죄가 미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려는 뜻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 발언의 다른 부분으로, 거기에서 그는 생명을 얻을 희망이 그리스도에게서 회복된다고 단언한다. … 바울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라고 말한 것은 모든 사람이 이미 모태에서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면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바울이 ‘본질’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대로가 아니라 분명히 아담에게서 부패한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죽음의 창시자라고 하는 것은 가장 부당한 생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기를 부패시키고, 그것이 모든 후손에게까지 감염되고 만연된 것이다. 우리의 하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은 모두 날 때부터 악하고 타락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3:6), 따라서 사람이 거듭나기까지 는 모두 그 앞에 생명의 문이 닫혀 있다(요3:5)고 하신다(II.i.6).

그러므로 만약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선천적인 우수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위에 만족하며 말씀대로 살아갔다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본적으로 아담이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불신앙하고 교만하고 마침내 반역해서 부패하고 타락했고, 그로 말미암아 온 인류와 피조세계 전체가 부패로 만연하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이라고 언급하기도 합니다(고전 15:45).

이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해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아담 때문에 타락하고 죄를 짓고 멸망에 이르게 되었던 것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분명히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아담 안에서 잃은 생명은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수 있다(고전15:22)고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아담과 그리스도라는 우리의 두 시조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아담을 통해서 우리는 타락하고 죄를 짓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불변의 진리 앞에서, 원죄의 교리는 아담의 타락과 부패로 말미암아 단지 아담 자신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에 이르기까지 그 앞에 생명의 문이 닫히고 말았다는 사실(요3:5), 그래서 단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했던 것입니다(II.i.6).

따라서 그것은 단순히 유전죄, 생래적인 죄를 말하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이 인간이란 존재를 어떤 존재로 규정하고 있는가, 그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자신과 무관하게 이미 결정된 사실, 곧 아담으로 말미암아 부정적으로 결정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새롭게 정해진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었다, 원죄를 이런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왜 불완전하게 지으셨나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보다 완전하게,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도록 창조하지 않으셨는가? 모든 일을 아시는 하나님이 왜 인간이 타락하고 죄짓는 것을 미리 알고 막지 못했는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은 본말이 전도된 질문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닮은 자들로, 세상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고귀한 존재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꼭두각시나 입력한 명령대로 움직이는 로봇처럼 인간을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인간이 줄에 매여 있는 꼭두각시나 입력한 명령대로 움직이는 로봇 같은 존재였다면, 결코 죄를 지을 수 없고 죄 짓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무한한 자유를 부여받은 자들로 지음을 받았고, 세상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선물을,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자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고, 우리가 선물로 받은 이 자유는 어떤 조건이나 제한이 없는 말 그대로 자유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그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고, 하나님을 거역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자유로운 자들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우리가 주신 자유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순종의 삶을 살지 않고, 오히려 그 자유를 잘못 행사하여 죄를 짓고,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따라서 만약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죄짓지 않게, 좀 더 완전하게 만드시지 않았는가 하고 항의하는 것은 우리를 이렇게 고귀한 자로 지으신 하나님께 왜 우리를 꼭두각시나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느냐고 항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칼빈은 10절에서 전도서 7장 29절의 말씀을 들어서 이 문제를 해명합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그러므로 인간의 죄와 멸망의 책임은 하나님께 돌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친절로 그 많은 혜택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유혹에 빠져 죄를 짓고 멸망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II.i.10).

미주

(미주 1) 최영, 『칼 바르트의 신학이해』(서울: 민들레책방, 2005), 197이하 참고.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이해학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