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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반대하신 것예수를 고발하려 하여(마태복음 12:9-13)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0.02.09 16:14
9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을 지나면서 안식일을 범하셨고, 이를 지적하는 이들을 향해 사람의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현재의 삶이 우선이고 이 삶의 기쁨이 보장된 상태에서 미래의 구원을 생각하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지난주 본문과 내용이 겹칩니다. 똑같이 안식일에 일하는 전통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음식을 먹기 위해 일했다면,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고쳐주기 위한 일입니다.

지난 본문에서 우리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에서도 결론은 똑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안식일이라도 아픈 사람을 고쳐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지난주 본문에 바로 이어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일해도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반복적으로 말씀이 나타나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뭔가 하실 때마다 예수님을 적대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오늘 본문은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받으신 질문을 적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는 처음에 이들이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본문의 마지막에 ‘바리새인’이라고 말함으로써 이들이 바리새인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라고 명시합니다.

▲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마른 사람을 치료하셨다. ⓒGetty Image

이 바리새인들은 분명 지난주 본문에서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는 일이 옳으냐고 물었던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예수님께 한 번 지적을 당한 후에 복수를 바라며 예수님을 쫓아왔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만약에 이들이 다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이 질문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저 예수님께서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똑같은 이야기 하시느라 힘드시겠다는 생각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은 안식일의 의미에 대해 강조하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기록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음식을 먹는 이야기와 아픈 사람을 고치는 이야기의 동일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두 이야기가 연결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경우에 바리새인이 같은 사람일 필요는 굳이 없습니다.

분명 복음서마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복음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점이 있습니다. 바로 이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 하여’ 이 질문을 던졌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 또다시 안식일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말씀을 드리며 바리새인들도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활동에는 반대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면 안 된다고 말하던 사람들은 에세네파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의 비판은 에세네파를 향한 비판일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인지 마태복음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없는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서 저희가 읽은 내용인, “너희가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구하지 않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해도 된다고 인정했던 내용입니다. 설마 바리새인들이 양은 구해도 된다고 하면서 사람을 구하는 일은 안 된다고 했을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양을 구하는 일도 인정했던 바리새인들이 정말로 예수님께서 12절에서 하신 말씀,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를 몰라서 이런 질문을 하고 있을까?

만약에 바리새인들이 정말로 사람보다 양을 귀하게 여겼고, 사람은 구덩이에 빠져도 구하면 안 되지만 양은 구해야 한다고 말해왔다면, 이는 사람의 생명보다 재산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물질만능주의의 풍조이며 예수님께서 이를 비판하셨다고 말할 수도 있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의 완악함

그래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목적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 오늘의 상황을 만듭니다. 생명이 소중한지, 양보다 사람의 생명이 더 귀중한지, 이들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마가복음 3장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을 던지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는 너무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도 악을 행하는 일이 옳다고, 생명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들은 ‘잠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에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셨다고 말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바리새인들을 생각하면서 이 본문을 본다면, 바리새인들은 원래 생명을 죽이는 쪽을 선택할 사람들이고, 악을 행하는 쪽을 선택할 사람들인데, 대중 앞에서는 그런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대답하지 못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새인들의 악함에 탄식하셨다는 내용이 됩니다.

하지만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런 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들의 완악함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바리새인들도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점을 알고 있고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물론 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합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알기 때문에 바리새인은 노상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버려두고 가는 나쁜 사람들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길거리를 지나다가 누군가 갑자기 쓰러지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어떤 사람은 바로 달려가서 응급조치를 취할테고, 어떤 사람은 그저 멀리서 지켜만 볼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일이 바쁘기 때문에 모른척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이 좋은 이웃이었다고 해서 나머지 사람들이 악인들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났을 때,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어려워도 그 일을 행하라는 뜻입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느냐 그렇지 않냐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완악하다고 말씀하신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완악함은 바로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 사람의 생명을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수단으로 이용한다고 해도 그 사람이 바로 죽는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은 누군가의 아픔을, 누군가의 생명을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고쳐주실 줄 알았기 때문에 더욱 이를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누군가를 고발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때에라도 생명은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선을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3장 5절에서 ‘노하심으로’ 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생명이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올해는 총선도 있고 해서 최대한 정치적인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합니다. 어떤 정당이 옳고 어떤 정당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런 시기에 제가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다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순간에도 사람의 생명은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정치판에서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모두 생명을 정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에 따라 사람의 생명이 정치의 도구가 됩니다. 정치가 사람의 생명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지 생명이 정치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정치인들은 그런 사람들이니까 그렇다 해도, 더 중요한 점은 우리 스스로가 그런 정치인들의 태도에 휩쓸려서 생명을 경시하는 태도를 보이게 된다는 점입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중한 생명입니다. 그 어떤 생명도 하찮은 생명은 없습니다. 나의 삶의 문제로 인해서, 나의 정치적인 성향으로 인해서 누군가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도구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최근에 이국종 교수와 아주대의 문제가 수면 위에 올라왔습니다. 경기도는 아주대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학병원 운영을 우선하는 입장과 최대한 빨리 응급환자를 치료하고자 하는 의사의 입장이 충돌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세브란스 원목 분께서 대학병원들은 적자를 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브란스는 거의 유일하게 흑자 운영으로 돌아섰다고 뭔가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쯤에 제 친구가 세브란스 간호사로 일하다 그만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유학 가기 전에 그 친구와 이야기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브란스가 흑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치료비를 사채업자보다 더 심하게 받아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한 사람의 의견일 수도 있지만, 지금 대형 병원들을 보면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장사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병원 운영진의 입장은 아마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보다 병원의 이익이 우선될 것입니다. 돈, 혹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생명은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생명보다 우선 될 것은 없고, 어떤 순간이라도 생명은 이익을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남의 생명을 이용하는 행위는 결코 하지 말라는, 다른 이의 생명을 경원시하는 태도는 결코 보이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지금 시대에 모든 사람이 서로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간다면, 이 세상이 조금은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누구도 생명을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일에 열중한다면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지 마시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생명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며 아끼시는 일에 여러분께서 앞장서시길 바랍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끝에 하나님 나라가 있을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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