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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과 원죄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는 남아 있는가하나님께만 영광 (2)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0.02.15 17:18

지금까지 칼빈은 첫 사람이 죄에 의해 죄의 노예가 된 후에, 죄의 지배력이 모든 인류에게 미쳤다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이제 2장에서 그는 죄의 지배력이 어느 정도나 철저한지를 질문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가 노예상태로 낮아진 후로 모든 자유를 빼앗겼는지, 그리고 만일 자유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과연 그 힘 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원죄와 자유의지

칼빈은 이런 질문에 답하려고 할 때, 두 가지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사람은 자신에게 올바른 것이 전혀 없다고 들을 때에 즉시 이 사실을 구실로 무기력과 태만에 빠진다. 자력으로는 의를 추구할 수 없다고 듣기 때문에, 그런 추구는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듯 외면해 버린다. 둘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공로를 돌리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예를 빼앗게 되며, 사람은 파렴치한 자기 과신으로 파멸하게 된다(II.i.1).

칼빈은 이 두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선이라는 것은 전혀 없고, 극히 비참한 궁핍만이 사방에서 인간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록 그렇지만 없는 선을 추구하며 빼앗긴 자유를 추구하라고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칼빈에 의하면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빈곤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II.i.1).

그런데 고대로부터 헬라철학자들과 교부들은 이른바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장해왔습니다. 그들은 “이성이 지성 안에 있어서 등불과 같이 모든 생각을 비춰주며 왕과 같이 의지를 지배”하기 때문에, 이성적인 사람은 올바른 판단과 이해력을 가지고 자기 의지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의 이 같은 주장은 그들의 견해와 전적으로 대립되는 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감각에 의한 지각은 지둔하며 보는 것이 희미해서 항상 땅에서 기어다니고 저급한 일에 얽매이며 결코 진정한 식별을 하는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고 상상한다. 만일 욕구가 이성에 복종하고 감각에 굴복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덕을 추구하게 되고 바른 길을 계속하며 의지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욕구가 감각의 노예가 될 때, 그 욕구는 감각으로 인하여 부패하고 타락하여 마침내 정욕으로까지 전락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내가 위에서 말한 (영혼의) 능력들은–지성과 감각과 욕구 또는 의지-영혼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나 저 저급한 충동(감각)에 대하여서 는, 감각은 사람을 오류와 미망으로 이끄는 것이지만 이성의 채찍으로 길들이며 점진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성과 감각의 중간에 의지를 둔다. 즉, 의지에는 독자적인 권리와 자유가 있어서, 이성에 복종하거나 감각에 몸을 팔아 더럽히는 등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한다(II.i.2).

그러니까, 철학자들에 의하면, 의지는 이성과 감각 사이에 있어서 이성의 지배를 받으면 선악을 구별하고 올바른 일을 할 수 있고, 감각에 휘둘리면 방탕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이 철학자들은 결국 의지의 자유, 곧 자유의지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선행과 악행을 우리의 힘으로 좌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면 그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그들은 말한다. 또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힘에 달렸다면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 모든 철학자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지성 안에 있는 이성은 바른 행위를 위한 충분한 인도자며 이성에 순종하는 의지는 악한 일을 하도록 감각의 선동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유로운 선택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지도자인 이성을 따르며 결코 방해를 받지 않는다(II.i.3).

칼빈의 자유의지론

여기서 칼빈은 교부들로부터 중세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자유의지에 관한 논의의 역사를 간략히 언급합니다. 어거스틴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견해는 철학자들에 지나치게 접근하였거나 서로 모순되고 말 할 수 없이 혼란한 상태라고 비판합니다.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은 8절에서 살펴보겠지만, 여기서 간단히 소개하면, 그는 “은총의 도움을 받아서 선을 택하며 은총이 없을 때에 악을 택하는 이성과 의지의 능력을 자유의지”라고 말하였습니다(II.ii.4).

▲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는 남아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가 질문은 오랜 신학적 난제에 속한다. ⓒGetty Image

칼빈이 교부들의 자유의지를 비판했던 주된 이유는, 그들이 자유의지를 논할 때 먼저 사회활동 또는 외부활동을 위해서 자유의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탐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대한 복종을 촉진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만을 탐구하였기 때문입니다(II.ii.5). 칼빈은 뒤에서 예술, 학술, 기술, 과학 이런 분야 등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 선택이 어떻게 인간의 문화에 기여하는가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교부들이 먼저 사회 활동, 외부활동을 위해서 자유의지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하나님의 법에 대한 복종, 구원의 문제에 대해 말하려고 했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확인하겠지만, 자유의 지는 구원의 문제와 관련해서 인간 편에 어떤 선택권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빈이 그렇게 강하게 배격했던 것입니다.

7절에서 칼빈은 자유의지 주장이 갖는 문제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묻고자 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자신이 바로 자기의 마음과 의지의 주인공이며 자기의 힘으로 선악 간 어느 쪽으로든지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가 되겠는가?(II.ii.7).

여기서 칼빈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자유의지를 말했던 사람들의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은밀하게 구원의 주체로 삼는 일에 관심을 갖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제 칼빈은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을 간략히 소개합니다.

의지는 ‘부자유’하다. …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사람의 의지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욕망이 수갑을 채우고 정복했기 때문이다. … 또 사람은 자유의지를 악용하여 자기와 및 자기의 의지 모두를 잃어버렸다. 또, 자유의지는 노예가 되어 그 결과 지금은 의를 행할 힘이 없다. 또, 하나님의 은총이 해방하지 않은 것은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대하여 사람은 자유의지의 큰 힘을 받고 창조되었으나 죄를 지음으로써 잃어버렸다(II.ii.8)

칼빈은 “의지가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해방되지는 않았다고, 곧 의로부터는 자유로우나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하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유의지라는 말의 사용에는 반드시 큰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교회를 위해서는 폐기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권고합니다(II.ii.8). 칼빈은 2장 서두에서 한 말을 다시 상기시키며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리의 비천함을 의식할 때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자기의 참화와 빈곤과 벌거벗음과 치욕을 깨닫고 완전히 타도되며 압도된 사람은, 그렇게 됨으로써 자기에 대한 지식이 가장 많이 전진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없는 것을 하나님 안에서 도로 찾아야 한다 는 것을 깨닫는 한 그들에게서 자기의 것을 너무 많이 빼앗길 위험성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자기의 정당한 소유가 아닌 것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사람은 반드시 허무한 자신(自信)으로 자기를 잃어버리며 하나님의 영예를 찬탈하여 신성 모독의 무서운 죄를 짓게 된다(II.ii.10).(박스)

사실, 우리가 능력이 많아서 우리 자신을 의지할 수 있다는 말은 기분 좋은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 허무한 신념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교만을 철저하게 꺾어 버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17:5).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사40:29- 31).

칼빈에 의하면 이런 말씀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호의를 원한다면 아무리 적은 힘일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생각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 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셨기 때문입니다(약4:6).

그러므로 칼빈은 여기서 다음과 같은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사44:3), “너희 모 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55:1). 이 구절들은, 자기의 빈곤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칼빈은 이사야서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유사한 말씀을 지시합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리라”(사60:19). 물론 칼빈은 주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서 해 와 달의 빛을 빼앗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주님만이 홀로 그들 안에서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므로, 그들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것들도 믿지 말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II.ii.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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