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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비판적으로 본 코로나 바이러스, 그 신학적 재해석과 교회이전 문명과의 절연을 과감히 선포 필요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 승인 2020.04.23 17:21
본고는 엄밀한 학술논문이기보다 페이스북과 일간지 그리고 <시사인> 잡지에 실린 코로나 사태 관련 내용을 종합하여 필자 나름대로 재구성하여 신학화한 것이다. 별도 각주를 달지 않았으나 주요 내용을 전한 학자들의 이름을 곳곳에서 밝혔다. 이 논문은 충남 아산 송악교회에서 열린 NCCK 정기 강연회(2020년 4월 23일)를 통해서 발표했다. - 저자 주

생태학자들은 2020년부터 향후 10년간을 지구생존을 위한 남은 시간으로 경고했다. 산업 체제를 바꿔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급격하게 줄여야- 최소한 40%정도-미래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신년벽두에 중국에서 시작, 전 세계로 전파된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류가 맞을 생태위기의 한 양상(樣相)이자 징조라 생각한다.

지난 세기 아프리카 적도 원시림 속 람바르네 병원서 일하던 A. 슈바이처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목도하며 진보적 세계관을 추동한 서구문명의 종말을 적시했다. 생명외경을 토대로 그의 문화철학이 생성된 배경이었다. 하지만 동시대에 발생한 변증법적 신학으로 슈바이처의 생명 외경론은 정작 주류 기독교(신학) 내부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생명(자연)의지를 긍정하는 인생관, 문화철학이 소위 말씀 신학의 타자(초월)성의 이름으로 부정된 결과였다. 국가 사회주의(히틀러)체제 부정을 위해 자연신학 일체가 거부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 위기를 겪으며 우리는 슈바이처를 두 가지 이유로 다시 소환할 수밖에 없다. 우선은 오늘의 교회가 이런 신적 속성 자체를 표현할 능력을 잃었으며 더욱 근본적으로 신적 타자성이란 말 자체가 상호 의존된 초(超)연결 사회에서 그 의미를 상실한 까닭이다. 아울러 기독교 서구문명이 홀로세를 인간세로 변질시켜 자본세로 몰아갔기에 다른 문명, 최소한 ‘다른’ 기독교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JPIC 이래로 생태적 위기로 ‘사실적’ 종말론이 말해지는 현실에서 구속사적 말씀신학의 입지는 거듭 축소될 것이며 오히려 ‘자연 신비’에 눈뜬 새 문명, 새 신학이 요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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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번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간을 숙주(宿住) 삼았기에 화근이었다. 이로써 자연(야생) 바이러스가 원자 폭탄보다 무섭다는 사실을 여실히 경험했다. 본래 자연에서 동식물과 벗 삼아 존재해야 할 바이러스가 자신들 서식지의 붕괴로 인간에게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결과였다. 인간을 숙주삼은 바이러스가 향후 어떻게 변종되어 인류를 위험에 빠트릴지 쉽게 예상할 수 없다. 지금과 같은 자연 파괴적 삶의 양식이 지속되는 한 이들 변종속도를 과학과 의학이 해결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사람 사는 집에 모기, 파리는 물론 낯선 벌레, 지네, 개미 혹은 벌 심지어 뱀이 들어왔을 경우를 상상해 보라. 놀라서 쫓아 내거나 죽이고자 하지 않겠는가? 자신들 서식지를 빼앗긴 바이러스들의 공격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성서는 본래 인간과 동물의 생존법을 달리했다. 경작하는 인간과 야생에서 절로 나는 것을 먹는 동물의 구별이 그것이다.

생존 양식의 차이는 서식지의 구별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인간 종(種)의 무한 증식과 이들 탐욕이 자신들 한계를 인정치 않았기에 야생에서 인류에게로 질병이 전이 된 것이다. 해서 금번 코로나 바이러스를 인구증가와 경제발전의 혹독한 대가라 해도 결코 지나친 언사는 아니겠다(케이트 존스).

▲ 지난해 말부터 맹위를 떨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박쥐로부터 왔다는 것이 중론이다. ⓒGetty Image

여하튼 인수(人獸)혼합된 바이러스의 지속된 변종으로 인류는 위험사회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럴수록 이를 생태위기, 기후붕괴의 전조이자 징조로 수용하여 다른 삶, 다른 문명을 꿈꿀 일이다. 예수만 십자가에 달린 적이 아니라 아낌없이 삶을 내준 지구도 십자가 고통을 감내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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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듯이 목하 지구는 지질학적으로 생존이 가능한 홀로세 말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지구 시스템 전체에 가한 인간의 과도한 영향 탓에 인류세로 기억될 것이다. 플라스틱을 비롯한 인간 삶의 흔적들이 과도하게 축적된 결과이다. 하지만 인류세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가치관을 추동했다. 탈(脫)결핍을 축복이자 문명이라 여긴 인류가 몰(沒)가치적 시장만능주의에 영혼을 빼앗긴 것이다.

해서 작금을 자본세라 일컫기도 한다. 자본세에 이른 지금 우리는 과거 슈바이처가 아프리카 원시림에서 서구 문명을 바라봤듯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카오스에 이른 서구 문명국가들을 바라보고 있다. 봉쇄와 격리로 일상이 사라졌고 물건을 사재기 하며 미국의 경우 자기 보호를 위해 총기구매가 늘고 있으니 장벽사회에 진입한 듯싶다.

신자유주의 체제하에 부가가치가 크고 많은 제품을 생산하고 값싼 제조업을 가난한 나라에 하청 주듯 떠 넘겼으니 서구 선진국들이 마스크 없어 허둥대는 것은 사필귀정이다. 군산복합체 국가인 미국의 위기대응 능력이 힘껏 초라해 진 것도 이런 맥락 속에 있다. 한국 역시 이런 추세에 있었으나 제조업을 포기하지 않은 탓에 위기를 넘겼고 4월 16일자 문 대통령 글에 실렸듯이 세월호 참사를 비롯하여 거듭되는 재난에 대비했던 지도자의 역량 덕을 크게 입었다.

수 백 만개의 바이러스 진단장비가 미국을 비롯한 유럽 그리고 전 세계로 수출되어 도움을 주었던 바, ‘나라를 구하라 했는데 세계를 구한 대통령이 되었다’는 말이 페이스 북을 통해 농/진담으로 회자되고 있다. 한겨레신문 기자(장의길)는 이런 이유라면 기꺼이 ‘국뽕’가자가 되겠다고 글로 감사했다. 언제, 어떻게 사용될지 모르는 방역(예방)을 위해 투자한 것은 오로지 ‘생명 가치’에 대한 감수성에서 비롯한 것이겠다.

세월호 아픔을 온 몸으로 겪어 체화시킨 한 지도자의 진실성의 열매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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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와 마주한 정부의 대응능력에 대한 찬사가 지속되는 중이다. 정보 투명성을 전제로 봉쇄와 폐쇄 정책을 따르지 않았던 까닭이다. 사회주의 체제 하의 강제력을 동원한 중국은 물론 선진국이라는 미국 및 유럽과도 달랐다. 유럽 국가들도 처음부터 이런 정책을 펼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답일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감염자 수가 확증하는 현실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급기야 이에 굴복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 국·내외적으로 연결과 교류의 원칙을 유지시켰다. 정보 투명성을 전제로 해서 말이다.

또한 우리 정부는 집단 면역 상태에 이르기 까지 방임한 스웨덴은 물론 노약자, 기저질환자를 먼저 포기했던 실용적(?) 영국과도 달랐고 자신들 정치-선거와 올림픽-를 위해 사태의 위중함을 묵과한 미국이나 일본과도 크게 변별되었다. 정치에 부담되었음에도 진단키트를 통해 투명하게 확진 자를 찾아냈고 국가가 이들을 끝까지 치료했다.

국가 의료체제의 승리라 할 것인데 이는 오롯이 의료체제의 민영화를 거부한 결과였다. 지난 정부시절 의료 민영화의 요구가 얼마나 집요했었는지를 우리는 명백히 기억한다. 얼마 전 종영된(SBS) 드라마 ‘낭만 닥터 김사부’에서도 의료 민영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설득력 있게 표현해 주었다.

위기 시 마다 공(公)을 위해 사(私)를 죽인 뭇 시(평)민의 정서 역시 세상이 주목할 만한  일이다. 주지하듯 IMF 시절 우리는 본인들 결혼반지, 자식들 돌 반지까지 내놓은 적이 있었다. 이것들은 금 값 이상의 가치를 지닌 정서적 보물들이다.

이처럼 위기극복을 위한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은 과거의 퇴물이 아니라 순간순산 우리들 DNA속에서 되살아났다. 이번에도 수많은 민(民)들이 자기 삶을 희생해 주었다. 의사. 간호사, 구급차 및 소방대원들을 비롯한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 덕분에 이 땅에서의 펜데믹(Pendemic)의 위기를 넘어 설 수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추가 지정된 근로복지공단 대구병원 의료진이 26일 오후 병원 지하 강당에서 진료를 앞두고 보호복, 마스크, 고글, 이중장갑 등 개인보호구 착용 실습을 하고 있다. ⓒ뉴스1

상대적으로 교회역할은 퇴행적이었다. 예배를 이유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거부한 것이다. 유흥업소들과 비교하며 예배중지를 교회탄압으로 몰아갔고 정권 비판에 초점을 맞췄다. 이런 연류로 교회는 자신들이 비판하던 신천지와 차이 없는 집단으로 매도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예수 정신이 실종된 결과일 것이다. 하느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교회와 예배를 앞세운 것은 예수 정신, 성육신 사상과도 걸맞지 않는다. 하느님이 하느님으로 머물지 않고 인간으로 오신 이유 말이다. 이점에서 ‘성육신의 신비는 구체적 현장에서만 재현된다’(이반 일리치)는 말을 깊이 되새기며 좋겠다. 일시적 예배 중지는 사람을 살리는 일로서 결코 안식 계명을 결코 위반한 것이 아니다.

자연 또한 정화되어 무한 생명을 품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바다 거북이가 돌아와 알을 낳기 시작했다. 물론 자본화된 종교, 즉 사람이 모여야 돈(헌금)이 모이는 구조에서 특히 작은 교회들이 겪는 고통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이 고통은 코로나 현실에서 교회, 교단 스스로 해결할 문제이다. 본 사태를 맞아 교회네 빈익빈/부익부의 문제를 영구히 해결할 책임이 교단 행정가들 몫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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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금번 코로나 바이러스는 지구 생산 네트워크를 멈춰 세웠다. 전 세계적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감수해야 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수없는 기업이 도산되어 실업자를 양산시킬 것이고 그럴수록 국가의 책무는 더욱 막중해졌다.

과연 인류는 어떻게 코로나 이후를 대처할 것인가? 중론은 초(超)장벽 사회로는 난관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보다 더욱 연결과 펼쳐짐, Connection과 Unfolding(미주 1)이 요구된다는 목소리가 대세이다. 물론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만이 능사이자 답은 될 수 없겠다. 우리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인류가 쌓은 부(富)가 졸지에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수십만의 목숨도 하루아침에 잃었다.

이전 상태로의 회귀가 목적이라면 코로나 사태가 반복·재현되는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글 모두에 필자는 새 문명, 새 종교 그리고 새 신학을 말한 것이다. 우리들이 정상(Normal)이라 생각했던 삶의 기본좌표도 이동시키고 세계 구심점도 이동 시켜야 할 시점이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발달시킨 선진국의 붕괴를 보며 이전 문명과의 절연을 과감히 선포하고 기독교의 미래를 달리 고민할 필요도 여기에 있다. 그럴수록 ‘모든 문명은 붕괴한다. 그것이 인간 조건이다‘(H. 파르칭거)란 말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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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는 기존 ‘정상’이라 여겼던 것을 모두 붕괴시켰다. 인류는 지금 ‘뉴 노말(New Normal)’을 요청받고 있는 중이다. 경제를 비롯하여 정치, 교육, 종교 그리고 일상적 삶에 이르는 전 영역에서 말이다.

우선 코로나 바이러스는 비교우위에 근거한 신자유주의적 생산체계를 붕괴시켰다. 제조업을 중국에 의존한 채 군수산업에 몰두했던 미국식 경제가 더 이상 유효할 수 없게 되었다. 식량주권을 포기한 채 산업화를 이루겠다는 꿈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이와 함께 실물경제에 비해 공룡처럼 커진 금융체제의 허구성도 폭로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경제(자산)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생명가치의 중요성을 새삼 부각시켰다. 인간 생명을 위해 어떤 것도 하찮을 수 없다.

따라서 향후 도시문화의 붕괴도 예견할 수 있겠다. 익명성, 효율성, 자율성에 바탕 한 도시문화의 한계는 분명하다. 거리두기를 어렵게 할 만큼 인간을 욕망덩어리로 만들었던 까닭이다. 그럴수록 도시는 바이러스가 기생, 확산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된다. 성서가 인류 최초로 도시(놋)를 건설한 사람을 가인이라 칭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결국 코로나 바이러스는 시장만능주의 폐해를 여실히 목도하며 국가의 역할을 다시 강조하게 될 것이다. 의료체계를 비롯한 공공기관의 민영화는 숱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 수밖에 없다. 거듭 말하지만 공공성을 약화시킨 신자유주의 체제 하의 서구-일본 포함-한계를 향후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다.

코로나 위기 속에서 심지어 미국까지 세계인들 모두가 일정부분 사회주의자가 된 것이 흥미롭다. 엄청난 재정을 풀어 기본(재난)소득을 마련코자 한 까닭이다. 이점에서 약화된 거버넌스는 다시 힘껏 소생되어야 옳다.

하지만 걱정도 없지 않다. 이런 비상상황이 거듭 상시화될 수 있다는 우려 탓이다. 벌거벗은 생명, 곧 생명 주권을 담보로 인간 감시, 생체감시, 곧 전체주의 국가가 탄생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지젝) 인간 자유를 소중하게 여긴 서구 지성인들 이점을 특히 염려하고 있다. 진단키드를 맘껏 활용하여 확진자를 발견했고 동선을 추적하여 감염자를 격리시킨 한국의 성공사례조차 자유의 축소라 여기는 중이다.

하지만 정보 투명성은 코로나 극복의 선결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점에서 『호모 사피언스』 저자 ‘하라리’는 인간이 자기 몸의 주체인 것을 더욱 자각할 것을 권했다. 본인 스스로가 병의 주체이자 치유의 주체란 사실을 말이다.

▲ 유발 하라리

후술하겠으나 이 점은 종교의 경우에서도 유효하다.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있다는 자각과 소통된다. 율법적 종교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종교인이 되란 말이다.

여하튼 ‘뉴 노말’이 권위주의 강화, 전체주의의 부활로 귀결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도 종교적 권위주의는 이번 사태로 크게 후퇴하겠으니 ‘빅브라더’ 위치를 점유할 수도 있는 정치적 권위주의 팬데믹을 예의 주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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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로 전 세계가 마이너스 성장의 질곡에 처했다. 서구 대국들 중에서는 수백, 수천만의 실업자가 생긴다 하니 걱정이다. 한국도 마이너스 1.2%로 하향조정 되었고 수 백조를 풀어 경기 부양책을 쓰고자 한다. 정치의 근본이 백성을 먹이는 경제, 살림살이에 있으니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 이전 상태로의 회귀를 답이라 여긴다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세계적 희생이 값없어질 듯하다.

금번 사태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소위 인간세, 자본세의 잘못된 결과였다면, 더구나 향후 지속적으로 발생할 개연성이 크고 많다면 ,새로운 사회를 위한 다른 균형점을 찾는 일이 필요하다. 의학적 치료제, 백신을 만들어 대응하겠다는 논리는 필요충분한 답이 될 수 없다. 기존 체제를 유지, 존속시키겠다는 전제 하의 발상인 탓이다. 지속적 생산, 즉 GDP위주의 경제성장이나 국가 세력의 확장을 위한 출산율 증가 등을 전제로 하는 한 코로나가 주는 값비싼 교훈을 방기할 수밖에 없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인간을 욕망덩이로 여겨 ‘탈’결핍 사회를 추동하는 한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이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 모두가 사회주의자들이 된 것을 다시 기억해 보자. 코로나 위기 속에서 보편적 복지가 실현되었고 몇 달 동안의 오염 감소로 자연이 회복되었다 한다. 멸종된 듯 보였던 바다거북 같은 동물들이 나타났고 산란을 시작했다. 무엇보다 대기질의 호전으로 영유아를 비롯하여 노인들 수 만 명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코로나 사태의 결과였다.

향후 전통적인 고용방식 대신에 지유노동, 즉 플랫폼 노동, 온라인 노동 등이 대세가 될 사회적 변동에도 주목할 일이다. 코로나 사태로 학습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에서 정착된 결과라 하겠다. 비상시의 이런 체제가 평시에도 지속시킬 긍정적 이유가 참으로 적지 않다.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혼란이 있겠으나 새 체제를 상상, 계획, 실현 시킬 시점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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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빌 게이츠는 금번 코로나 19를 인류 문명을 위한 위대한 ‘교정자’로 일컫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일상의 중요성을 일깨웠고 자아 도취된 인류의 허상을 직시케 했으며 코로나 앞에 만인 평등하며 그 해결을 위해 연대 이상의 백신은 없다고 본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그는 문제인 대통령과 통화하며 자신도 세계를 위해 연대하겠다는 다짐을 피력했다. 백신 치료제를 위해서 뿐 아니라 새 문명을 만드는 일을 위해서 자기 재산을 쓰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진단 키트를 세계에 공급한 한국의 개방성과 연대에 세계적 대부호가 손을 맞잡은 것이다.

▲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창업자 빌 게이츠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전세계가 어려움을 처한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잘 대처하고 있는 한국과 함께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진실로 코로나가 인류 문명을 치유하는 교졍자가 될 수 있을까? 필자는 이 말을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하느님의 ‘희년’법으로 수용할 것이다. 마침 NCCK는 올해 2020년을 1995년에 이어 새롭게 희년으로 선포했다. 희년의 해에 발생한 코로나 19 바이러스, 그것을 위대한 ‘교정자’로 언급한 빌 게이츠, 뭔가 연결고리를 상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주지하듯 레위기에 언급된 희년법은 일종의 신적 폭력성(?)이라 말해도 과하지 않다. 물론 하느님 사랑의 다른 쪽 모습이겠으나 요구받은 자의 입장에선 감당키 어려운 강제였을 것이다. 그토록 원하던 가나안 입성이었으나 그곳은 점차 하늘 뜻과는 역방향으로 흘러갔다. 자연은 황폐했고 배고픈 사람이 많았으며 불한당 숫자적 적지 않았다. 노예 신분으로 전락된 사람들도 당연히 그 만큼 많았으리라.

이런 현실은 세상을 ‘보기 좋게’ 만든 그의 마음이 아프게 했다. 하여 입성 50년 되는 해를 희년삼아 처음처럼 살자고 권면한 것이다. 혹자에게는 폭력적 언사였겠으나 사실 이런 요청은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보기에 좋았던’ 세상을 기억하며 현실을 재창조 하고 싶었던 하늘의 마음이었다. 예수가 전한 하느님 나라 선포도 이런 정신에 기초했다.

하지만 망가진 세상을 위해 지속적인 교정자가 필요했던 바, 이제 사람으로는 역부족하기에 마침내 그 주체가 바이러스가 되었다고 말하면 너무도 불경스런 말이 될 것인가? 더구나 수없는 약자들, 가난한 이들 수십만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태이기에 말이다. 하지만 하느님 독재 운운하며 문자적으로 독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신정론의 틀거지로 논쟁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단지 세상을 교정하려는 그의 뜻, 그것이 누구에겐 폭력이 될 수도 있겠으나 세상 모두를 품는 길이란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코로나 이후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삶의 기준점을 달리 하는 시작이어야만 했다. 가보지 않은 길로 나가는 힘을 우리 모두는 상상하며 연대해야 할 책임이 있다. 기독교인들이 의당 앞장서야겠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흐름을 사회주의로 몰아가며 수구를 지향하고 있으니 기독교인에게서 미래를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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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성서에서 새로운 기(표)준점을 위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얍복 강변에서 하느님 천사와 씨름하다 환도뼈를 다친 야곱, 그래서 ‘절뚝이며 걸었다’는 야곱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한 때 자신의 능력과 술수를 이용하여 남의 재산과 가솔 일체를 빼앗다 시피 얻었던 야곱, 그러나 지금 모든 재산을 형 에서에게 앞서 보내고 압복 강변에서 고뇌하는 야곱을 상상해 보자. 장자권을 속여 탈취했던 형의 얼굴을 볼 면이 없었던 탓이다.

▲ Gustave Dor&#233;,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하느님 천사로 명명된 자신의 진짜 자아와 씨름했고 그 과정에서 환도뼈를 다쳤기에 그는 이제 예전처럼 빠르게 질주하는 인생을 살 수 없었다. ‘절뚝거리며 걷는 야곱’, 느렸기에 그는 비로소 주변을 살필 수 있었고 급기야 형의 얼굴을 하느님처럼 대면할 수 있었다. 절뚝거렸기에 예전과 다른 기준점이 생겼고 그로써 하느님을 보았으며 모두와 화평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얻울 수 있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인류세, 자본세로부터의 탈출(구원)을 위해 ‘절뚝거리는’ 야곱의 삶, 그 이미지를 다시 소환하고 싶다. 그동안 인류는 얍복강변 이전의 야곱처럼 살아왔다. 자연과 이웃에 급기야 하늘에 큰 해를 입히고 죄를 지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기기만 했던 자연에 질 줄도 알아야 하고 이웃을 더 크게 연민하며 그와 연대하여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흔히들 역사가 코로나 사태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얍복강변 이전과 이후의 야곱의 모습과 견줘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코로나 사태 하에서 이기적 모습을 보였던 기독교, 세인들로부터 저들이 비판하던 신천지와 다를 것 없다 폄하 받던 기독교의 살 길도 바로 여기서 찾을 일이다. ‘절뚝거리는’ 야곱의 이미지, 그에 걸 맞는 우리 사회의 새 기준점을 학자들은 ‘성장신화’와의 이별, 곧 ‘탈’성장이라 칭한다. 미래를 염려하는 사회 시스템으로서 ‘수축사회’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영역에서도 ‘작은교회가 희망인 것을 역설한지 수년이 족히 지났다.

출산율이 감소하는 시점에서 더 이상의 성장 신화는 가능할 수 없다. 더욱이 종교적 권위를 실추시켰던 교회의 경우 수축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향후 이성과 과학의 힘을 더욱 요청받을 것이다. 수축사회의 특징 중 하나가 ’사회적 자본‘의 확충이다. 경쟁이 아니라 협력과 연대의 가치를 위해 기본소득 나아가 기본자산(피케트)과 같은 자리 이타적 (복지) 제도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가 말하는 영성도 이런 토대 하에서 재구성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종교가 말하는 거룩(Holiness), 전체를 뜻하는 ’Wholeness’ 그리고 구원(Salvation)이 동일 어원에서 파생된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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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의 저자 J. 리프킨의 견해를 빌어 코로나 사태 이후 기독교의 변화 방향을 재 서술한다. 주지하듯 중세기는 신앙을 근거로 타계적인 천국을 동경하며 살았던 시기였다. 이 때 신앙은 현실 부정하는 힘이었을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이성의 힘을 신뢰하여 진보적 미래에 도취되었다. 과학문명의 발전으로 낙관적 차안 세계를 유토피아로 희망한 것이다.

하지만 두 차례 세계대전 이후 차안적 발전신앙 역시 무력해 졌다. 자연신학을 부정한 바르트 말씀의 신학도 이런 정황에서 비롯한 시대의 산물이다. 이 신학을 신정통주의라 칭하는 것은 ‘말씀’에 무소불위의 권위를 두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과 인간의 힘은 한없이 약화, 무기력했다. 여여한 자연 생명력을 간과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열렸던 JPIC 공의회는 기독교 구원이 아직 실현되지 못했음을 고백했다. 여전한 전쟁위기(무기경쟁), 빈부격차 그리고 생태계 파괴가 현실인 한, 기독교는 구원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금번 코로나 사태로 기독교는 더욱 침묵해야 될 듯싶다. 자연의 보복이 이렇듯 세계를 무력화 시킬 줄 상상도 못했으니 말이다. 사람과 자연을 위한 종교가 되지 못하고 하느님(예배)만을 고집한 기독교(교회)의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반면 금번 코로나 사태는 시집의 제목처럼 ‘사람만(인생관)이 희망인 것’을 여실히 가르쳐 주었다. 현 사태에서 보듯 인간은 한없이 연약한 존재인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갖고 타인의 연약함을 생각할 줄 아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리프킨은 이런 인간을 일컬어 ‘호모 엠파티피쿠스(Homo Empatipicus)’, 곧 ‘공감하는 인간’이라 말했다. ‘약한’ 존재란 말 속에 중세적 신앙요소가 담겼고 이웃과 ‘공감’할 수 있기에 근대 이성의 낙관성 또한 이 말 속에 내포되었다.

인간 고통을 빌미삼아 혐오와 갈등 그리고 배제를 만들어 내는 진짜 같은 가짜뉴스의 폐해(Infodemic) 속에서도 공감의 힘을 믿고 난관을 극복해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한 것이다. 이점에서 공감하는 힘을 영성의 다른 말로 여겨도 좋겠다. 공감력을 통한 세계적 차원의 연대와 결속만이 코로나 사태 이후를 기대할 수 있는 근거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필자가 앞서 알버트 슈바이처를 소환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이 세상이 ‘살려고 하는 의지’로 가득 찼다는 생명외경 사상의 자각을 각성시키기 위함이다. 서식지를 잃었기에 자신 숙주를 찾고자 애쓴 바이러스의 생존의지 탓에 우리 인류가 이처럼 고통을 당했다면 그 의지를 꺾는 백신을 만들기 전에 그 의지와 공존할 수 있는 새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한다. 살려는 의지로 인해 다른 의지를 꺾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면 그 이치를 존중하는 문화가 지속력을 지닐 수 있다. 이점에서 슈바이처는 자연의 능동성(활력)을 말하지 않는 철학, 신학하고는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리라.(2) 코로나 이후 우리들 기준 점을 달리 잡고자 할 때 귀감 되는 사상가의 말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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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연구 없이 마음으로 내려썼기에 두서없는 글이 된 것 같다. 이 골자를 갖고서 다시 쓸 긴 논문을 기대하며 글을 마무리해야 되겠다. 단지 한 가지 내용만 더 첨가하고 싶다.

주지하듯 세계가 한국의 코로나 대처능력을 주목하고 있다. 주요 선진국들이 격리, 봉쇄정책을 펴는 상황에서 수천만이 움직이는 총선마저 성공적으로 치렀다는 점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수 십여 나라에 진단키트가 수출되었고 방역 노하우의 요청이 쇄도하고 있는 중이다.

중국의 경우 바이러스 진원지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백신 개발에 선도적 역할을 하는 등 코로나 지원에 힘쓰고 있으나 정보 불투명으로 불신을 키운 탓에 한국만큼 주목을 받지 못한다. 공산주의 체제하의 감시제도가 너무도 개인 자유를 억압한 것도 서구의 시각에서 불편했을 것이다. 이점에서 자율성에 호소한 한국이 새삼 이목을 끌었고 세계 구심점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동시에 한국의 대처능력에 대한 서구인들의 이/저런 판단이 보도되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 서구 민주주의를 가장 잘 배워 이식했기에 가능했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독재의 역사를 살면서도 민주세상을 만든 한국을 평가하는 말이지만 결국 서구 민주주의의 가치우월성을 전제로 했다.

이 말 속에는 중국의 체제, 즉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불신이 담겼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코로나 사태로 야기된 서구의 몰락이 설명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자랑하는 서구 선진국의 폐해가 상상불허의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렇기에 혹자는 한국적 성공을 유교적 에토스에서 찾기도 했다. 소위 탈근대적인 경찰국가의 유교적 모델을 한국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자율을 주었으나 통제하고 관찰, 감독하는 국가권력이 작동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답이 되기 어렵다. 유럽과 미국의 경우 우리보다 더욱 격리, 봉쇄가 이뤄졌던 까닭이다. 교회 예배의 경우 위반 시 법을 집행한 서구와 달리 우리는 전광훈의 교회조차 강제화할 수 없었다.

이런 정황에서 한국의 성공을 ‘모성적 돌봄’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우리 식 시각이 생겨났다. 서구 기독교의 부권적 명령체제로서 국가가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모성(유교)적 돌봄 시스템의 작동 탓이란 것이다. 법 집행을 보다 지속/반복적인 안내를 우선 했으며 무차별적인 치료에 있어 그 헌신이 모성적으로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일리 있으나 이 역시도 전리가 될 수 없다. 오늘 이 땅의 유교가 이런 심성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유교문화의 본산지인 TK 지역의 정서는 이런 답에 고개를 젓도록 한다.

본 사안에 대한 답을 이은선 교수에게서 기대할 수 있겠다. 긴 세월 유교(중국문명)와 기독교(서구문명)간 대화에 천작했기에 오늘의 한국적 실상을 바르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인습적 유교와 기독교를 넘어 그 속에서 ‘다른’ 면을 찾을 때 가능하다는 지론을 배울 때가 되었다.

다른 유교와 다른 기독교의 만남을 위해 감리교의 토착화논의는 코로나 사태를 맞아 재활성화 될 필요가 있다.(3) 한국 민주주의가 유교 종주국인 전체주의적 중국과도 다르고 민주주의 본류인 서구와도 다른 이유를 밝혀내기 위함이다. 코로나 사태는 경제, 정치, 생태영역에서 뿐 아니라 항차 문명 간의 대화를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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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하나 더 짧게 언급하고 싶은 것은 코로나 사태에 직면한 남북관계에 관해서이다. 할 일 많은 김정은 중병설이 퍼지고 있어 걱정이나 코로나 사태로 국제적 연대가 화급한 상황에서 북쪽 담장이 무너지는 사건을 기대해 본다. 많이 회자되듯 개성공단을 마스크 및 진단키트 생산 공간으로 활용하다면 세계가 수용할 수 있지 않을까? 배제보다는 연대를 전 세계가 원할 것이다.

이제 곧 4.27 회담 2주기가 다가온다. 지난 해 50만의 사람들이 DMZ에서 손을 잡고 평화를 노래했듯이 금번 4.27에 남북 회담이 다시 성사되기를 기대한다. 한미동맹체제에 종속되었던 이전 관계를 넘어설 이유를 찾아 우리 정부는 코로나 선진국 이미지를 갖고 세상에 알려야 할 것이다.

이 땅의 교회가 장벽과 이념을 허무는 일에 앞장서 줄 것을 기대한다. 장벽을 넘어 통일 열차의 시작을 역시 코로나 사태에 직면하여 적극 검토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전쟁 70년을 맞는 시점에서 죽은 영혼들에게 살아있는 자들이 바칠 수 있는 큰 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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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전제 하에서 교회가 직면하여 풀어 갈 사안들을 다음처럼 나열해 본다. 필자가 생각해 온 코로나 사태 이후 한국 교회의 현실적 과제는 이래와 같다. 함께 풀어 갈 주제라 생각되어 큰 제목만 적어 보았다. 이후 활발한 토론을 통해 기독교(회)가 코로나 사태이후 새문명의 표준점을 찾는데 일조할 것을 바랄 뿐이다. 이를 위해 ’다른‘ 기독교가 여실히 필요할 것이다.

1. 예배란 무엇인가? - 하느님 환호를 지속하는 일
2. 성서 줄기의 재확인 - 창조, 희년, 출애굽, 하느님 나라,
3. 안식일을 위한 종교에서 사람을 위한 종교(향벽설위/향아설위)
4. 흩어지는 교회(에클레시아)
5. 평신도 사제직 - 가정 예배 강조 - 온 라인 예배의 함정(한계)
6. 주일 집중 예배의 다변화
7. 교회 공동체 - 해석의 다양성과 복음의 정치학(하느님 나라 운동)
8. 녹색은총과 적색은총의 조화 - 단순성(탈결핍), 손의 창조력
9. 새로운 영성 운동 - 공감력의 확대(이타자리)
10. 신앙생활/생활신앙 - 안식일의 종교에서 일상의 종교로(My Life is my Message)
11. 진리투쟁-인포데믹(Infordemic)과의 지속적 싸움
12. 공공복지(사회주의적 요소)강화 - 유아 및 장애인, 노인, 이주민그리고 기본소득
13. 문화적 다양성/종 다양성 존중 - 동일성에서 차이의 존중
14. 뉴 노말(New Normal)의 선도적 역할 - 다룬 기(표)준점을 갖고 살기
15. 작은교회 운동(탈자본주의) - 축소사회의 등장, 대형교회와 작은(지역)교회, 중간 계층 교회 실종(?)
16. 하느님은 세상을 통해 교회에게 말씀한다(Missio Dei) - 구속사에서 보편사 그리고 우주사의 신학
17. 하느님의 무능력(?)과 신앙
18. 성직/직업으로서의 목회
19. 코로나 팬데믹 이후 신학 교육의 재구성 - 오리엔탈리즘 극복
20. 근대 이후 시민 사회 속의 기독교(회)
21. 교회개혁을 위한 열정 - ‘다른’ 기독교로서 JPIC 신학

 

미주

(미주 1) 이 말은 경복궁 옆 기무사 터에 국제 미술관이 지어져 개관할 때 내 걸었던 주제였다.
(미주 2) Albert Schweitzer/Fritz Buri, Existenzphilosophie und Christentum(Briefe 1935-1964), C.H. Beck Verlag/Muenchen 2000, 참조.
(미주 3) 이은선,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서울: 모시는 사람들, 2016) 참조.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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