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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교단의 또 하나의 추태를 바라보며한국 개신교 땅을 딛고 일어나라
이정훈 | 승인 2020.05.20 18:20

불교의 교리 혹은 가르침 중에 ‘수증론(修證論)’이라는 분야가 있다. ‘닦을 수’라는 글자와 ‘증명하다, 법칙, 병의 증세, 깨닫다’ 등의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는 ‘증’이 말이 결합된 단어이다. 이에 대한 영어 번역을 보면 ‘Soteriology’(소테리올로지)인데, 서구 신학으로 말하면 ‘구원론’에 해당한다.

땅으로 넘어진 고려 불교

불교의 이 수증론은 중생이 무명(無明)에 가리어 범부(凡夫)가 되었는데 어떻게 무명을 벗어날 것인가 하는 이른바 곧 ‘닦아서 증멸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서 무명(無明)은 무지(無知)와 등가어이다. 그러니 나 같은 중생(衆生)이 부처님의 법을 깨닫지 못해 범부가 되고 윤회(輪廻)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이러한 윤회의 고리를 끊는 방법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또한 불교에서는 이 수증론, 즉 깨달음과 닦음의 상호 관계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있다. 불교사상사 전체를 보면 인도불교에서는 돈수와 점수, 티베트에서는 돈오와 점오, 중국에서는 돈오와 점수의 대립으로 보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극심한 대립을 넘어 종합화를 이루려고 했던 것이 화엄, 천태 및 선 등의 형태로도 나타났다.

이러한 수증론의 문제가 20세기 한국 불교계에서는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대립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돈오돈수는 성철 스님께서 화두로 제시하셨기 때문에 불교 내에서 다양한 논의와 토론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돈오돈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성철’ 스님(1912-1993년)께서 화두로 제시하기 전에 한국 불교는 돈오점수론이 큰 흐름이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 보조국사 지눌

어쨌든 이 돈오점수론의 근간은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에 마련되었다. 특히 그 당시 타락의 일로에 있던 고려 불교를 일깨우기 위해 동학 10여 인과 결사체를 만드셨는데, 그 결사체의 선언문 성격의 『勸修定慧結社文(권수정혜결사문)』을 통해 정리한 것이다. 권력에 편에 서서 고려를 갈아먹는데 일조하고 있던 고려 승려들에게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을 것을 권하신 것이다.

이 『권수정혜결사문』 제일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한다.

恭聞, ‘人因地而倒者, 因地而起, 離地求起, 無有是處也.’
(공문, ‘인인지이도자, 인지이기, 이지구기, 무유시처야.’
迷一心, 而起無邊煩惱者, 衆生也, 悟一心, 而起無邊妙用者, 諸佛也.
(미일심, 이기무변번뇌자, 중생야, 오일심, 이기무변묘용자 제불야,)
迷悟雖殊, 而要由一心, 則離心求佛者, 亦無有是處也.
(미오수수, 이요유일심, 즉이심구불자, 역무유시처야.)

삼가 들으니, ‘땅으로 인해 넘어진 사람은 땅으로 인해서 일어난다. 땅을 여의고 일어나기를 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한 마음(一心)을 미혹하여 끝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이는 중생이며, 한 마음을 깨달아 끝없이 미묘한 작용을 일으키는 분은 모두 부처님이다.
미혹과 깨달음이 비록 다르지만, 요지는 한 마음을 말미암는 것이니, 마음을 여의고 부처를 구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특히, 제일 첫 단어인 ‘공문’이라는 글귀로 미루어 보아, 지눌 선사께서도 ‘인인지이도자, 인지이기, 이지구기, 무유시처야.’라는 구절을 어디에선가 들으셨거나 혹은 인용하셨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불교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구절의 전반부와 비슷한 내용은 이통현(李通玄, 635~730)의『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에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如人, 因地而倒, 因地而起. 一切衆生, 因自心根本智而倒, 因自心根本智而起.”(만약 어떤 사람이 땅으로 인해 넘어지면 땅으로 인해서 일어난다. 일체 중생이 자기 마음의 근본지로 인해 넘어지면 자기 마음의 근본지로 인해서 일어난다)

또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의 어록에도 등장한다.

“因地而倒。因地而起”

하여간 지눌 선사께서 인용해 설법하신 내용을 현대적으로 풀자면 무인이 칼로 세상을 다스리던 폭압의 시절, 함께 타락해 권력을 탐하던 고려 불교의 현실을 보여주신 것이다. 마음이 땅으로 향해 탐욕으로 넘쳐 넘어졌으니 그 땅의 현실을 딛고 일어서라는 선언이다. 절에 재물이 넘쳐나고 거드름 피우며 현학적인 지식을 자랑하던 불교를 떠나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치열한 수행과 계율의 길로 나서라는 가르침이다.

땅으로 넘어진 한국 개신교

이제 성서로 돌아가보자. 신약성서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다섯 개의 가르침이 그 뼈대를 이루며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맨 처음에 위치해 있는 것은 이른바 산상수훈(5-7장)이고 이들 다섯 편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분량이 많으며 전통적으로 이 산상수훈은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이라고 한다.

▲ 지난 19일 모 교단 중부연회가 주최한 대규모 행사로 인해 개신교는 또 다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연합뉴스

아마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많은 해석과 설교가 이루어진 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또한 다양한 해석과 논쟁이 있어 왔다. 그 논쟁에 하나는 이 가리침에 실제적인 의미를 둘러싸고 나타났다.

즉 이 가르침은 오직 그리스도의 초림과 임박한 재림 사이의 짧은 기간에 적용 가능한 중간기적인 윤리만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이에 반해 전 교회 시대를 위한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의 윤리라고 주장하는 그룹도 있다. 여기에 개인적인 윤리인지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장 가능한지에 대한 논쟁도 분분하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산상수훈의 내용상 이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첫 두 구절을 제외하고 모든 가르침은 천국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천국은 마태복음의 성격상 유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위한 성격으로 알려진 바, 소위 테트라그라마폰인 신성한 하나님의 이름을 표기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해석하면 하늘나라를 우리말로 옮긴 것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여간 이 산상수훈 중 마태복음 5,3-16에 등장하는 이른바 팔복(八福) - 흔히 이야기 되는 것과는 달리 텍스트 그대로 본다면 구복(九福)이다 - 중 세 번째 복을『권수정혜결사문』에 비추어 볼 수 있다. 팔복 중 세 번째 복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μακάριοι οἱ πραεῖς, ὅτι αὐτοὶ κληρονομήσουσιν τὴν γῆν). 

학자들에 의하면 이 구절은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인 LXX(칠십인역) 시편 37,11을 그대로 인용했다고 한다. 이 시편 37,11은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온유한’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πραεῖς는 히브리어 ענוים(아나빔)을 번역한 것으로, 이 아나빔은 칠십인역 이사야 61,1에서는 πτωχοὶ(프토코이, 가난한 사람들)로 번역되어 있다.

결국 첫 번째 복에 등장하는 ‘가난한’이라는 단어와 세 번째 복에 사용된 ‘온유한’이라는 단어는 같은 히브리어의 서로 다른 그리스어 번역어인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팔복의 첫 번째 복과 세 번째 복은 거의 비슷한 사고 유형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첫 번째와 세 번째 복의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세 번째 복의 마지막 두 단어인 τὴν γῆν(텐 겐), 즉 ‘땅(을)’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과 맺으신 계약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에 얻게 될 땅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사야 61장의 문맥에서 땅은 메시아의 도래와 관련된 “새로운 땅”을 나타낸다. 현재 이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즉, 첫 번째와 세 번째 복이 지칭하는 사람들, 한글 번역으로는 ‘가난한’과 ‘온유한’을 특징으로 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나 계급적으로 하층에 속하는 이른바 땅이 없는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이다. 고된 삶을 살아가는 ‘소작농’을 가리킬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한 단어이다. 그래서 가난하기에 온유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로 주눅든 사람들일지 모른다.

땅을 딛고 일어서라 한국 개신교

이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코로나19 대유행 상황에서, 아니 그 이전부터 한국의 기독교는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었다. 지눌 선사의 이야기처럼 땅으로 넘어진 자들이었고, 가난하고 온유한 자가 아니라 부유한 자들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일부 한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숫자가 많다. 광화문 광장과 시청 광장에 등장했던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이를 증명하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이들처럼 광장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샤이(shy) 부자 - 재산이 많다는 뜻이 아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더 많은지도 모른다. 이들에게 동조하는 그리스도인들 말이다.

또한 오늘 오후 신문에는 사회적으로 도움이 안 되는 추태에 가까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담은 기사가 게재되었다. 이유에 어떠하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는 가운데 인천의 한 교회가 목회자 등 1천여명이 모이는 행사를 개최한 것 때문이었다. 지난 19일 모 교단 중부연회가 인천시 부평구 한 교회 건물에서 목회자 등 1천여명(인천시 추산)이 모이는 행사를 열었다는 것이다.

이날 행사는 인천과 파주·고양 등 경기도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중부연회의 회원들이 모이는 행사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인근 지역 주민들은 인천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는데도 해당 행사가 열릴 때 참석자들이 특정 장소에 몰리는 등 거리 두기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며 불안감을 표했다고 기사는 전했다. 또 한 번 사회와는 유리된 사람들의 모습이다.

답답함이 몰려온다. 왜 한국 개신교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사회적으로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들로 지탄받는 사람들로 전락한 것일까. 넘어진 사람들이다.

이제 지눌 선사나 예수의 팔복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땅에 집중하고 땅만 바라보다가 넘어진 사람들은 그 땅을 집고 일어나야 한다. 그 땅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땅을 딛고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가난하기에 온유한 소작농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땅을 딛고 일어서는 복을 간구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더욱 가난한 사람들로 말이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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