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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심으로 하지 말고(水善利萬物而不, 夫唯不爭, 故無尤)예수살기(빌립보서 2:1~5)
홍인식 목사(순천중앙교회) | 승인 2020.06.20 17:38

적자생존(適者生存)

오늘의 사회에 대하여 표현하는 말 중의 매우 고전적인 단어가 있습니다. 적자생존(適者生存, 영어: 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표현입니다.  ‘가장 적합한 사람이 살아남는다.’ 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단어는 1864년 영국의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가 ‘생물학의 원리’(Principles of Biology) 라는 저서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이 단어는 인간들의 사회적 생존경쟁의 원리를 함축시킨 사회-철학 용어로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용어는 찰스 다윈에 의해 생물체나 집단체의 다양한 환경 적응력이 높을 수록 오래 살아남는다는 의미를 가진 진화론 영역의 과학 용어로 발전되었습니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은 스펜서나 다윈이 처음으로 사용할 때는 같은 종이나 다른 종의 잔인한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원시 생물부터 진화된 생물에 이르기까지 환경에 가장 적합한 유전자를 가진 개체가 적응을 잘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었습니다. 서로 경쟁하여 경쟁에 승리한 종자가 살아남는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런 적자생존이라는 단어가 그 의미를 달리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와 관련된 영역에서부터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 혹은 존재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적자생존은 우리의 삶의 터전과 삶의 양식을 치열한 경쟁 체제로 몰아가는 대표적인 용어가 되었습니다. 경쟁(競爭)! 겨루고 다툰다는 의미의 경쟁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최고의 화두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경쟁을 넘어 초 경쟁시대(超競爭時代)로

경쟁(競爭)이란, '같은 목적에 대해 이기려고 서로 겨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개 경쟁은 '승리 혹은 우승을 위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것' 이란 의미로 이해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쟁의 의미가 1980년를 거치면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사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비롯한 라틴어 계통의 언어에서 경쟁(concurrence)은 “같이 달린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같이 달리는 것이 모두 경쟁인 것은 아니며 달리는 방향(욕망의 방향)이 같을 때에만 경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달리는 방향이 다르면 아무리 같이 달리더라도 경쟁의 갈등이 일어날 소지는 적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80년대 들어서면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는 달리는 방향이 달라도 경쟁합니다. 말하자면 이제 경쟁은 전 방위에서 발생합니다. 이 같은 현상을 ‘초 경쟁 시대’(hyper-competition)라 합니다.

초 경쟁 시대의 특징은 크게 무경계의 시대, 속도의 시대, 승자독식의 시대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승자독식(勝者獨食, winner takes all)은 우리 사회를 더욱 불공평하고 빈부차이가 극심해지도록 만들어 갔으며 1대99의 모습으로 변모시켜 나갔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초 경쟁 시대입니다. 이긴 사람이 모든 것을 거머쥐는 승자독식 winner takes it all 의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를 살아간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를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에게 강력한 힘을 주고 경쟁력을 강화시켜 우리로 하여금 승자로 살아가게끔 해 주는 것일까요?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초 경쟁의 사회에서 예수살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경쟁이냐 협업이냐?

경쟁이 인류의 역사를 발전시키는 가장 중요한 동력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들이 있어왔습니다. 사실 경쟁이냐 협력이냐 하는 철학적 문제는 역사가 오래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경쟁력 강화가 지금가지의 인류의 역사를 발전시키고 진화시켰다는데에 동의 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다윈의 진화론은 이러한 생각에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경쟁하면서 인류는 발전한다는 것은 일견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그렇지 않은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와 비교해서 경제-사회적 발전을 이루는데 가장 적합한 제도라고 우리 모두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사실도 우리는 절감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크로포트킨이라는 사람은 1902년에 출간된 자신의 명저 <상호부조론, 만물은 서로 돕는다.>을 통해서 동물과 인간은 경쟁뿐만 아니라 협조를 통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자연의 유일 법칙은 아니다. 상호 투쟁만큼이나 상호부조 역시 자연의 법칙이다.” 그는 서로 싸우는 개체보다는 서로 연대하고 돕는 개체들이 자연선택에서 더 잘 살아남는다는 것을 논증하는 수많은 예를 듭니다.

개미, 벌, 딱정벌레, 게, 독수리에서부터 인간 세상까지, 그리고 중세의 길드부터 현대의 노동조합까지 그가 드는 예는 무궁무진합니다.  그는 사회성과 연대가 없는 종들은 결국 멸망에 이른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협업이 경쟁보다 우수한 사회를 만들수 있다는 그의 주장도 일견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보아서도 그렇습니다. 교회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만일 가정과 교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고 긴장관계를 야기 시키는 것보다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고 염려하고 아껴주고 함께 일하는 것이 훨씬 발전적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경쟁적인 상황보다는 협력적인 상황에서 고품질의 제품이 만들어진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교육에 있어서도 경쟁적, 개인적 학습 상황보다는 협력적, 집단적 학습 상황이 질적으로 더 높은 인지방법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협동적 학습을 통해서 열등생뿐 아니라 우등생도 더 좋은 학업 성과를 올린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이처럼 경쟁만이 우월성을 낳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은 2등을 기억하지 않습니다.”라는 광고에 취해 있습니다.

이러한 광고와 거짓 가치관에 속아서 우리는 경쟁의 늪에 빠져서 이웃에 대한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까지 독자적인 경제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다음 세대들을 그렇게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바울과 예수살기

예수 살기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똑 같은 질문을 해 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어떤 유형의 삶의 스타일을 채택하시겠습니까? 그 분이 선택하는 삶의 모습이 우리의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신약의 역사에서 예수님의 삶을 가장 잘 따르고 닮아가려고 했던 사람 중의 하나가 바울의 목회 경험을 통하여 예수 살기의 한 측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12제자들과 구별되는 제자입니다.

그는 역사적 예수를 접해 보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한 예수를 신비롭게 체험한 이후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의 여정을 통하여 예수를 살고 예수를 전하였던 사람입니다. 특히 그는 매우 선교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실지로 목회 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로서 권위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바울은 실질적인 목회자로서 교회 공동체의 문제들을 피부로 느끼면서 그리고 겪으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어떤 경우에 바울은 그가 목회했던 교회의 구성원들로부터 배척을 받기도 했고 오해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분열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목회현장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인 빌립보 교회를 향한 서신에서도 바울의 목회경험이 묻어나오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떼 헌금도 보내온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에 바울에 대한 불신도 싹 트고 있었고 그 뿐만 아니라 공동체내에서 여러 가지 모양의 분열양상도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일부 성도들 사이에 다툼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을 통하여 ‘유오디아와 순두게’ 라는 두 사람에게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권고를 하기도 합니다.(빌 4:2)

빌립보 교회는 비교적 건강하게 성장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늘 빌립보 교회를 괴롭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빌립보 교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모든 교회와 모든 공동체에 해당되는 문제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분열 현상입니다.

빌립보 교회를 비롯한 당시의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분열 현상은 다름 아닌 자신의 세계를 중심으로 모든 판단을 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단순하게 분열을 극복하라는 도덕적인 가르침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마음을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같이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경쟁심으로 하지 말고

바울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2:2~5)

빌립보 교우들 중에 열심을 품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그 열심히 공동체 내에 분열을 가져오게 만들었고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말할 수 없는 긴장관계를 발생케 하였다는 것입니다.

긴장관계. 끌고 당기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적당한 긴장관계는 어떤 경우에 건설적인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되면 그것은 병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빌립보 교회 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긴장관계는 그리 건강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쟁심과 허영심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한 판단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빌립보 교회는 긴장이 서리는 모습으로 변모되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이러한 처지에 있는 교회를 향하여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훨씬 훌륭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경쟁심과 허영심으로 야기된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 바울을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나의 부족함과 잘못과 판단 실책에 대하여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의 생각에 대한 존중입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존경과 존중 없는 행위는 결국에는 경쟁심 혹은 허영심으로 발전하게 되어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쟁심과 허영심으로 하는 일들은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일이라고 할지라고 결국 우리 모두를 갈등과 긴장의 세계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 마음을 찢어 놓을 것이고 많은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서로를 돌보아 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돌보아 주는 것!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 마음으로 예수님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게 되면 서로 다툴 일도 없어 질 것이고 우리 모두는 긴장이 아니라 푸근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게 되고 만나게 될 것입니다.

긴장(緊張)사회

오늘 우리 모두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를 긴장사회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긴장관계, 심지어는 가족들과 긴장관계를 이루기도 합니다. 가정과 교회에서도 긴장 관계는 여전히 계속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세계가 바로 그랬습니다. 여러 가지 요인으로 서로 긴장하고 있는 사회였습니다. 분열과 갈등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긴장세계에 오신 예수님은 평화를 주시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했던 평화는 오늘 바울이 그의 편지를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경쟁심과 허영심이 아니라 겸손과 서로 존중과 서로 돌봄으로부터 시작되는 평화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주는 평화는 긴장이 아니라 진정한 평안입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요한 14:27)

夫唯不爭, 故無尤
다투지 않으니 탓할 것이 없다

도덕경 8장은 물의 또 다른 물의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道)의 특징입니다.

水善利萬物而不, 夫唯不爭, 故無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나 다투지 않는다.
다투지 않으니 탓할 것이 없다. 

물을 바라다보고 있으면 우리는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바닷가에서 바닷물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긴장이 아니라 오히려 긴장이 풀려지고 평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강물도 개울물도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도, 잔잔한 호수 물도, 저수지 물도 바라다보고 있으면 평안해 짐을 느낍니다. 물은 다투지 않으니까요!

이것이 예수살기입니다. 긴장과 갈등이 계속되어 평안이 없는 이 사회에서 예수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인하여 긴장이 사라지고 사람들 간에 평화와 여유가 생겨나게 되는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야 말로 오늘의 삶에서 예수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물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옳은 일을 한다고 하면서 그리고 자기가 생각할 때 바른 일을 한다고 하면서 여유가 없고 긴장관계를 발생케 하고 있다면 한 번 쯤은 자신이 하는 일을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나는 긴장을 유발시키는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나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터질 것 같은 분위기를 완화시키고 서로 다툼 없이 흘러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살기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을 이롭게 하지만 경쟁심과 허영심이 아닌 오직 겸손함과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과 그리고 돌봄과 협업을 통하여 다툼이 없어져서 서로 탓할 일이 없는 삶을 살게 해줄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오늘도 이 질문 앞에 우리 자신을 내놓고 예수 살기를 시작합시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승자독식과 패자절망의 사회분위기가 팽배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곳곳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만일 승자독식과 패자절망만 존재했다면 세상은 이미 사라져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경쟁력 강화 만이 살길이 아닙니다. 경쟁심과 허영심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겸손과 존중, 돌봄이 결국 우리 모두를 살게 해 줄 것입니다. 예수살기는 경쟁과 긴장을 넘어서 서로 돕는 삶과 평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소리없이 흐른다

정인영

여린 물살 거센 물살이 앞지르지 않고
다가가 몸 비비는 소리
웅덩이 가득 차오를 때까지 뒷물 기다리는 새벽 소리
가로막힌 산 휘돌아 가는 소리 
돌 틈 웅크리며 지나는 소리
소곤소곤 뭉툭한 돌멩이 달래는 소리
아이 발가락 간지럽히는 웃음소리 
저무는 하늘 품어 잔주름 일렁이는 소리

물은 소리가 없다
모든 인연 오롯이 제 안에 담아 부서지며 흐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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