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무엇이 보이느냐눈이 열리다(이사야 29,17-24; 마가복음 8,22-26)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0.07.16 17:56
▲ 예수님은 치유를 위해 찾아온 시각장애인을 그 자리에서 고치지 않으시고 마을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고치셨다. ⓒGetty Image

사람에게는 몇 가지 감각기관이 있습니다. 감각기관의 수를 따라 오감을 말하고 본능적 감각을 더하여 육감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들은 사람이 바깥 세계와 소통하며 정보를 취득하는 창구입니다. 성서는 하나님 인식과 관련하여 일곱번째 감각을 이야기합니다. ‘숨겨진 감각’으로 말할 수 있는 그것이 있어서 사람은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조금이나마 감지할 수 있습니다(전 3,11; 롬 1,19-20).

그 가운데 대표적인 감각기관은 시각입니다. 사람은 이를 통해 90%이상의 정보를 얻습니다. 세계와 하나님을 인식하는 그 기관들이 특히 시각이 이런저런 이유로 제기능을 다 하지 못하면, 정보의 굴절 내지 부족으로 여러가지 어려움들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오늘의 본문들은 시각 회복과 관련됩니다.

성서에는 예수께서 시각 잃은 사람들을 볼 수 있게 하신 이야기들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오늘의 사건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벳새다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시각 잃은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안수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데려온 것에서 그가 평소에 그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볼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아파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마음에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의 길잡이가 되신 듯 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그를 데리고 나가셔서 치료를 시작하십니다. 일차 치료 후 예수께서 그에게 무엇이 보이냐고 묻습니다. 그는 나무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것을 본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질문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의 대답에만 초점을 맞춰봅시다. 그는 아직 사람과 나무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하지만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시각이 충분히 회복되지 않은 탓에 그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습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그에게는 사람이 걸어 다니는 나무 같아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다시 그의 눈에 안수하십니다. 그는 똑바로 바라봅니다. 이제 그는 초점을 맞춰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력이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흐릿하게 보이던 것들을 분명하게 구별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세상이 열렸습니다. 그는 지금 세상을 다 눈에 담고 싶어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마을에 들어가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가라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를 배려해서일 것입니다. 가족들과 눈이 열린 기쁨을 나누고 익숙한 환경부터 눈에 담는 것이 정서적 안정에 이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대하는 동작이나 말 하나하나에서 그에 대한 예수의 애틋한 마음이 묻어나옵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주님처럼 할 수는 없지만 그의 마음은 닮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적 노력으로 된다기보다 주님의 마음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공명을 일으킨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한 공명 사건은 우리 마음이 비워졌을 때 가장 잘 일어날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우리 마음의 눈이 열리는 사건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마음의 눈이 닫혀 있거나 초점이 맞지 않을 때보다 우리 몸의 눈이 볼 수 없을 때를 더 고통스럽게 느낄지도 모릅니다. 사실 앞의 경우가 더 심각한 문제인데도 그렇습니다. 이는 한 눈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는 말에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마 18,9).

마음의 눈이 닫힌 두 눈보다는 마음의 눈이 열린 한 눈이 더 나을 것입니다. 눈이 없다 해도 이는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다른 곳에서 마음이 둔해져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상태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사 6,9-10). 마음의 눈이 열려 있어야 보는 눈도 듣는 귀도 제대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놀라서 말문이 막혀라 눈이 멀어 낌깜해져’라는 심판의 말을 듣습니다. 그들에게 부어진 깊은 잠의 영이 그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멀어진 마음을 하나님은 아예 닫아버리셨습니다. 감각기관이 더 이상 작동할 수 없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돌아올 가능성을 차단해버리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하나님께서 이리 하시는 것일까요? 16절은 그들이 어둔 데서 일한다는 말로 그들의 행태를 특징 짓습니다. 20-21절에 비춰보면 어둠의 일은 음모와 계략, 부당과 불의, 사기와 탈취, 상해와 죽임 등일 것입니다. 그 어둠의 일들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으로 구조화됩니다. 구조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배계층의 권력과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악의 구조는 갈수록 촘촘해지고 견고해집니다. 불공정이 심화되고 빈부격차는 끝없이 확대됩니다. 사 5,8에 따르면 지배계층은 다른 사람이 살며 가꿀 수 있는 집 한채 땅 한 조각 남지 않을 때까지 집 소유를 계속 늘리고 땅 소유를 계속 넓혀 마침내 거기 혼자 살게 되었습니다. 이 어둠의 일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어둠의 질서를 뒤집어엎으실까요? 그들이 입술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를 수 있을까요? 흐려졌던 마음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을 ‘보고’ 지혜롭게 되어 어둠의 일에서 멀어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듣지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어둠에서 볼 수 없던 눈이 빛을 볼 때가 올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때엔 억눌리던 사람들이 야훼 때문에 기뻐하고 가난했던 사람들이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할 것입니다. 새질서의 도래입니다. 그 날은 특정되지 않았지만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새질서는 누구나 자기가 지은 집에 살고 자기 땅에서 거둔 것을 먹고 더 이상 다른 자에게 빼앗기는 일 없이 평화를 즐기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입니다(사 61,21-25). 마음의 눈이 열렸을 때 하나님의 이 질서를 볼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살 때 이 질서를 추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잠자는 영을 거두시고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하소서.
우리 마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져 어둠의 일을 떨쳐버리고 생명과 평화의 일을 하게 하소서.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상기 목사(백합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윤인중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인중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