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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이름이 지워진 독립운동가크리스천 독립투사 황병길의 가족들 (1)
이이소 | 승인 2020.08.08 17:33
▲ 독립운동가 황병길 선생 ⓒ한국민족문화대박과사전(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149#)

2020년, 올해는 한국 독립운동사에 찬연히 빛나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규군에 의해서 서간도와 북간도에서 자행된 민간인 대학살의 참변인 경신대학살도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자랑스러운 승리에 대한 기념도 중요하지만, 망국의 백성들이 억울하게 당한 학살을 기념하며 조상들의 피눈물과 사무친 한을 반추하며 이를 교훈 삼아 진보와 보수를 떠나서 나라와 민족을 바르게 보전하며 유지 계승하는 일에 오천만 한국인들이 깨어나길 바란다.

부끄러웠던 사실들

연길에서 독립운동 유지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역사탐방 그룹과의 조우는 나에게 엄청난 행운이었고 충격이었다. 그 분들을 따라다니며 내가 알고 있는 만주에서 있었던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한 지식과 이해는 민족주의 계열 운동가들의 활동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엇보다 당혹스러운 것은 ‘리광인’이 저술한 『겨레 항일지사들』 전6권에 등장하는 270여 명의 투사들 중에서 이름을 아는 투사가 10여 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박문봉’과 ‘김광영’이 쓴 『중국조선족 항일지사 100인』에서도 이름을 아는 투사가 10여 명에 불과한 것이었다. ‘리광인’과 ‘림선옥’이 지은 『조선족 항일련군의 녀전사들』과 『중국조선족 꼬마항일영웅들』에 나오는 항일투사들의 이름은 거의 다 낯설었다.

연변에서 저술된 많은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의 연변과 조선족 이해, 간도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무지와 편견, 선입관이 깨졌다. 독립운동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한국에서 교육받은 자로서 이념의 논리에 알게 모르게 매여 있었던 나 자신의 역사에 대한 편견과 아집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팩트를 찾아 수용하며 이해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몇 가지 선입관과 고정관념이 깨지면서 비로소 동북삼성 전체가 한국 독립운동의 터였으며, 현재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불리는 그들이야말로 조선 관리의 학대와 수탈, 망국노의 설움과 좌절, 경신참변의 비참과 고통, 만주국의 탄압과 다양한 독립운동의 간난신고를 두루 체험한 위대한 조선인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가장 큰 무지와 몰이해는 조선인들의 간도 이주에 관한 것

연길에 들어가서 공부하기 전까지, 조선인들이 간도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을사조약>과 <한일합방> 후, 관리와 군인, 양반과 지사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간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은 조선인 이주의 시작이 아니었다.

함경도와 평안도의 조선인들은 1860년대에 자연재해로 인한 기아, 관리들의 수탈과 학대, 양반 토호들의 횡포와 폭력을 피해 생명을 걸고 “봉금법”(1)을 어기며 구명도생을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월강하였다. 통계에 따르면 1894년 두만강 북부, 연변 일대에 설치된 4개 보와 39개 사의 조선인 수는 20,816명이었다.(2) 1904년에 연변의 조선인 인구는 5만여 명에 달하였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로 간 이상설이 세운 서전서숙이 문을 닫는 시점에서 연변 일대의 조선족 마을은 529개에 달하였고 인구는 15,356세대, 72,076명이었다. 1909년, 연변일대의 조선인은 34,133세대 18만 4,867명으로 대폭 증가하였다.(3) 그리고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망한 1910년, 간도의 조선인 수는 무려 20여 만 명에 이르렀다.

이는 한국인들이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1899년에 집단이주한 김약연 일행, 1906년에 용정에 들어온 이상설 일행, 1911년 초에 서간도로 들어온 이회영 일가와 이상룡 일가 등이 결코 간도 이주의 선구자·개척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두 번째의 무지와 몰이해는 간도에 세워진 조선인 학교에 관한 것

우리는 막연히 간도에서 가장 일찍 설립된 근대식 조선학교는 1906년 10월, 용정에 세워진 <서전서숙>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조선족 역사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근대식 학교의 효시는 그보다 2년 앞선 1904년 4월 16일에 세워진 기독교 사립학교인 훈춘의 흑정자 옥천동의 <동광학교>였다. 뿐만 아니라 1906년 1월 5일, 하다문에 세워진 <용진학교>, 같은 해, 8월 20일에 세워진 남진맹의 <남신학교> 또한 서전서숙보다 일찍 세워진 학교들이었다. 1907년 10월 10일에 설립된 사완자 훈서학교, 1907년에 신풍(지금의 하다문 쌍신촌)의 <신풍학교(종명학교)>도 1908년에 세워진 명동학교보다 일찍 세워진 근대식 학교들이었다.(4)

나라를 잃고 사는 만주 조선인들이 2세 교육이 그리 활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막연한 생각은 근거가 없는 착각이었다. 만주의 조선인들에 대한 교육은 조선인 민족주의자들과 중국정부, 조선총독부의 치열한 다툼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13년, 연변 4개 현에 종교단체들이 설립한 학교 수는 43개에 이르렀다. 1916년 통계에 의하면 각종 종교단체와 민족의식을 가진 자들에 의해 만주 전역에 세워진 학교가 239개였다. 이들은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으며 독립운동의 기지로서 수많은 독립투사를 양성해 주었다.(5)

1928년 5월에 조사된 통계에 의하면 전 만주에 조선인 사립학교가 470개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민족주의 단체에서 세운 학교가 34개, 기독교를 포함한 민족종교에서 세운 학교가 108개, 개량식 서당이 328개였다. 그 중에 기독교계에서 세운 학교는 조선인 목회자가 운영한 학교가 64개, 선교사에 의해서 세워진 학교 19개였다.(6)

이 외에도 중국 정부 측에서 설립, 운영한 관립, 현립, 향립학교가 1928년 연길현, 화룡현, 왕청현, 훈춘현과 장백현에만 하여도 174개가 있었으며,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일본 계열의 학교가 43개, 조선총독부의 조선인보조학교가 52개가 있었다.(7) 만주의 조선인 사회는 조선인, 중국정부, 일본식민정부가 벌인 교육 3파전으로 조선인들은 학교 선택에서부터 살얼음판을 겪어야 했다.

세 번째 무지와 몰이해는 자유시 참변 이후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관한 것

1921년, 자유시에서 독립군들이 참변과 해체를 당한 이후, 만주에 참의부, 정신부, 신민부가 세워지고 이들의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삼부가 국민부와 조선혁명당, 한민족총연합회와 한국독립당으로 이합집산 되었다. 이들은 각기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만주국과 일제의 토벌을 견디지 못하고 관내로 이동했다. 만주의 독립운동은 실제적으로 1930년경에 막을 내렸다고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사를 더듬으면서 1920년대 말부터 만주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항일연군들이 러시아로 향하는 1941년까지 “추수투쟁”과 “춘황투쟁”, 항일유격대와 유격 근지에서의 항일유격전쟁, 동북인민혁명군, 동북인민항일련군의 항일투쟁이 봇물처럼 터졌다는 것이다. 1935년 1월에 조직된 “동북인민항일련군”은 3로군 11군에 달하였으며 전성기에는 4만 여명에 달하는 대원들이 있었다.(8) 이는 3.1운동 이후에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진 각종 무장단체의 단원들의 10배가 넘는 숫자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나로 하여금, 역사의 기록이 국가의 이념과 방향에 따라 선택적으로 기록되어지며 과장 또는 왜곡 축소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런 새로운 앎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중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선열과 19세기 중반부터 <조선>이라는 고난과 죽음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 함경도지역의 소작인과 천민들에 대한 이해와 관심, 감사와 애정과 함께 가슴 속에 깊게 자리 잡혔다.

그 중에 한국에서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던 평범한 그러나 비범한 인물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1900년대와 1910년대 연해주와 북간도에서 활동한 독립투사 서일, 최진동, 홍범도, 이동춘, 이동휘, 이위종, 이범윤, 구춘선, 안중근, 최재형에 관한 기록 속에 꼭 언급되는 이름이 훈춘시가 자랑스러워하는 훈춘 독립운동의 선구자, 황병길 투사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단행본 책이 없었고 기록들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그의 독립운동가로서 면모를 충분히 이해하고 종합하기가 어려웠다.

인내심을 가지고 그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을 찾아 읽으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 또한 모두가 다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의 아내 김숙경과 네 자녀는 중국 조선족 항일투사로 인정되어 투사 명단에 등록되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황병길은 사회주의 기치 아래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아니어서 중국조선족항일투사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반대로 한국 정부는 그와 그의 아내는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하여 한국의 독립투사로 등록하였으나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사로 순국한 그의 자녀들(9)은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독립운동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자랑하는 양반·관료·학자 출신의 가문들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자랑하는 양반·관료·학자 출신의 가문들은 안중근 가문, 이회영 가문, 이상룡 가문, 유인석 가문, 김가진 가문 등등이다. 그러나 황병길은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났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팔 수 있는 전답 한 뙈기 없는, 양반·사대부와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향리의 양반과 토호들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고 수백 년을 살아 온 조선의 풀뿌리, 천민이었다. 그런 조선의 민초가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바쳤고, 그의 아내와 네 명의 자녀들 모두가 독립운동가로 순국했다는 역사적인 사실! 그 팩트가 나의 심장을 계속 쳤다.

공부를 하는 내내 안타까웠던 것은 황병길과 그 가족들로 하여금 소명의식을 가지고 독립운동의 길을 가도록 힘이 되어준 기독교 신앙이 모든 글들에서 희석되고 제거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언젠가 이념의 껍질이 벗겨지고 그들이 망국의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며 민족의 십자가를 졌던 신앙고백적인 삶의 일대기가 나오길 기대해 본다.

미주

(미주 1) 봉금법은 1844년 청조가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지역을 왕의 발상지로 지정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법이었다. 러시아의 침입으로 다급해진 청조는 1881년의 이민실변정책의 일환으로 한족에게 개간을 허락하였고, 조선인에게는 1885년에 개간을 허락하였다. 
(미주 2) 룡정기념사업회 외 편저, 『룡정3.13반일운동』 80돐기념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9), 212쪽; 김춘선 저,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6), 178쪽.
(미주 3) 심영숙 저, 『중국조선족 력사독본』 (민족출판사, 2016), 31쪽; 룡정기념사업회 외 편저, 『룡정3.13반일운동』, 166쪽.
(미주 4) 양봉송 편저, 『훈춘조선족발전사』 (연변대학출판사, 2016), 41쪽.
(미주 5) 양소전 외 4인 공저,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312~ 316쪽.
(미주 6) 박규찬 주필, 『중국조선족교육사』(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0), 11~49쪽
(미주 7) 같은 책, 33~49쪽.
(미주 8) 같은 책, 86~108쪽. 
(미주 9) 최삼룡 편, 『승리의 기록』 (연변인민출판사, 2015), 74쪽; 황정선, 황정신, 황정해는 투쟁 중에 순국하였으나 3녀인 황정일은 혼자 살아남아 해방을 맞이하였고 1988년 이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리광인 저, 『겨레 항일지사들 3』,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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