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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합과 안전’의 폭력일상에 퍼져 있는 환경 폭력
김신영 부소장(기독교환경교육센터 교육연구소살림) | 승인 2020.09.20 16:10

코로나19로 여섯 살 자녀가 유치원에 가지 못한지가 꽤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태가 단지 몇 개월 정도 지속될 줄 알았지만, 이제 대부분은 이러한 삶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가고 있음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첫째 아이가 4-6살이 되는 시기에 해변에 살았던 우리 가족은 일출과 일몰이 자아내는 경이로운 풍경을 매일 감상할 수 있었고, 서울에 살 때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하고 웅장한 구름의 출현에 탄성을 자아내는 일도 많았다.

아파트 앞으로는 일출이 보였고, 뒷베란다를 통해서는 핑크빛 노을을 구경할 수 있었다. 새우깡을 들고 나가면 갈매기들이 십여마리 씩 모여들었고, 종종 미역이 많이 떠 밀려 온 날에는 이웃들이 그것을 건져다주어 요리해 먹기도 했다. 하루는 고등어떼가 파도에 휩쓸려 왔는지 모래 사장에 널려 있던 자잘한 고등어 수십 마리를 이웃들이 가져와서 나눠주기도 했다. 여름에는 작은 파라솔 하나를 해변에 펴고 세 식구가 둘러 앉아 모래놀이를 했다.

바닷물의 색이 계절마다 바뀌는 것은 참 신기했다. 엊그제까지 에메랄드 빛이던 바다가 어느 순간 짙은 청색을 내기도 했다. 이곳에 오래 산 주민들에게 그런 변화는 익숙했다. 이들은 그 리듬에 맞춰 살아가고 있는 듯 했다. 8월 중순이 다가올 즈음에 이웃들은 ‘다음 주부터는 물에 못 들어갈 것’이라 했는데, 난 처음에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더위는 아직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날이 덥다고 해서 물도 따뜻한 것은 아니었다. 바다는 나보다 먼저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8월 중순이 지나자 물 색도 변하고 온도도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종종 어린이 장난감 광고에서 모래놀이 세트를 판매하는 것을 본다. 여기서 모래놀이 장난감은 해변에서 가지고 노는 모래놀이 도구 꾸러미가 아니라 말그대로 모래(?)를 파는 것이었다. 어떤 회사의 제품은 유럽의 모래와 미국의 규사를 혼합하고 일련의 처리 과정을 거쳐 미세하고 고운 모래를 만들어 판매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도록 색도 입혔다. 이것이 모래일까? 바닷가에서 아주 짧은 기간 살면서 신기하게 느낀 것은 해변마다 모래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이었다.

BTS가 앨범촬영을 했다던 주문진 해변은 모래가 정말 곱다. 그래서 여기서 모래놀이를 하고 오면 정말 차 안이 미세하고 고운 모래로 가득해진다. 몸에 붙은 모래가 잘 씻기지도 않고, 옷 곳곳에 모래 입자가 단단히 끼어 세탁을 해도 잘 빠지지 않는다. 거기서 조금 내려오면 도깨비 촬영지로 유명한 영진해변이 있다. 여기 모래는 앞의 해변보다 입자가 좀 더 굵으면서도 적당해서 모래놀이 하기에 참 좋다. 모래성을 쌓거나 모양틀을 가지고 다양한 놀이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기후변화와 해수면 상승 등으로 인해 해변의 모래 유실이 점차 심해지고 있어서, 피서철을 앞두고 모래를 어딘가에서 퍼와 깔아 놓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물회로 유명한 사천해변의 모래는 입자가 영진해변보다 더 굵어서 맨발로 걷기에 조금 따끔할 정도이다. 안목해변이나 경포해변은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 잘 가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여기서는 모래의 질감을 조용히 느낄 만한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해상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나 외국인 관광객도 많아서 사람 구경하는 게 더 재밌었기 때문이다.
 
모래 이야기를 하다가 말이 다른 곳으로 흘렀다. 어쨌든 모래의 이런 특성에 따라 아이와 해변을 골라가며 놀던 우리 가족에게 모래놀이 장난감은 관심 밖이었다. 아이도 어른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8월, 30개월 간의 강릉살이를 마치고 우리 가족은 다시 서울시민이 되었다.

그런데 서울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8.15 광화문 집회로 인해 코로나 확진자가 연일 300명대를 기록했다. 어린이집, 유치원의 휴원으로 인해 많은 아이들이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고, 부모들이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과 하루 종일 놀아주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집안 살림을 해야 하는 시간에 부모들은 아이들을 텔레비전 앞에 두거나 스마트 폰 앞에 두었다.  내 딸도 하루 1-2시간 만화를 본다. 가급적 같이 보는 편이기는 하나 그러지 못할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어린이 채널에서는 정말 많은 장난감 광고가 나온다. 내 딸은 1년 전부터 슬라임에 관심을 가졌고, 최근에는 (가짜) 모래놀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슬라임은 전부터 아이가 늘 갖고 싶어했는데, 나는 그 모양에서부터 슬라임이 꺼림칙했다. 물론 유해성에 대한 검증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기 때문에 장난감으로 판매되고 있겠지만, 내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이 소위 안전성에 대한 기준치가 매우 신뢰할만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검색을 해보아도 슬라임으로 인한 피부 트러블 등의 사례가 많이 발견됐다. 그리고 우리 아이가 노출되는 화학물질이 한 두 개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한 두 종류의 제품이 보장하는 ‘기준치 이하’, ‘적합’ 등의 문구는 전혀 신뢰할 만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와 나는 관련 기사와 뉴스를 함께 읽으며 다른 대안을 모색했다.

그런데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새로운 모래놀이를 홍보하는 것을 아이가 발견했다. 이것은 색도 예쁘고 푹신푹신한 느낌도 나고 약간의 탄성이 있어서 손에 꾹 쥐면 뭉쳐졌다가도 다시 부풀어 올랐다. 아이는 그 자리에서 한참 그것을 가지고 놀았다. 그 이후로도 몇 차례 그것이 홍보차 진열되어 있으면 아이는 열심히 가지고 놀았다. 갖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저 제품은 뭘로 만든 걸까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적혀 있는 바로는 ‘플라스틱제’였다. 플라스틱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플라스틱의 종류는 정말 어마어마하다), 내 아이가 잘게 부수어 놓은, 형형색색으로 염색된 플라스틱을 만지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아이는 이미 미세플라스틱이 해양생물들에게 미치는 유해성과 그것이 인간에게 되돌아 오는 순환의 고리를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래서 아이에게 어떻게 이 가짜모래놀이의 문제를 설명해주어야 할지 고민했다.

오늘도 아이는 책을 사러 간 김에 또 그 플라스틱가루를 발견하고 주물렀다. 손에 묻지 않는다는 홍보문구와 달리 많이는 아니었지만 손을 씻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플라스틱 가루들이 묻어 있었다. 아이와 나는 화장실로 손을 씻으러 갔다. 손을 씻고 아이에게 물었다.

나: 00야, 이거 뭘로 만들었다고 했지?
딸: 플라스틱!
나: 그럼 이걸 갖고 놀고 이렇게 손을 씻을 때마다 이 플라스틱 가루는 어디로 가지?
딸: 고래 뱃속! 
나: 그럼 고래가 어떻게 될까?
딸: 죽어!

아이는 내가 이것을 사주지 않을 것이란 걸 금새 알았다. 손을 씻고 나오는 길에 아이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딸: “아빠, 아빠는 00000이 플라스틱으로 만든 게 아니면 나 사주려고 했지? 근데 이게 플라스틱이라서 안 사주는 거지?”

우리의 대화는 다른 장난감 이야기로 이어졌다!

나와 내 아이의 몸에는 매주 3~5그램의 플라스틱이 음식물을 통해 주입되고 있다. 또 알 수 없는 수 많은 유해물질들과 전자파, 방사선과 같은 것들이 우리의 몸에 잠시 혹은 아주 오래 머무르거나 알게 모르게 관통한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몸을 횡단하는 이 수 많은 물질들이 일으키는 영향에 대해서는 아는 것은 거의 없다. 우리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조차도 잘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러한 것을 열심히 개발하고, 또 누군가는 이런 상품들을 끊임없이 소비한다. 그리고 우리의 신체는 이러한 생산, 유통, 소비, 폐기의 순환 과정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의 매 순간과 매 고리마다 얽혀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양한 언어로 표현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석유를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이는 우리가 먹고 있는 고기와 식량의 많은 양이 석유화학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탈석탄이 단지 전력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나의 어린 여섯 살 아이가 아빠에게 듣는 이야기는 다른 데서 듣던 이야기와는 많이 다를 수 있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광고와는 전혀 다를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은 ‘왜 우리 엄마, 아빠는 고래 때문에 이걸 안 사주는 걸까, 다른 아이들은 다 있는데...텔레비전에서는 저렇게 재밌다고 보여주는데....’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의 기대와 시선에 반하는 부모의 시선과 가치관이 아이들의 생각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연령대의 아이들에게 부모의 존재가 얼마나 큰지를 고려해볼 때 더욱 그렇다.

얼마 전 아이가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해서 단 둘이 고기를 먹으러 나갔다. 그런데 우리가 가기로 한 집이 그 날 문을 닫았다! 아이가 말했다. “오늘 고기를 먹지 않았으니 돼지가 안 죽었어.” 고기가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 같은 줄 아는 아이들이 있다는 글을 어딘가에서 읽었다. 아이들이 소나 돼지가 고기가 되는 과정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본 고기는 주로 마트에서 판매되는 포장된 상품이기 때문이다. 이후로 나는 고기를 먹을 때 ‘아주 가끔씩’ 딸에게 해당 동물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덕분에 내 아이는 고기가 살아있는 동물의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우리가 배출하는 플라스틱 때문에 동물이 이유 없이 희생되는 것은 부당하고 불쌍한 일이라는 것 정도는 생각할 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시대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환경에 대한 가치를 가르치는 것이 일종의 예의 교육의 한 차원이라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에 대한 예의가 있듯이 자연에 대한 예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예의를 배우지 못한 사회는 결국 그 사회 구성원들이 훼손한 가치의 결과를 그대로 그 자신이 받아 내야 한다.

자식의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부모에게는 그렇게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린 자녀일수록 잘먹고 잘싸는 일만큼 중요한 게 없다. 그들이 해야할 일의 9할은 잘 먹고 잘 싸는 것이다!(나머지 1할은 잘 자는 것!) 하지만 먹거리를 통해, 호흡기를 통해, 피부를 통해 우리 아이들은 아주 느리지만 치명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다.

이 폭력은 너무 느리고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수도 있다. 실체가 없어서, 때로는 안전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어서 알아볼 수 없을 때도 있다. 생태학은 사실 ‘관계의 학문’이다. 그리고 기후변화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환경문제도 사실 그 뿌리에는 ‘관계’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삶의 생태학은 내가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의 차원들을 거시적, 미시적으로 인식하고 반성적으로 사고하는 데서 시작한다.

모래로 둔갑한 미세플라스틱을 고래와 연관시키는 엄마, 아빠! 얼마나 멋진가.

우리 자녀에게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느리게 가해지고 있는 ‘적합과 안전’의 폭력을 막아주는 부모가 되어보자.

김신영 부소장(기독교환경교육센터 교육연구소살림)  ecomi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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