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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의지와 예수 신앙이 들끓었던 조선인들의 땅예수촌이었던 평강벌의 명암촌
이이소 | 승인 2020.10.03 21:56
▲ 명암촌은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이주 조선인들의 아픔을 가리지 못한다. ⓒGetty Image

처음에는 연변 땅 어디를 가나 독립투사들과 독립군들을 만났다. 용정에서 모아산을 지나 연길로 들어가는 길에서도, 훈춘에서 연통라자로 가는 길에서도, 도문에서 양수진을 거쳐 대황구에 가는 길에서도, 도문에서 석현을 지나 왕청 가는 길에서도, 왕청의 라자구벌을 지나 수분대야로 가는 길에서도, 용정에서 서성을 지나 청산리를 가는 길에서도,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불리는 내두산에서도, 삼합에서 지신과 명동을 지나 용정으로 들어오는 길에서도, 해란강변에서도, 국자가에서도, 와룡촌에서도 그들을 보았다.

연변, 그 어디나 가득했던 조선인들의 아픔

때로는 혼자, 때로는 삼삼오오, 때로는 수십 수백 명 씩 이합집산하며 길을 가는 그분들의 외롭고 의로운 독립에의 신념과 투지에 감동하며, 감격하여 많이 울었다. 추위와 굶주림, 밀정과 일본군에게 쫓기는 그들의 행보에 가슴이 시큰시큰 아렸다. 그 분들과 함께 희망하며, 절망하며, 분노하며, 증오하며, 만주의 독립운동에 몰입하였다.

그러나 차츰 나의 시야에 남부여대하고 어린 아이들 손을 잡고 유랑하는 일가족들의 모습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살길을 찾아 만주 땅에 와서 유리걸식하는 조선의 기민들이었다.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면 범죄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요행을 바라며 한 밤중에 강을 건넌 소작인, 빈농, 천민들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구명도생을 위해 강을 건넜던 조선인들의 환영이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그 환영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짓밟히기도 하고 나비 떼처럼 비상하기도 하며 나를 1900년대 전후의 간도 조선인사회로 이끌었다.

거의 모든 조선 독립투사들의 일대기나 조선족의 역사 앞머리에 “청조의 봉금과 조선인들의 범월”, “청조의 이민실변과 조선인 집거구역 형성”, “조선인의 이주와 수전개발” 등등의 소제목들이 빠짐없이 나왔다. 그런 일련의 제목들이 한국에서는 들어 보지 못했던 내용인지라 눈을 크게 뜨고 정독하며 음미하였다. 내용인즉슨 상놈 조선인들이 1860년대부터 조선 양반과 관료들의 폭정과 세금, 1860년대 연속된 자연 재해로 인한 기아와 지방 관료들의 협잡 그리고 열강의 침입과 전국적인 민중봉기에 무능하고 무력하게 대처하는 조선에 절망하여 허덕이다가 고향과 조국을 떠나 타향으로, 만주로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우리 민족이 만주로 이주했다고 알고 있는 나의 상식이 산산조각 났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도 예전의 나처럼 1905년에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1910년에 주권이 박탈되자 분노하고 절망한 애국지사들이 조국을 찾겠노라 만주로 망명해서 만주가 무장독립투쟁의 기지가 된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숫자는 일부에 불과하다. 실로 ❮한일병탄❯이전에 함경도와 평안도의 백성들이 도강하여 남만주에 만해도 1만 여 호가 넘게 정착하고 있었다.

1872년, 최종범은 김태흥, 박석근과 함께 군수의 명을 받아서 압록강 서쪽 지역(남만주, 요녕성지역)에 가서 조선 이주민들을 돌아 본 뒤에, ❮강북일기❯에서 임강 칠도구의 마록포에서 시작하여 29개 마을을 돌아보았는데 당시 그 지역에 조선인이 470여 호, 3,000여 명이 정착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

1897년, 조선 서쪽변계 관리사인 서상무의 통계에 의하면 통화, 환인, 흥경 등에 이주해 온 조선인은 당시 8,722호에 37,000여명이었다. 1905년, 통계에 의하면 장백, 림강, 집안 등지에는 8,750여 호에 39,440여 명이 살았고, 1911년에는 12,100여 호에 50,100여 명이 살았다.(2) 동만주(연변, 북간도)에 해당하는 두만강 이북에도 많은 조선인들이 몰려와서 청조가 봉금을 풀고 정해준 두만강 북안 동서 700여리와 남북 40~50여리에 정착하였다. 1907년, 그 안에 거주하는 조선인마을은 529개이었으며 인구는 15,356호 72,076명이었다. 1909년에는 34,133호 184,867명으로 증가하였다.

1910년 ❮한일병탄❯이전에 남만 일부와 연변에 정착한 조선인이 이미 20여만 명을 넘어섰다는 사실 확인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으며 웃어넘길 수 없는 메시지였다. 생면부지의 남의 나라 땅에 숨어 들어오거나, 소작농으로 들어와서 ❮점산호❯의 농노처럼 일하며 마을을 형성하며 황무지를 개간하며 온갖 신산의 고통을 당했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조상들의 허리에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근대 교육과 민족교육의 요람이라고 자랑하는 ❮서전서숙❯를 비롯한 수많은 사립학교와 ❮용정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들, 독립운동단체들과 비밀결사들 그리고 ❮3∙13 용정 만세시위❯, ❮봉오동전투❯, 심지어는 ❮청산리전투❯와 ❮항일연군❯까지도 그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독립운동사가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그분들, 연변의 수전을 일군 조선의 소작농들이 실제로 독립운동사의 맨 서두에 있다. 그들은 조선양반사회에서 초개처럼 버림받았지만 스스로 독립군이 되거나 자녀들을 독립군으로 바쳤으며, 독립후원금 모금에 참여한 독립운동의 기초였고 기둥이었으며 울타리였다.

실로 만주는 조선인들이 들어가기 전까지 봉금지역으로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으며,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땅이었다. 실로 만주는 청조가 팔기병 부대의 주둔과 카룬(3)의 운영을 위해서 해마다 관내에서 운영비를 지원받아야 하는 산업이 형편없는 빈곤한 땅이었다. 그러나 1860년대를 기점으로 해서 월강한 조선인들의 황무지 개간 및 벼농사 개발함과 동시에 만주는 일약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장이 되고 조선 독립지사들과 독립군들의 결사와 활동의 장소가 되는 대대적인 변화 속에서 팔팔 끓는 용광로로 바뀌었다.

생각이 바뀌니 연변 전체가 독립운동의 성지로 보였다. 양반들의 나라, 계급 차별로 사람을 괴롭히는 나라에서 살 수 없어 생명을 걸고 도망쳐 나온 모든 소작농과 천민들이 위대한 독립투사들로 보였다. 그 분들의 넋을 기리며 두만강을 건너며 그 분들이 꿈꾸었던 나라를 생각하면서 틈틈이 연변을 돌아 다녔다. 외국인이 가이드 없이 시골 오지나 산골 마을을 찾아다니는 일은 실로 어려운 일이지만 나는 운이 좋게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를 십여 년 동안 꾸준히 계속하고 계시는 연변지역의 여러 선생님들의 호의와 배려 덕분에 옛날의 흔적이 사라져 버린 마을들을 어렵사리 방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분들이 기십 년 동안 공부하며 현장을 답사하여 쌓은 산지식까지도 보너스로 받는 놀라운 혜택을 자주 맛보았다. 그분들과 함께 때로는 혼자서 조선인 마을 돌아보는 시간은 타임머신을 타고 1900년대로 돌아가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연길을 중심으로 해서 연통라자, 대황구, 곡수, 도문, 수남촌, 석현, 봉오동, 삼툰자, 백룡, 선구, 걸만동, 장암동, 와룡촌, 개산툰, 자동, 제동, 내두산, 어랑촌, 청산리, 명암촌, 장재촌, 명동촌, 서대파, 소왕청, 라자구 수분대야 등등을 돌았다.

모든 마을마다 개척사가 있고 외로운 개척자들이 있었다. 적지 않은 조선인 마을 안에 캐나다장로회에 소속된 교회가 있었고 교회 지도자들이 세운 학교가 있었다. 연통라자, 남별리, 대황구, 신풍, 와룡촌, 장암동, 명동촌, 명암촌, 백운평, 차대인골, 정동, 일송정, 금당촌, 회막동, 하마탕, 합성리 마을들이 다 그런 마을들이었다. 마을을 개척하며 교회와 학교를 세운 이야기를 들으며 개척자들이 겪은 간난신고에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절로 나왔다.

아픔의 진달래꽃, 명암촌

백두산과 내두산을 여러 차례 다녀온 덕분에 ❮서성❯이라는 곳에 자주 들렸다. 서성 여행길을 자주 동무해주시는 선생님 한 분이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고 해서 특별히 정이 갔고 그 일대에 허름한 교회 건물이 십자가를 달고 외롭게 서 있어서 더욱 애틋하게 느껴졌다. 서성 일대에 ❮진달래촌❯이라는 민속마을이 있는데 조선족 민속관광지로 특화된 마을이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알아보니 명암촌이었다. 명암촌은 현재 화룡현 서성진에 속해 있으므로 나 같은 외국인으로서는 명암촌이 과거에 연길현 이도구에 속하였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그래서 명암촌을 자주 지나다니면서도 옛날의 명암촌이 서성에 속하였는지를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선생님의 설명으로 민속촌이 명암촌 이었고 뿐만 아니라 1910년대 당시 평강벌에 사는 주민들이 집단 개종해서 이루어진 마을이었던 ❮성교촌❯, ❮구세동❯, ❮예수촌❯중에서 명암촌이 바로 ❮예수촌❯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 마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명암촌!

과거에는 연길현 이도구에 속하였으나 현재는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화룡현 서성진에 속한 마을이다. 오늘날 연길이나 용정에서 출발하여 백두산, 내두산, 청산리, 어랑촌, 청파호에 가려면 거치게 되는 마을이지만 한국사회에는 그다지 알져질 일이 없었다.

명암촌에는 경신참변에 표적이 되었던 제 2호 배일학교 조사표에 나타나는 수신향사립 제4소학교 보진학교(普進學校)가 있었고,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 소속된 ❮장은평❯교회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용정의 3.13 만세시위 시 용정으로 가지는 않았지만 그 후에 있었던 이도구와 투도구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를 하였고 만세 시위 후에 조직된 ❮간도국민회❯ 서부지방회 본부를 마을 안에 꾸렸다.

1921년 1월 27일 ❮독립신문❯이 실은 보충자료에 의하면 “이도구에 가옥 57세대, 곡물 전부, 교회당과 학교 각기 1개 소각” 되었다. 위의 기사가 이도구의 다른 마을에 관한 것일 수도 있지만 배일학교 조사표에 ❮보진학교❯가 들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위의 내용은 명암촌의 것이거나 명암촌 일부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명암촌은 분명히 명동촌이나 장암촌, 와룡촌, 하마탕, 의란구, 덕원리 못지않게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된 마을로서 독립운동사에서 길이 기억되어야 할 마을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명암촌은 1910년 12월에 함경북도 성진군 학성면 달래동 사람들 20여 호, 150여 명이 당시 이도구에 속해 있는 ❮점산호❯왕복의 지역인 ❮왕가지방❯으로 이주하여 형성한 조선인 마을이다. 그들은 계속되는 기근과 ❮한일병탄❯의 와중 속에서 만주 땅으로 이주를 결심하며 양태윤을 선발대로 보냈다. 그는 연변일대를 돌아다니다가 명암촌에서 왕복의 소작농으로 일하는 고향 사람 전씨를 만나서 그 땅으로 이주하기로 결심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양태윤의 안내를 따라서 성진을 출발하여, 길주, 명천, 화성, 경성, 청진, 부령을 거쳐서 회령에 도착하였고, 회령에서 강이 얼기를 기다려 도강을 하였다. 그들은 삼합, 지신, 용정, 두도구를 지나서 12월 말에 명암촌에 도착하였다.

아픔을 딛고 삶을 일구다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겨울을 지낼 가옥과 농토를 구입하는 것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당시 왕복은 가족유산상속의 문제로 급히 산동으로 철수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호주인❯한윤극을 세워서 왕복의 땅과 건물 일체를 구입하여 단체로 겨울을 날 수 있는 숙소 문제와 생계문제인 토지 문제를 일시에 해결하였다. 새해 들어, 그들은 우선 개인들의 가옥을 지으며 식량 마련에 주력을 하였다. 그리고 난 후에 그들이 하나가 되어 세 가지 큰일을 해냈다.

첫째는 1911년에 캐나다장로회 교회로 등록된 ❮장은평교회❯를 공식적으로 설립한 것이다. 그들의 고향인 성진은 1898년에 캐나다선교사, 그리어슨이 선교부를 세우고 복음을 전한 곳이었다. 그들은 이미 성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로서 명암촌으로 집단 이주를 하면서 용정에 있는 캐나다선교부 소속인 김계안조사와 안순영조사와 연락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낯선 땅, 명암촌에 왔어도 캐나다장로회와 연결고리를 놓지 않았고 계속 교류하며 지도를 받은 것이다.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서는 해마다 사경회를 실시했는데 평강벌 단위에서 모일 때는 장은평교회가 중심이 되었으며, 연변 단위로 할 때는 용정에서 모였고, 캐나다선교부 전체 교회가 모일 때는 원산에서 모였다. 사경회는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신앙교육과 훈련의 장이기도 하였지만 민족의식과 항일운동을 고취시키는 모임이기도 하였다. 명암촌 사람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사경회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둘째는 1912년에 ❮보진학교❯라는 근대식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한 것이다. 초대 교장은 이강국이었고 교원은 양환봉, 유용희, 김정식이었다. 교원들의 생활은 마을 전체가 책임을 졌다. 그들은 ❮점산호❯왕복의 토지를 구입해서 나눌 때 처음부터 학전(學田)을 염두에 두고 따로 분리해서 지정해 두었다. 그들은 결혼한 교사들에게는 학전을 분배해 주었고 미혼 교사들은 한 달씩 매 가정을 돌면서 식사를 하게 하였다. 학전노동과 교원들의 의식주 및 학교운영비는 마을의 모든 세대들이 동일하게 분담하였으며 특별히 미혼 교원에게는 가을에 새 옷을 지어 주었다.

초기에는 2~30명의 학생을 받아서 조선어, 천자문, 중국어, 산술, 수신, 박물, 도화, 체조, 습자, 창가 등을 가르쳤다. 교사들은 모두 조선에서 망명 온 사람들이었고 투철한 항일 민족정신으로 학생들을 교육하여 보진학교 졸업생들은 항일운동에 앞장을 섰다.(4)

셋째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농사에 성공한 것이다. 그들은 성진에서 산비탈에서 밭작물을 재배하며 살았기 때문에 벼농사를 지어 본 경험이 없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고향에서처럼 산비탈과 습지를 개간하여 밭에 주로 조, 콩, 옥수수, 귀리, 보리 등을 재배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에서처럼 굶지는 않았지만 넉넉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같은 면적의 땅이면 경제성이 높은 수전을 개발하고자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많은 도전과 실험 끝에 1915년과 1916년에 걸쳐서 벼농사 재배에 성공하였다. 그로서 장은평은 이름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품고 있는 풍요로운 들판”이 되었고 독립운동과 독립군 지원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마을이 되었다.

삶을 일군 땅에서 해방을 향해

이렇게 준비된 명암촌에서 여러 부류의 다양한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첫 번째 지도자 그룹은 1910년대를 이끌어간 지도자들이다. ❮간도국민회❯서지방회 회장 한윤극과 ❮간민교육회❯, ❮간민회❯ 때부터 구춘선, 이동춘, 김약연 등과 함께 활동을 하였고 ❮간도국민회❯ 서지방회 주요 책임자가 된 양태윤, 양형식, 양군식, 이태언이 바로 그들이다. 뿐만 아니라 명암촌 출신의 ❮간도국민회❯ 사법부장인 최익룡은 ❮3.13용정 만세시위❯ 후에 양군식의 집에서 지내며 명암촌의 독립운동을 이끌어 갔다. 그는 뒤에 간도국민회 부사령관이 되기도 하였으며 1921년에는 용정의 동흥중학교를 설립하였다.(5)

두 번째 그룹은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지도자 그룹이다. 명암촌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서 독립 운동가들이 농부나 학교 선생으로 찾아 왔는데, 조선공산당만주총국 선전부장이던 장시우 내외, 김광일, 양창걸, 박창호가 그들이다. 항일투쟁으로 이름을 날린 김책, 김성, 우용선도 한 때 은신하며 명암촌에서 활동을 하였다.

세 번째 그룹은 보진학교 졸업생으로 동북항일연군으로 전투에 참여하여 사망한 투사들이다. 1931년 ❮9.18사변❯(6) 후에는 보진학교 졸업생인 이동선, 박윤식, 안정규, 이주봉 등이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가입하여 동북항일연군에 참가하여 일본군과의 전투 중에 사망하였다.

청산리와 어랑촌 가는 길목에 있는 명암촌의 사람들은 1920년 초가을에 홍범도연합군부대가 두도구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고 어랑촌으로 이동할 때 소를 잡아서 부대원들을 위로하였고 의연금으로 내복을 사서 헌납하고, 천을 사서 물감을 들여 군복을 만들어 주었다. 그들은 청산리전투가 진행될 때, 부대에 식량과 짚신을 공급하였으며 우마차를 이용하여 독립군 부대의 물자들을 운반하였다.

10월 13일, 홍범도장군 지휘하의 연합부대가 대한독립군 약 300명, 국민회군 약 250명, 의군부군 약 150명, 한민회군 약 200명, 광복단군 약 200명, 의민단군 약 100명, 신민단군 약 200명으로 총인원이 1,400명 이었다(7)는 사실을 감안할 때, 한 마을이 독립군 부대에게 식사대접이나 군복, 짚신과 양식 공급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랫동안 독립을 위해 기도하며 모금해왔던 그들은 가슴이 화산처럼 타올랐기에 10월의 추위 속에서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아낌없이 바치며 독립군들을 대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대가로 경신참변의 혹독한 시련과 고난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명암촌! 
사람들 마음 중심에 교회와 학교가 있는 곳! 
교육과 신앙구국의 믿음으로 새 나라를 꿈꾸었던 사람들의 공동체!
다양한 인재를 품고 키워 낸 마을!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 학전 제도를 만들고 공동 경영한 마을!
신앙의 열정과 헌신, 사랑과 감사로 “장은평”이라 불리워졌던 곳!
명암촌 히스토리를 읽으며 가슴에 잔잔한 파도가 일었고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왔다.
함께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수전을 개발하며 독립운동에 앞을 다투어 참여한 마을 주민들의 평범하면서 비범한 삶의 위대함과 겸허함에 사로잡혔다.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최선을 다했던 명암촌 사람처럼 남은 생을 평범하게 그러나 비범하게 살고 싶다.

미주

(미주 1) 김춘선 저,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127쪽.
(미주 2) 김택 주필, 『길림조선족』, 10쪽.
(미주 3) 청의 기마병이 거주하는 초소.
(미주 4) 김택, 『길림조선족』, 163쪽.
(미주 5) 김동섭 저, 『화룡인민의 항일투쟁』, 5쪽.
(미주 6) 만주사변이라고도 부르며 1931년 일본 제국이 류타오후 사건을 조작해 만주를 중국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벌인 침략전쟁을 말한다.
(미주 7) 김택, 『홍범도 장군』, 183쪽.

 

참고서적

김춘선 저,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6.
김택 주필, 『길림조선족』, 연변인민출판사, 1995.
김동섭 저, 『화룡인민의 항일투쟁』, 연변인민출판사, 2006.
김택 주필, 『홍범도 장군』, 연변인민출판사, 1991.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부, 『총서 1 개척』, 민족출판사, 1999.
심영숙 저, 『중국조선족 력사독본』, 민족출판사, 2016.
김철수 저,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 연변인민출판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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