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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예정론을 칭의론 위에 굳게 세우다칭의 ⑷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0.10.17 15:47
▲ Frans Hogenberg, 「그리스도의 재림(The Second Coming of Christ)」(1562) ⓒWikipedia

루터파에서 사라진 예정론

예정론은 칼빈보다는 오히려 루터가 강하게 강조하였던 교리입니다. 루터는 초기에 예정을 하나님의 고유한 계획에 의해 하나님 자신이 받아들이기를 원하고, 또 자신의 은혜에 참여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정하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감추어진 의지”(1)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곧바로 이 위협적인 예정 문제를 칭의 신앙 안에 흡수하여 뇌관을 제거하였고, 그의 제자 멜랑히톤(P. Melanchthon)은 예정론을 루터파 신앙의 바탕이 되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 의도적으로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이후 루터파 신학에서 예정론은 점차 그 의미가 퇴색되다가 다양한 논쟁의 해결을 시도한 「일치신조」(1577)가 만들어진 시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2) 이것은 루터파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라는 틀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이라는 틀 안에서 생각하고 활동하는 것을 더 선호했던 것을 말해줍니다. 16세기 후반의 루터파에게 ‘선택’이라는 말은 어떤 개인을 선택하는 하나님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인간의 결심을 의미했습니다.(3)

그러나 칼빈과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예정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구원의 근거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말하는 예정론이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을 놓고, 그로써 기독교 자체를 왜곡시킨 중세 후기 로마 가톨릭 교회의 모든 기획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21장 예정에 관해 말할 때,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칭의론의 토대 위에 선 예정론

칼빈은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무이한 공로가 된다는 것을 말할 때, 그가 예정론의 성경적-신학적 근거로 삼은 사도 바울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지신 것은 우리가 의를 얻는 것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함이라고 한다(고전1:30). 참으로 바울은 ‘창세 전에’ 영원 전부터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였다(엡1:4-5). 바울의 말을 더 인용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죽음의 정죄에서 구속되고 멸망을 면하게 되었 으며(골1:14-20참조), 하늘 아버지에 의해서 자녀와 후사로 선정되었으며 (롬8:17;갈4:5-7참조),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화목하게 되었으며(롬5:9-10), 그리스도의 보호를 받아 멸망하거나 넘어질 위험성이 없게 되었고(요 10:28), 이렇게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았으므로(롬11:19), 이미 영생에 참 가했으며, 소망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III.xv.5).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공로와 무관하게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이며, 따라서 예정론은 우리의 구원의 주체는 우리의 공로나 업적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칭의론은 그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주로서 믿고 고백할 때, 그를 우리의 의로서 받게 된다(고전1:30)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칼빈은 칭의론을 예정론의 토대 위에 세움으로써 로마 교회의 공로사상을 효과적으로 반박할 수 있었습니다.

의롭다 칭하시는 하나님의 목적

이렇게 칭의의 근거를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두고서, 칼빈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합니다. 우선 칭의를 받는 목적을 선명하게 제시합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인가? 믿음으로 그리 스도의 의를 붙잡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동시에 거룩 함도 붙잡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1:3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도 만드신다. 이 은혜들은 영원히 풀 수 없 는 유대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지혜로 조명하신 사 람들을 구속하시며, 구속하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며, 의롭다 하신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신다(III.xvi.1).

칼빈은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불결한 생활을 청산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라(살전4:7)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칼빈은 다시 칭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와 교제를 하게 된 죄인은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되어 죄의 용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의 의같이 입고 하늘 심판대 앞에 자신 있게 설 수 있다. 죄의 용서를 받은 후에 따르는 선행은 그 자체의 가치에 의하지 않고 다른 입장에서 평가된다. 행위에 있는 모든 결함은 그리스도의 완전성으로 덮이고, 모든 오점은 그리스도의 순결로 깨끗케 되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모든 허물의 죄책이 도말되고, 선행까지도 항상 더럽히는 허물의 불완전이 묻혀 버린 후에는, 신자들이 행하는 선행은 의롭다고 간주된다. 바꿔 말하면, 의로 인정된다(롬4:22)(III.xvii.8).

그러므로 칼빈은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은 사람은 그가 하는 행위도 그것이 지닌 가치 이상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III.xvii.9). 그러나 칼빈에게는 아직 한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이신칭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야고보서를 인용하기 때문입니다.

공로주의자들의 야고보서 오독

야고보는 아브라함까지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1), 우리도 모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2:24)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만약 야고보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생각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해 서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지 않도록 야고보의 말을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바울과 야고보의 말을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확실히 야고보는 의의 전가가 아니라, 의를 공표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진정한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은 순종과 선행으로 그 의를 증명한다. 공상적이고 속이 빈 마음의 가면만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그는 신자들을 향해서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의 열매가 있는 의를 요구한다. 그리고 바울이 우리가 행위의 도움이 없이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야고보는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의도를 생각하면 우리는 모든 곤란에서 해방된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야고보가 칭의의 방법을 설명하는 줄로 생각하는데, 이 점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망상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야고보는 믿음을 가진 체하며 믿음을 구실로 삼아서 선행을 경멸하는 자들의 사악한 확신을 분쇄하려고 노력할 뿐이다(III.xvii.12).(박스)

이와 같이 야고보는 칼빈의 칭의와 성화 교리를 지지하는 대열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칼빈에게는 바울의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2:26)는 야고보의 경고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 같은 조심성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야고보서에 어떠한 “복음적인 성격”도 없다고 “지푸라기 서신”으로 취급했던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4)

미주

(미주 1) M. Luther, The Bondage of the Will, trans. J. L. Parker and O. R. Johnston (James Clarke, 1957), 169.
(미주 2) 존 헤셀링크, 최덕성 옮김, 『개혁주의 전통』(본문과 현장사이, 2003), 68.
(미주 3) 알리스터 E. 맥그라스, 박종숙 옮김, 『종교개혁 사상입문』(서울: 성광문화사, 2002), 152.
(미주 4) M. Luther, Préface au Nouveau Testament, OEuvres, vol. I, M. Lienhard, M. Arnold, eds., (Paris: Gallimard, 199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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