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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의 대내외적 과제: 형제애와 JPIC의 실현팬데믹 시대의 프란치스칸 작은형제회 ⑶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 승인 2020.10.30 17:17
▲ St Francis giving his Mantle to a man living in poverty ⓒWikimedia Commons

지난 두 장을 통해 프란치스칸 신학과 영성의 중핵을 약술했고 4개의 ‘脫’ 개념을 갖고서 그 오늘의 뜻을 서술하였다. 이제 3장에서는 본고의 핵심인 바, 한국 전래 100년을 앞둔 상황에서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가 직면한 안팎의 과제를 살펴볼 것이다. 지난 30년 활동보고서 속에 과거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100주년을 향한 본회의 나아갈 바가 잘 적시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부적 사안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크게 수도원 공동체 내부적 과제와 외부적 과제로 변별하여 서술할 생각이다. 70년을 훌쩍 넘긴 전래 역사를 지닌 작은 형제회, 그 속에서 창시자의 의도와 정신이 어찌 구현되었으며 무엇이 이것을 방해했는지, 항차 노력할 방향이 어떤 것인지를 제한된 자료를 토대로 살필 것이다. 하여 본 논문의 부제를 내부적, 외부적, 토착적 과제라 칭했고 프란치스칸 정신의 한국적 실현을 위한 토착화 과제는 마지막 4장의 몫으로 미뤄 남겨두었다.

필자가 대내외적 과제로 형제애와 JPIC 실현을 말한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프란치스코 정신 속에서 내포된 탈(脫)의 제 차원, 무엇보다 자본주의 욕망, 경제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보았던 까닭이다. 홀로세를 인간세로 급기야 자본세로 만들어 스스로를 멸종당할 생명체로 전락시킨 인류문명의 한계를 돌이켜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그럴수록 공동체 내부의 삶과 그 외적 실현은 역사 속에서 결코 나뉠 수 없는 ‘하나’가 되어 작동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본 공동체의 내부적 과제부터 생각해 보겠다.

공동체 내의 형제애의 회복, 프란치스칸 작은 형제회의 외적 과제

작은 형제회 80년 역사 기록을 보면서 필자의 눈에 띈 것은 ‘형제애 삶의 내실화’에 대한 고민이었다.(1) 프란치스칸 정신에 따라 다르게 살기로 작정한 형제들을 영속적으로 복음 화시켜 양성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까닭이다. 자신들 수도회의 본질을 살도록 돕는 일을 관구의 사명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형제애를 갖고 복음적으로 사는 삶을 일상화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밖, 세상을 위한 뭇 활동에도 불구하고 작은 형제회는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가난한가? 를 물었다. 활동지향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차원에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년 총 시찰자의 보고서는 내부적 과제의 실상을 여실히 드러냈다.(2) 형제애의 와해가 가장 큰 본질적 문제였다. 적절한 소임을 위한 갈등을 비롯하여 세대 간 격차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대외적 활동(봉사)에도 불구하고 성소 자들은 감소했고 공동체의 미래를 불안케 했다. 그리스도교 전반, 가톨릭교회 자체 탓도 있었겠으나 그럴수록 형제회 내부에서 새로운 동력을 찾는 일이 화급했다. 이는 교회의 복음화 과제와 직결된다. 형제적 유대의 복원이 교종께서 말한 교회 공동체의 복음화인 탓이다. ’교회 복음화 없이는 세상 복음화 없다‘는 말씀에 재차 공감하며 100년 역사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지금껏 ‘작은형제회’는 그리스도를 따름, 복음의 실행, 엄격한 가난의 가치를 지향해왔다. 하지만 이 과제가 난제인 만큼 한계가 있었고 분란이 항존 했다. 프란치스코 카리스마가 역사 속에서 실현가능한 것인지도 되물을 질문이었다. 하지만 다르게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 즉 공동체를 일궈 새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 수가 증가하고 있다.(3) ‘내가 너희 뒤를 좇아가도 좋으니 이제 더불어 같이 살자’는 경쟁에 지친 이들의 절규가 곳곳에서 들린다. 혼자 사는 일은 외롭고 여럿이 함께 하는 삶은 귀찮지만 사람들은 혼자를 버리고 여럿을 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외형상 종교적이지 않으나 함께 사는 삶은 내용적으로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 이점에서 형제성의 약화는 종교성의 퇴화라 말해도 좋다. 말했듯이 제레미 리프킨은 이 시대를 ‘공감의 시대’라 말했다. 인간 존재를 ‘Homo Empatipicus’라 정의하면서 말이다. 시대 구분과 함께 인간 존재 양식의 변화를 적시한 것이다. 중세시대의 경우 내세가 목표였고 신앙이 도달하는 방법이었다. 반면 근대는 이성을 통해 진보를 꿈꾸는 삶의 양식을 지향했다.

하지만 탈근대에 이른 지금 내세는 물론 진보도 절실한 주제가 될 수 없다. 늘 상 깨어지고 부숴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상처받아 괴로운 자신을 미루어 타자와 공감하는 공동체의 삶이 내세와 진보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여 공감과 공동체가 이 시대의 화두가 되었고 그것 자체가 종교적 의미를 지녔다.

공감하는 존재는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 경건의 형식을 벗고 경건의 능력을 보이라는 성서말씀도 이런 선상에서 이해할 일이다. 여기서 공감이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삶일 것인 바, 프란치스칸의 육화신학은 이점을 명확하게 서술했고 공동체(연대)성의 근간이라 할 것이다. 하여 가톨릭 수도원들 특히 작은 형제회는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언제든 본보기가 되었다.

가톨릭 신학자 ‘페르난도 우리베’는 프란치스칸 카리스마를 다음 6가지로 정리했다.(4) 오늘날 프란치스칸 수도사가 되는 의미를 명확하게 할 목적에서였다. 복음의 생활, 교회, 예수그리스도를 따름, 회개, 형제성 그리고 작음이 그것이다. 필자 보기에 앞선 것들은 마지막에 위치한 2개, 형제애와 작음의 가치를 살도록 하는 큰 명제들이었다.

형제애가 복음적 삶, 예수 따름의 내부(공동체)적 실천이라면 작음은 가난(경제)의 다른 말로서 그의 외부적 표현, 대 사회적 행위라 봐도 좋겠다. ‘작은 형제회’란 명칭 속에 이 개념이 함욱되어 있다. 필자는 이에 근거하여 3장에서 다룰 작은 형제회의 대내외적 과제를 서술할 생각이다. 어찌해야 형제애가 복원되어 공동체를 위한 에너지-You are my Energy-가 될 수 있겠는가?

페르난도 우리베는 여타 공동체(Comunitas)와 구별하여 형제회(Fraternitas)를 구별하여 사용했다.(5) 전자가 외적이며 규범적 차원을 지녔다면 후자는 친교적, 영적 개념이란 것이다.(6) 프란치스코 성인은 나중 것을 즐겨 사용하였다. 따라서 형제성을 뜻하는 ‘Fraternitas’는 구체적이고 특정한 형제들 모두를 일컫는다. 프란치스코는 이 단어를 갖고서 ‘작은 형제회’(Ordo fraturm minorum)를 서술했다. 이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 최후 유언에 따라 생겨난 것으로 역동적이며 영적인 가족의 형태를 띠었다. 프란치스코의 글에서 주님(Dominus) 다음으로 많이 언급되는 ‘형제’(Frater)라는 어휘는 회원들 각자가 언제라도 지녀야 할 정신을 뜻했다.

우리는 앞서 프란치스칸 영성과 여성성의 관계를 서술했었다. 여기서는 형제애가 하느님의 부성(父性)과 연루된 것임을 살펴야겠다. 부성과 형제성은 앞서 본 여성성, 마리아 사상과 어떻게 조화로운가? 우선 하늘 아버지, 성자 예수에 대한 언술에 잇대어 형제애가 선호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의 일을 실천하는 한 서로 형제이자 어머니가 된다고 말하였다.(7) 여기서 형제와 어머니는 동격이 된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했기에 형제이며 그로써 그리스도를 낳은 어머니가 된 것이다.

따라서 형제애는 단순히 생물학적 남성들의 집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잉태키 위한 뜻의 공동체였다. 생물학적 남성을 하늘 뜻을 산출하는 어머니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작은 형제회’는 공동체 내의 타자를 ‘영적 형제’라 일컬었다.(8) 모성이 자녀를 양육하듯 형제들 또한 형제들을 애정을 다해 양육하기를 바라서이다. 어머니처럼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키워 자라게 하는 삶을 요청한 것이다.

자식이 어미에게 주어진 선물이듯이 형제 역시 내게 주어진 선물이기 때문이다.(9) 선물로서의 타자, 바로 이것이 형제애의 기초이자 근간이었다. 따라서 형제애는 일상에서 체험하는 은총, 곧 성령의 활동이겠다. 이런 신학적 토대 하에서 프란치스칸은 공동체 안에서 인간 회복을 소망했고 공동체의 인간적 차원을 뛰어 넘고자 했다. 신앙과 언어, 민족이 같은 사람들끼리의 동종교배 적인 형제애의 초극을 지향한 것이다.

이런 형제애는 핵심 특징을 지녔다.(10) 우선 작은 형제회는 평등했다. 위계질서를 내세우지 않은 것이다. 여느 수도회처럼 장상이란 말이 통용되지 않았고 모두가 모두에게 형제였을 뿐이다. 그 앞에 ‘작은’이란 형용사를 붙여 종으로 오셨던 예수를 기억했다. 그렇기에 누구도 지배자의 위치에서 판단할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획일적인 것도 아니었다. 개체를 희생시켜 전체를 이롭게 할 목적이 애시당초 없었던 탓이다. 개체(부분)가 전체에 속했으나 전체가 그 자체로 개체(부분)이기도 했다. 차이가 차별이 되어 높낮이로 평가되는 것도 금했다. 서로간 차이(고유성)를 상호성을 통해 서로를 완성시키고자 했다. 한 마음과 한 영혼(cor unum et enima una)되는 것이 그 실상이다.(11)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전히 형제들 각자의 고유성이다. 기능적 효용성 차원을 넘어 이를 상호(상보)성으로 여기는 일이 사랑인 까닭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관계 아닌 것이 없다는 동학적 시(侍)의 영성이 이점에서 사랑과 동격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조적 존재일 뿐 그 자체로 완결된 자족적인 것은 세상 천지에 없음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더구나 ‘작은 형제회’는 가난과 기쁨을 최고 덕목으로 삼았다. 가난을 기쁨으로 수용하여 살며 전하라는 것이다. 그럴수록 자신의 결핍을 솔직하게 노출시켜 타인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 서로에 대한 절대 신뢰 속에서만 가능할 터, 타인의 필요를 먼저 자각하여 배려할 일이다. 비방이나 분노 그리고 시샘, 우월 감정은 이곳서 자리할 여지가 없어야 옳다.

하지만 같은 옷을 입고 동일한 식탁을 대하며 하루 일과 역시 대동소이하나 목하 공동체는 형제애의 와해를 걱정할 지경에 이르렀다. 세상 사람들은 공동체를 원하나 정작 수도회는 축소, 폐지되는 실정이다. 세속을 능가하는 ‘작은 형제회’의 숭고한 정신, 영성적 가치가 80년 남짓한 역사를 지나며 희미해진 것이다.

역사는 처음이 있어 마지막이 있지 않고 마지막이 있어 처음이 있다는 함석헌의 말을 생각해 본다.(12) 이 땅에서 프란치스칸의 영성과 신학이 뿌리내리지 못할 경우 처음(고대) 역사도 실종될 것이란 경고이다. 역사 속에서 그 뜻이 실현되지 못했다면 그 이념은 사라져야 옳다는 것이 소위 탈현대주의의 시각이다. 역사에서 실패한 마르크스주의 역시 사라져야 옳다는 이들 주장에 대해 아직 그것은 미완의 과제로 있을 뿐 폐기될 수 없다고 변호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점에서 프란치스칸 정신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미완의 과제로서 지켜 낼 것인가? 아니면 폐기될 유산으로 기억될 것인가? 본래 그 정신과 영성이 급진적, 개혁적일수록 내외적 차원에서 큰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예수가 그랬듯이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시대를 구원코자 인간 세상에 ‘뉴 노멀’, ‘가난’을 선포한 존재였다. 그 뜻을 교종이 다시 전하고 있으나 가톨릭교회 내외부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제도화된 인습적 의례와 우리들 영혼을 빼앗는 자본주의적 경쟁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베르다이에프의 말을 빌리자면 자유인이 부재한 탓이다.(13)

종교세계 안에서도 온통 주인과 노예들의 의식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반복된 의례, 제의가 결코 그리스도 모방을 넘어 그를 따르는 자유인을 만들 수 없다. 길을 가다 길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삶의 현장과 부닥칠 때 더 많이 생겨날 수 있다. 이점에서 전통적 육화신학은 시대를 앞선 이반 일리치 신부의 시각에서 확대해석 될 필요가 있다. 그는 “하느님의 성육신은 구체적인 현장에서만 재현 된다”(14)고 말했다. 그는 온갖 피조물에서뿐 아니라 강도만난 여리고 현장 속 사마리아인의 행위에서 육화의 재현을 봤다고 한 것이다. ‘고통 받는 삶의 현장이 내게 꽃으로 다가왔다’(15)고 고백한 평신도 신학자도 생겨났으니 우연일 수 없겠다.

항차 그리스도를 따름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생각할 일이다. 삶의 현장이 모방을 넘어 따름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를 선사할 것이다. 부족한 우리들 형제애를 교정하는 일 역시 현장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이점에서 우리들 봉사는 ‘뉴 노멀’을 위한 투쟁일 수도 있겠다. ‘가난한 자를 위해서’, ‘자발적 가난’을 넘어 부익부빈익빈 세상을 만드는 구조와의 투쟁, 그 일에서 프란치스칸 형제애가 맘껏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자발적 가난한 삶으로의 회복, 프란치스칸 작은 형제회의 외적 과제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외적 과제를 언급할 지면에 이르렀다. 내외적 과제가 본래 하나로 엮어져 있는 까닭이다. 주지하듯 ‘작은 형제회’가 지금껏 JPIC 주제에 앞장선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여타 가톨릭교회 내지 수도원들에 견줄 때 프란치스칸회에서 유독 본 주제를 자기화시킨 결과였다. 정의, 평화 그리고 환경을 주제로 한 공부를 거듭 축적해 왔던 것이다.

비록 ‘작은 형제회’가 외적 활동의 과함을 걱정했으나(16) JPIC는 인류 생존을 위한 피할 수 없는 과제이기에 향후 본회의 존재근거가 되어도 좋을 만큼 중차대하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창궐시킨 기후붕괴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를 경제적 부정의와 자연과의 공존파괴의 결과로 여기며 달리 행동치 않으면 지구의 미래가 없다고 경고했다. 이점에서 프란치스칸 ‘작은 형제회’가 설립된 당대를 반추할 필요가 있다.

본래 프란치스코 역시 당대의 빈곤(가난)문제를 해결코자 애쓴 존재였다. 종교전쟁의 결과로 유럽에 유입된 나병환자들의 치유를 목적하여 수도회를 세웠던 것이다. 수도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구원을 바랐고 그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을 따랐다. 이후 프란치스칸 형제회에서 경제신학을 발전시켰고(17) 생태사상을 전개했으며 해방신학을 모색한 것도 오롯이 모순된 세상을 구원코자 함이었다.

20세기 공의회였던 JPIC 세계대회를 발의했던 폰 봐이젝커 또한 본 주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그리스도 구원도 실현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렇기에 ‘작은 형제회’는 차제에 우리 시대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역량을 힘껏 발휘하면 좋겠다. 설립초기부터 형제적 경제공동체를 고민했고 생태적 지평을 갖고 있었기에 이들 속에 축적된 영적 지혜가 시대를 교정하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기대이자 확신이다.

이런 이유로 프란치스코 영성과 신학 속에서 경제 신학적 관점을 찾는 일이 핵심이다. GDP 위주의 탐욕적 경제시스템을 대신할 방안을 얻기 위함이다. 여기서 형제회 앞에 붙은 ‘작음(minoritas)’이란 형용사의 말뜻을 찾는 일과 자본주의가 금과옥조로 여겼던 사유재산에 프란치스칸의 이해가 중요하겠다. 비록 프란치스코의 글에서 발견되지 않으나 ‘작음’은 프란치스칸 존재형식의 본질적 구성요소이다.(18)

여기서 작음은  정적이지 않고 역동적이다. 어느 상태에서든지 더 작은 것을 지향하는 까닭이다. 극빈(極貧)을 상정하는 뜻을 담았다고 보면 좋겠다. 또한 계층적 신분사회 대신 평민층을 우선하는 사고 틀이라 말할 수 있다.(19) 어떤 직위도 갖지 않은 평범한 대중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우월이란 생각 자체를 버린다는 뜻을 지녔다. 이런 삶을 살겠다는 순종의 의지 역시 작음 속에 내포 되었다. 끝까지 자신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일체 지배권에 대한 거부, 자기 부정의 정신이 농축되어 있다.

그럼에도 핵심은 ‘작음’은 세상과 관계 속에서 극빈으로 불리는 무소유의 가난을 적시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탐진치(貪嗔痴) 자체에 대한 부정이겠다. 생계를 위한 노동만이 전부가 된다. 그럴수록 하느님 자비는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일체를 자기 것으로 삼지 않는 이런 가난은 급기야 자연 피조물을 형제로 수용할 수 있다.(20) 자신을 피조물과의 형제성이란 특이 관계 속에 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태양찬가는 소유 욕구를 탈각시키는 ‘작음의 노래’라 일컬어졌다.(21)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프란치스칸 경제신학, 즉 사유재산에 대한 내용을 얻을 수 있다. 중세 무역활동은 이윤추구, 자본 축적을 야기했고 지주가 된 수도원조차 경영주체가 된 현실에서 프란치스코의 생각을 살필 일이다. 알다시피 돈이 거래수단을 넘어 자본축적의 수단이 되자 당시 고리대금업도 성행했다. 신흥 주체인 상인들(22)의 이윤추구(고리대금)를 당시 교회는 하느님 것(시간)을 도적질 하는 것으로 여겨 인정치 않았다.

그럼에도 신흥세력과 함께 극빈자들 역시 세상에 가득 찼다. 이런 극단 상황에서 프란치스코는 ‘가난’의 종교, 사회적 의미를 생각하였다. 그 역시 상인계급 출신이었으나 자발적 가난을 택한 것이다. 그에게 정의는 자신의 부(富)를 하늘에 귀속시키는 일었고 가난을 통해 표현된다고 믿었다. 말했듯이   하늘의 것이란 공적인 것이자 가난한 이들의 몫이란 말뜻이다.(23)

여기서 자선은 공동체 안에서 형제애를 갖고 극빈의 삶을 산 삶의 결과라 하겠다. 이러 삶이 가능했던 것은 사유재산에 대한 신학적 견해로 인함이었다. 공동소유를 주창한 자연법 사상이 원죄 이후 실종, 폐지되었다고 본 것이다.(24) 사유재산을 자연법 범주에 포함시킨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가 있었음에도 이를 뒤엎은 프란치스칸 사유의 과격함이 놀랍다. 사유재산을 본질(자연법)이 아니라 ‘우연’(실정법)으로 본 것이 프란치스칸의 경제 신학적 관점이었다.

하지만 우연적인 것은 필히 공동선을 지향해야만 했다. 이윤추구(이자)를 허용했지만(25) 돈이 자본으로 축적되는 것을 거부할 목적에서였다. 이자를 당대처럼 고리대금 아닌 경제활동 일환으로 본 것은 시대를 앞선 판단이었다. 근대 자본주의 맹아를 수 백 년 앞서 이곳서 찾을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공동선을 우선했기에 근대 자본주의로는 설명 못할 여지를 남겼다. 정작 자신들은 자발적 가난을 살면서 돈이 세상 사람들 삶을 더욱 귀하게 만들 수 있음을 믿은 것이다. 돈의 ‘유용성’과 그 ‘가난한 사용’에 터해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고자 했다.

이런 맥락에서 15세기 프란치스칸 공동체는 도미니칸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초(超) 저리 대출은행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26) 이는 상업(자본)활동을 긍정한 결과였으나 당시 성행하던 유대인 고리대금업과 변별되는 참신한 신학적 대안이기도 했다. ‘가난’이란 종교적 개념을 경제적으로 이해하여 사회에 정착시키고자 했던 까닭이다.(27) 이를 위해 작은 형제회는 일종의 분배적 정의 개념을 갖고 부자들에게 빈자를 위한 기금을 호소했다. 이런 방식으로라도 부(富)의 순환을 목적한 것이다.

필자로선 본 은행이 교황으로부터 승인(1515년)된 이후 역사 속에서 얼마나 기여했는지 더 많이 알고 싶다. 여하튼 자발적 가난을 통해 수도원 밖 사람들의 가난을 사회 경제적 차원에서 관심했던 프란치스칸의 경제신학은 크게 치하 받을 일이다.

이런 프란치스칸 역사는 작금의 자본주의 상황에서 의당 재(在)의미화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부자들의 ‘연민’과 ‘동정’에 의존했던 당시와는 변별된 방식으로 그리되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적 시각에서 구조전복을 강조하는 해방신학자들의 견해를 취하는 것도 전리(全理)로 수용키 어렵다. 이하에서는 종교와 사회를 하나로 봤던 프란치스칸의 경제신학을 재평가하는 가톨릭교회 시각을 소개, 비판적으로 논할 것이며 팬데믹 시대를 위한 의미, JPIC 실현을 위한 역할을 살피고자한다.

주지하듯 프란치스칸 작은 형제회는 불평등한 세계 경제를 회개의 주제로 삼았다. 과도 소비/쾌락주의와 절대 빈곤이 공존하는 세상은 창조 후 ‘참 좋았다’ 환호한 하느님에 대한 부정이라 여긴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바울적 이방기독교와 예루살렘 공동체의 분열시 서로를 묶어주는 공통점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돌봄과 배려를 언급했다. 허나 목하 인간은 자본의 노예가 되었고 세계화로 부지불식간 초국적 대기업의 부속품으로 전락했으며 상응하여 기후붕괴 상태를 초래했다. 이로써 상대적이든, 절대적이든, 인간이든, 자연이든 모두가 가난해졌다.

여기서 ‘작은 형제회’는 프란치스칸 경제신학-세상은 하느님 분깃으로서 일체가 선하기에 성사적이다-에 기초해 형제적 경제공동체를 상상했다. 사람은 물론 자연 피조물 모두를 완성시킬 목적에서이다. 이것을 지상의 삶을 허락받은 인간의 소임이라 여겼다. 가난한 이들과 신음하는 자연을 완성, 회복키 위한 형제적 경제공동체, 아마도 이것은 공동선을 달리 표현한 것이겠다.

하지만 구체적 실상으로 사회적 기업이 제시되었다.(28) 중요한 제안이겠으나 지금은 그 차원을 넘어서야 옳다. 물론 프란치스칸에서 어떤 유형의 사회적 기업이 존재했고 지금도 운영되는지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가난한 이들이 주인 되는 그라민 은행이 구체적 예로 제시되었을 뿐이다.(29) 하지만 출발점은 되겠으나 이것으로 세상은 달라질 수 없다. 기본소득은 물론 기본자산(피케티)까지 회자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사회(경제)적 평형을 이루기 위해 새로운 경제시스템을 요구받고 있다. 현재 논의 중인 기본소득은 팬데믹 이후 시대를 결정짓는 그린뉴딜 개념과도 상관있다. 우리의 경우 향후 탄소발생 비율 높은 포항제철, 당진화력발전소의 폐쇄가 불가피할 것이다. 그 결과 실직자들에게 막대한 기본소득이 필요하며 청년 창업을 위해 기본자산까지 고려할 경우 그 비용은 정부가 감당하기 버겁다. 구글, 네이버 등 인류 공동지식으로 돈 버는 플랫폼 기업들이 감당할 몫이 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린뉴딜을 위한 종교들의 역할 또한 작지 않다. 교종의 말대로 ‘벌어먹지 않고 빌어먹어야’ 할 종교가 벌어서 축적한 재산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개신교 신학자 본회퍼도 교회건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 구하라고 말했었다. 이점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제국의 구조』(30)에서 한 생각을 빌려 오고 싶다.

저자는 국가 생성 이전 씨족 사회에서 증여와 답례가 중요한 교환 양식인 것에 주목했다. 그러나 이런 양식이 이후 국가체제 및 자본주의 하에서 약탈과 상품교환을 통해 억압되었던 바, 이것의 회귀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복귀가 아니라 고차원적 회복의 차원에서 말이다. 자본주의 종언이 점쳐지고 자연이 무너져 내리는 정황에서 무한증식(성장)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그린 뉴딜이란 전제 하에서 기본소득, 기본 자산을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겠다.

이런 정황에서 저자는 증여의 힘을 다시 소환했다. 역사 속에서 생겨났던 뭇 가치들, 계급, 국가, 가부장제 등을 살해하는 강박적 의무로서 증여의 힘, 저자는 그것을 초자아의 길이라 했다.(31) 종교인이 아니었기에 표현방식이 우리와 다를 것이나 그는 초자아 혹은 강박적 의무란 말로서 나름 종교성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세상이 바로 그가 꿈꿨고 칸트가 말했던 세계공화국의 미래였다. 프란치스칸의 표현대로 공동선이 이뤄진 세상이라 할 것이다.

필자는 이점에서 순수증여를 어느 글에서 성령의 활동이자 역사(役事)라 칭했었다. 움켜진 손을 펴는 일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아는 까닭이다. 순수증여가 자발적으로 이뤄졌던 교환양식체제, 재산을 기부했고 하늘나라를 선물로 받은 삶의 양식, 바로 이것이 수도원의 첫 모습이 아니었겠는가? 순수증여를 통해 교회와 수도원은 자신의 물적 토대를 이뤘고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일 수 없겠으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제 그것을 세상을 향해 돌려주는 것이 순수증여의 현재적 의미라 생각한다. 향후 성령의 활동으로서 순수증여가 평신도와 교회 모두의 삶의 양식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로써 초자아, 즉 자본주의를 초극한 신앙의 모습(공동선)을 세상에 온전히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란다. 이처럼 그린 뉴딜 시대에 국가는 국가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그리고 종교는 종교대로 감당할 몫이 있다. 이 분깃들이 합해져 선을 이룰 때 30년 전 공의회로 모인 JPIC 서울 대회의 정신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듯 JPIC는 그린 뉴딜을 선행, 촉발시킨 기독교적 표현이었다. 그것이 리우 환경회담(1992)을 성사시켰고 탄소배출량 감소를 결의한 원년이었던 까닭이다.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가 JPIC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앞으로도 그리할 것을 기대한다. ‘사실적 종말’에 이른 지구상황을 선한 하느님의 창조물로 되돌리는 지난한 투쟁이 될 것이다.

JPIC는 정의, 평화 그리고 생태계 보전이 상호 맞물린 주제인 것을 각성시켰다. 기후붕괴로 인한 피해자는 가난한 사람들이며 국가 간 무기경쟁은 자연과 사람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JPIC모순이 집적된 국가로 판명된 탓에 본대회가 서울서 열렸다는 사실이 엄중하다. 지구온도 상승(1.5도 이내)을 막아 지구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다. 환경학자들은 지금처럼 탄소를 배출할 경우 2030년 이내에 사실적 종말, 기후붕괴의 징조들이 곳곳에서 나타날 것이라 전망했다.

2020년 세계적 차원의 팬데믹 상황과 이 땅 도처에서 경험한 대홍수가 그 전조일 것이다. 탄소배출 감소를 위해 생사를 거는 것이 천지창조를 고백하며 사도신경을 외우는 기독교인들의 책무가 되었다. 앞서 말했듯 지질학적 홀로세를 인간세 나아가 자본세로 변질시켜 자신들만을 위해 살았던 인간이 치를 대가라 하겠다.

국가적 차원의 산업 구조조정(4차 산업)이 절실한 시대가 되었고 그럴수록 거듭 말하지만 기본소득이 중요할 것이다. 공유경제, 순수증여로 기본소득이 실현될 경우 탄소제로 사회를 꿈꿀 수 있다. 환경을 살리는 사회적 기업의 존속, 유지도 필요할 것이나 지금은 거시적 차원의 구조변경이 급선무가 되었다. 이 땅에서 JPIC 운동은 그린뉴딜을 성사시켜야 한다. 현 정권을 향한 비판과 감시는 이런 차원에서 이뤄질 일이다. 그린뉴딜과 녹색 성장은 전혀 다른 개념인 까닭이다.

미주

(미주 1) 프란치스칸 작은 형제회 편, 『한국의 작은 형제들 1997-2017』, 작은형제회 한국관구 2017, 102.
(미주 2) 『한국의 작은 형제들 1997-2017』, 157.
(미주 3) 조현,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도서출판 휴 2018. 이 책 서문(프롤로그)를 보라.
(미주 4) 페르나도 우리베,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정창표 레오/고계영 바오로 역, 프라니스코 출판사 2010, 16-17.
(미주 5)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81.
(미주 6)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84.
(미주 7)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87. 본 책 각주 127 재인용.
(미주 8)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88.
(미주 9)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89.
(미주 10)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90 이하.
(미주 11)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94-5.
(미주 12)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 역사』(한길사 2016). 말미에 나오는 말이다.
(미주 13) N. 베르다이에프, 『노예냐 자유냐』, 이신 역, 도서출판 늘봄 2015. 서문 참조.
(미주 14) 이반 일리치의 말로 기억 하는 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신학적 언술이다.
(미주 15) 오재식, 『내게 꽃으로 다가온 현장』, 대한기독교서회 2012.
(미주 16) 『한국의 작은 형제들 1997-2017』, 57.
(미주 17) 김일득, 『프란치스칸 경제』, 프란치스코 출판사 2016, 149 이하 내용.
(미주 18) 『프란치스칸 경제』, 104-105.
(미주 19) 『프란치스칸 경제』, 110-111.
(미주 20) 『프란치스칸 경제』, 114.
(미주 21) 『프란치스칸 경제』, 135.
(미주 22) 이슬람 지역과 무역했던 이들은 거지반 유대인이었다.
(미주 23) 『프란치스칸 경제』, 77 이하 내용.
(미주 24) 『프란치스칸 경제』, 108-109. 이것은 주로 둔스 스코투스의 의견이다.
(미주 25) 『프란치스칸 경제』, 109.
(미주 26) 『프란치스칸 경제』, 109-110.
(미주 27) 『프란치스칸 경제』, 본 책 3장 끝부분을 보라.
(미주 28) 『프란치스칸 경제』, 178.
(미주 29) 『프란치스칸 경제』, 179.
(미주 30) 가라타니 고진, 『제국의 구조』, 조영일 역, 도서출판b 2016.
(미주 31) 『제국의 구조』 6장 이하 후반부 참조; 이정배, 『수도원 독서』, 신앙과 지성사 2018, 299-311.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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