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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약함은 하나님의 무기약한 것을 강하게 하시는 분, 하나님!(삿 7,1-3; 고후 12,1-10)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1.01.28 16:12
▲ Julius Schnorr von Karolsfeld, 「Gideon’s Call」 (1860) ⓒWikipedia

세상을 지탱시키는 자연법칙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이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현상에 관한 것으로 위치와 속도를 둘 다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정확히 측정하면 할수록 다른 하나는 그만큼 더 부정확하게 됩니다.

우리 인식의 한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는 바로 그 모호성 위에 존재합니다. 정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 부정확성 내지는 불확정성 위에 존재하니 신기할 뿐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포착되기를 거부하시는 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사랑과 정의입니다. 문제는 때로 양자가 충돌하고 심지어 서로 배타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언어와 표상의 한계일 수 있습니다.

어느 하나를 강조하면 할수록 다른 하나는 시야에서 그만큼 더 사라지고, 그 결과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대단히 심각한 오류입니다. 그 두 가지가 모호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우리의 잣대로 측정할 수 없는 분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 곧 하나님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을 때마다 시련을 겪습니다. 기드온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지배 아래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찾아와 ‘야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한 기드온의 반응이 어떠했을지 아마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왜 우리에게 이런 고통스런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하는 그것입니다.

우리들도 비슷하게 던졌을 그러한 반문입니다. 그것은 지금의 상태가 자신들에게서 비롯되었음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러한 상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들을 지키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의 죄와 상관없이 그렇게 그 한 가지 ‘사랑’으로 규정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고난당하는 의인도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가 보기에 하나님은 악인이 부당한 일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시고 또 일으킨다면 바로 시정하시는 ‘정의’의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며 동시에 정의의 하나님이기에 자신들의 처지에서 어느 하나에 초점을 맞춰 질문하고 탄식합니다.

오늘의 본문들은 하나님이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가 측정할 수 없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고 확인한 후에 백성들과 함께 미디안 군대와 맞서려고 했습니다. 굳이 백성이라고 한 까닭은 그들이 일반적인 의미의 군인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군대가 아닌 그들이 군대와 싸워서 이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숫자라도 많아야 할 텐데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싸움이 무서운 사람은 돌아가라고 하니 곧바로 삼만 이천 명 가운데 무려 이만 이천 명이나 돌아가고 만 명만 남았습니다. 그래도 남은 자들은 싸울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그만큼 되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도 너무 많았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직접 사람들을 테스트해서 선발하십니다. 그 가운데 불과 삼백 명이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처음 모인 사람들의 1%도 채 안 되는 숫자입니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며 내가 내 힘으로 나를 구원했다’고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며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그런데 왜 그런 염려를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심판과 구원이 모두 하나님에게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십니다. 사람의 숫자나 군대의 강함이 하나님의 도구일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사람에게는 안심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고 자기를 자랑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사람은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뒷전으로 밀어낼 수 있습니다. 강함 또는 강한 것이 하나님 대신 의지할 것이 됩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하나님은 많음이 아니라 적음을 택하시고 강함이 아니라 약함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여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어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약함을 대신하고 그의 능력으로 약한 사람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의와 정의와 평화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강함이 지배하고 강함을 자랑하는 질서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이기에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질서와 대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활동 방식을 경험했습니다. 객관적으로 그는 약한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회심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고 그를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이름처럼 작은 자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저절로 깨달아진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환상과 계시를 보여주셨지만, 그가 그 때문에 자만하게 될까 염려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며 자신의 힘으로 이 일을 했다고 할까 염려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는 바울 개인이기에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그를 제어하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사탄의 사자라고 부를 만큼 그것은 고통스러운 육체의 가시였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구합니다. 바울은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마도 그랬으니까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 그것을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고난당하는 의인들의 경우처럼 그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의로운’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좀 냉정하게 들리고 약간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으로 답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왜냐하면(!)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너는 충분히 내 은혜를 누렸다. 이것은 그의 삶이 보여주는 대로 틀리거나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다음 말 때문에 조금 달리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마치 그가 약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그를 약하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옳았음은 바울이 그의 약함을 자랑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약할 때 하나님께서 강하게 일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그가 된 것이 자기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의 무기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한탄하지 맙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구이며 하나님의 강함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며 기뻐할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의 약함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머물 것입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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