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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더위사자모 소리
장사모 | 승인 2021.03.05 15:02
▲ 고유 명절 중에 하나인 정월대보름에 더위팔이라는 풍습이 있다. ⓒGetty Image

‘내’ 더위 ‘네’ 더위 먼 데 더위. 결론부터 얘기하면 나는 올 해의 더위팔기를 성공하였다.
세속적이고 금기된 것들을 위반하여 은밀하게 연결하는 정월대보름의 축제날 아침.

우리집은 에어컨이 없다. 올 여름은 또 어떻게 보내야 할까?

스스로 걸음을 걷지 못하고, 체온을 조절할 능력도 미약한 유아와 함께 무더위를 지나는 것은 곤혹스러웠다. 지구를 지킨다고 내 자식 잡을 지경의 무모함이라니. 아이들은 속옷만 입고 생활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찬물 받아놓은 욕실을 오간다. 물에 담가서 몸뚱이에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그대로 말리며 더위를 식힌다.

양기가 넘치는 어린 자녀들은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펄쩍거리고 뛰어다니다 끈적한 땀으로 바뀐 물을 내게 안겨 전달한다. 털털거리며 도는 한 점 선풍기 바람마저 뜨거운 바람을 후후 불어낸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나 같은 개인들이 아무리 탄소배출을 조금 줄인다한들 세 발의 피 아니던가. 석탄발전으로 엄청난 탄소배출을 하며 쓰라고 에너지를 만들어 주는데 말이다.

스스로 딱하고 미련한 생각이 드는 때가 적지 않다. 지난여름, 기후위기로 인한 유래 없는 저온현상은 안타깝지만 기후약자로서는 감사하기도한 씁쓸한 경험이었다. 새해가 시작되니 벌써부터 다가올 더위에 에어컨 없는 우리 가족의 여름 나기가 걱정된다.

‘오늘이 더위를 팔 절호의 기회인데’

정월대보름 민간신앙의 주술적 행위를 목사 부인이 고민했다. 우리 가족의 무더위를, 정말이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고 지낼 누군가에게 내가 대표하여 몽땅 팔고 싶다는 절실함으로 말이다. 그렇지만, 이내 사려는 사람은 없고 나의 고통을 누군가에게 전가하려는 이기적인 욕심으로 팔려는 사람만 가득할 것 아닌가 하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또는, 내가 팔기에 성공한다하더라도 부가하여 창출된 더위를 폭탄 돌리기 하듯 결국 누군가는 어마어마한 더위를 책임지게 되는 것 아닌가?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을 논하지 않더라도 평범한 양심으로도 구분해 낼만 하다.

사순절을 지내는 지금에 평신도는 더위를 피하려는 사소한 일상에서 엄청난 물음을 갖는 중이다. 일용직 노동자가, 성소수자가, 난민이 … 소리 없이 사라진다. 그 누구도 마땅히 희생해도 될 만한 사람들은 없다. 보복할 힘없는 누군가에게 자행되는 폭력을 여전히 목격하고 있다.

여전히 나와 우리의 안녕을 위하여, 다수의 해로움을 막을 성스러운 제물을 찾는 중이다. 제의에 의한 성스러운 것의 추구함이 오히려 더욱 성스럽지 못한 폭력적인 것들로 응보하고, 종교는 그것을 은폐하며 거룩하게 나타나도록 기능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폭력이 공동체의 질서와 평화를 위해서 묵인된 채 불구경하며 끝나지 않도록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나는 십자가의 증인이다.

‘제가 사겠습니다!’

나의 처지를 딱히 여긴 지인이 비대면 방식으로 응답하였다. 자처하여 더위를 사겠다는 사람의 등장으로 그럴 듯한 나의 질문이 무참해지고 말았다. 게다가 그의 형편도 크게 다를 바 없음은 고마움과 더불어 걱정스럽기까지 하였다. 저녁 무렵에 그도 전화로 더위를 팔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안도하였다.

이쯤 되면, 더위 파는 행위에 대하여 나는 절실한 믿음에 이르러 있다는 웃음도 난다. 가상의 더위판매는 우리 모두에게 강요에 의한 희생이 아니라 기꺼이 희생하여 주는 연대의 경험을 하도록 하였다. 흩어진 우리는 각자 어렵고 힘들지만, 나와 같은 혹은 나보다도 못한 이웃의 고통을 기꺼이 함께 나누려는 자발적 실천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가만 생각 해 보니 남의 더위 받기를 거부할 수 있다

더위를 팔려는 사람이 자신을 부르는 것에 응답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팔려는 상대방에게 재빠르게 자기 더위까지도 팔 수 있다. 이러한 규칙은 모두에게 공유되어 있다. 약자에게 거부할 권리, 전복의 기회를 허락한다. 나에게 판을 깨는 해학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상실되어 가는 우리의 공동체 가치를 절실히 회복해야 한다는 필요를 발견한다.

그러고 보니, 과거 씨족 중심의 공동체에서 성씨가 다른 세 집이상의 이웃과 약밥을 나누어 먹는다는 풍습은 구석구석 사랑으로 돌보고자 하는 것 아니겠는가. 상상만으로도 배부르게 할 한 술, 약이 되는 밥이다. 그 구성원들 모두가 서로 차별 없는 생명으로 축제의 자유로움을 누리도록 하고 있다.

이러저러한 생각하는 중에 속보가 전해졌다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코로나19에 대한 백신의 첫 접종이 시작되었다는 뉴스다. 전염병의 유행 그 사이. 어떤 이들은 재난 유토피아를 이야기했고, 어떤 이들은 재난 자본주의의 기회로 삼아 그야말로 우리의 터전은 흔들려 위태로웠다. 뒤섞여진 무리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성찰하게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쓰기 등 과학적 방법만이 재난을 건너갈 유일한 해결이라고 이야기 하는 세상 속에서 이웃을 망각하며 오늘에 골몰하였다. 첨예한 사회갈등에서 드러난 기독교의 노골적 배제와 집단적 폭력도 참으로 민망하였다. 십자가는 무자비한 일치가 아니라 다양하고 아름다운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백신이다.

낮은 자리에서 기꺼이 우리를 상대하신 신이신 그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 기꺼이 소통하게 할 가능성이다. 태극기 집회, 난민과 소수자 혐오, 교회세습, 목회자 성폭력, 등등. 예수의 십자가 지심은 이 폐허에서 나에게 사랑과 연대를 기억하게 한다. 세상을 향해 ‘아니’라고 당당히 외칠 마지막 보루, 잔뜩 움츠려 곱송그린 누군가에게 등을 펼 평안한 둥지가 되어주는 희망지피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우리가 바로 회복해야할 일상이다.

앞선 그 분을 기억하니, 무능력한 나도 용기가 난다. 예수의 흘리신 피를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겠다고 다시금 각오한다. 우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자. 희망이 꺾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참담한 우리를 살리고자 하는 그 분의 사랑이 우리를 통하여 진정 나타나길 기도한다. 현실은 매서운 한파를 지나고도 다시금 굶주릴 보릿고개를 앞두었으나, 오늘 풍요로운 축제의 날에 함께한 우리는 자유와 생명의 소망을 누린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네’ 더위 ‘내’ 더위 먼 데 더위!

장사모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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