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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데이, 불편한 너무 불편한 날에 대한 단상사자모 소리
장사모 | 승인 2021.03.19 15:23
▲ 상술과 폭력이 깃든 화이트데이 ⓒGetty Image

화이트데이에 혓바닥에 달달하게 녹아내리는 맛과 향은 동글동글한 추억 하나쯤은 떠오를 터이다. 그런데, 부부사이에 사탕을 주고받을 달콤함이 다 녹아내려서일까? 일본에서 유래한 상술의 날에 호구(虎口)가 된다는 불쾌함이 밀려온다.

게다가 사랑의 고백이란 것이 한날한시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2월에 여자가 먼저 선물을 가져다 바치고, 남자는 그 이후 3월에 답례를 하는 것이라니! 지연이자를 보태어 주지도 않을 뿐더러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행동하도록 하는 전혀 평등하지 않은 행위가 언짢다.

게다가 팔려는 그 단 것들, 초콜릿과 사탕은 수탈과 착취의 추억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지 않는가? 제국주의자들은 침략한 땅에서 아메리카 원주민과 사고 파는 흑인 노예로 인권을 유린하며, 대량재배와 생산을 이루었다. 카리브해에 도착한 배는 가득 실어온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시장에 퍼부었다. 그러고서 그 배는 사탕수수를 채워가서 설탕이나 럼주로 가공하여 판 뒤에 다시 더 많은 노예와 바꾸는 삼각의 기막힌 거래가 일어났다. 여러 대륙에 걸쳐 발생하는 식민화에 의한 시장 확장과 대량 생산은 부자 계급과 강력한 부자 나라를 만들었다. 

식민시대 이후에도 거대 자본은 여전히 삶의 터전을 피폐하게 한다. 빈곤의 원인을 게으름이나 능력으로만 탓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개인들에도 국가 간에도 존재한다. 생산과 유통, 마케팅의 글로벌 시장 경제화는 불평등한 분업구조가 여전하며, 빈부의 격차를 더욱 크게 하였다. 자기 손으로 딴 카카오 원두로 만든 초콜릿 한 번 먹어볼 수 없는 빈곤한 아동들의 노동은 예전의 일이 아니다. 혓바닥의 달콤함이 가슴으로 내려와 씁쓸함만 남긴다. ‘가이아’를 잊어버린 이들이 ‘파차마마’를 짓밟았다. 그 후에는 ‘축복받은 성모상’의 자리를 ‘자유의 여신상’이 대신한다.

마침 주일인 이번 화이트데이는 이러저러한 나의 생각을 더 복잡하게 이끈다. 기독교 또는 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하늘을 우러르는 우리는 왜 다 같이 평화롭게 잘 살지 못하느냐 말이다. 인류를 구원하려 피 흘리신 예수를 기념하고 기억하려는 매번 사순절에 있기도 하니 사실은 매년 반복한 물음이다.

둘째 주일이어서 대형마트의 의무 휴업일에 걸린다. 그래서인가? 동네 편의점은 벌써 몇 주 전부터 가게 앞에까지 판매를 위한 텐트를 만들어 상품을 진열하고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다.

동네 편의점에서 과연 얼마나 팔아줄까? 똑똑한 호갱님들이 미국에 상장 성공한 온라인 쇼핑으로 미리 구매하여 이미 새벽에 배송 받지 않았을까? 장바구니에는 사탕만 담았을까? 코로나로 가뜩이나 어려워졌을 골목상권을 생각하여 사탕이라도 동네에서 사기로 결심하였을까? 그래도, 동네에서 사려면 조금은 더 비쌀 것이라는 고민을 하면서 갈팡질팡 했을 법도 하다.

불공정한 시장의 구조를 그대로 둔 채로는 소용없다. 먼 곳에 있는 불쌍한 이들을 돕는다는 것은 당장 경제 형편에 따라서도 오락가락하는 선의다. 내가 아니라도 그런 마음을 품은 누군가가 도와주길 바랄 뿐이다. 아니, 세상에는 나보다 더 부자가 많으니 그런 나에게 비난할 사람은 없다. 애석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말씀은 성경에 박제되어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원조는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할지라도 우리는 다시 기억한다. 축적된 부는 잇대어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가능했기에 오히려 의무와 책임에 가깝다. 그러니 어려운 누군가를 위한 기부 행위라기보다 엄밀히는 나로 인해 피해를 입은 타자에 대한 보상행위 내지는 마땅한 답례다.

인류애라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자의 원조는 양의 탈을 쓴 늑대다 오히려 가난한 나라의 곤한 농민들 밥줄을 쥐락펴락 하는 강력한 영향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미 기득을 가진 이들에게 온통 유리하게 판은 짜이고 말았다.
 
아, 그러니 공정무역 상품 소비한다고? 불공정한 교역을 바꾸고자 정당한 대가를 생산자에게 지급하기 위해 비용을 더 부담한다. 그렇다면, 나는 생산자들의 삶을 바꾸는데 실질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윤리적 소비가 거대 다국적 기업이 소비자 감정을 자극할 드라마틱한 수단이 되기도 하는 불편함은 어쩌란 말이냐. 심지어는 유통단계를 줄였음에도 훨씬 비싸야 되는 불투명한 이유와 지불한 제품비용의 몇 퍼센트가 생산자에게 돌아가는지는 정보로 분명하게 제공 받고 있을까? 

나의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이렇듯 여전히 공정하지 않은 소비구조 안에서 나는 사회와 세계의 정의를 모색한다. 슬프게도 지난 주 생협에서 마스코바도 설탕으로 만든 사탕을 구입한 것이 생각난다. 마스코바도 설탕 생산자협동조합은 현지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세계공정무역협회의 인준기준 적용에 반발하며 2008년에 탈퇴하였다. 그런 사실은 내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있거나 어쩌면 가장 싼 값으로 지구를 구하는 듯싶은 자기만족 일지 모른다는 비관에도 다다른다. 나의 가치 소비는 지속하지도 못할뿐더러 지구 어딘가에 있는 타자에 대한 책임감에서도 여전히 비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물음과 고민은 희망으로 답을 구한다. 이웃나라 미얀마에서는 군부쿠데타를 반대하여 시민들의 목숨 걸기를 불사한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지구반대편 사탕수수 농장 주인의 아들 카스트로가 쿠바의 혁명을 이루었고, ‘노인과 바다’를 쓴 미국인 헤밍웨이와 함께 혁명을 축하하는 럼주를 마셨다. 나의 길벗들은 스스로 투쟁하고 연대하여 느리지만 소박한 삶의 변화를 여전히 일구는 중이다.

창세부터의 시간만큼 전능하신 하나님의 남성성은 더께가 쌓여 있다. 폭력으로 물든 것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에 품어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가능하도록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 하나님! 그 덕분에 나와 우리는 ‘이미’와 ‘아직 아닌’ 사이지만 구원을 이루려 노력한다. 교회 가는 길에 피어난 하얀 매화와 움트는 새싹들을 보노라니 딱딱한 감정이 일렁인다. 노자는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 부드럽고 약한 것이 딱딱하고 강한 것을 이기기 마련’(도덕경 36장)이라 했다.

아이들이 주일학교에서 받아 왔다며 입에 넣어준 사탕 하나를 녹여 먹으며 생각하니, 십자가의 도(道) 역시 그러하다. 사실, 오늘 나에게는 사탕보다도 파 한 단이 더 필요하다. 그 비싼 파를 사도 이미 밭떼기로 판 농민들은 부자가 될 수 없으니, 싸질 때까지 못 사 먹고, 안 사 먹는다. 다만, 부활절이 되거든, 파 송송 썰어 넣은 칼칼한 국밥 한 그릇 배불리 먹고 싶다.

장사모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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